186화.
“아무튼, 이야기해 줘서 고맙군. 여신의 특이점을 내놓으라 그랬다니…… 간도 크다니까.”
라케드가 조소했다. 그는 미레아가 고른 서류를 잠시 들여다보다 말했다.
“아까도 말했듯,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 바로 출발할 텐가?”
미레아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언제까지고 그의 뒤만 쫓을 생각이냐.”
“세피로스의 뒤만 쫓는 것이 아닙니다.”
미레아는 한번 숨을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라케드 님은 제가 5년 전의 상태와 똑같다고 하셨지만 애초에 제게 선택권은 얼마 없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저는 세피로스의 검이었으며 세피로스의 사냥개였죠. 그를 위해 많은 것들을 했고, 그를 위해 무엇이든지 했어요. 하지만…… 세피로스가 저를 떠난 지금은 그냥 저라는 사냥개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하겠습니다. 저는 한번 문 사냥감은 안 놓칩니다. 그러니 세피로스 역시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꾸미든 말이에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좋다. 다만, 그가 서리 여신의 해방을 바란다면 우리는 그에게 협조할 수 없어. 서리 여신의 힘으로 유지되는 게 이 세계이다 보니 말이지. 하지만 세피로스의 뜻대로 한다 해도 이 세계를 유지할 방법이 있다면 그를 막을 이유는 없지. 그렇지…….”
“그런데 그렇다면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아요. 세피로스는 서리 여신의 해방으로 이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까요? 세피로스가 서리 여신을 해방한 다음 무슨 일을 벌일지 전혀 모르겠어요.”
미레아의 의문에 라케드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네 말대로 나도 그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어. 그가 하는 일이…… 만약 정당한 행동이었다면 우리를 버리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저는 세피로스를 만나고 싶어요. 만약 제가 도울 수 있을 일이 있다면 돕고…… 아니라면 최대한 이야기해 볼게요.”
미레아에게는 여전히 세피로스는 가족과 같은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세피로스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세피로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제 가족이에요. 설령 리비엘로를 죽였을지 몰라도, 아직은…….”
미레아가 괴롭게 말을 잇자 라케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에도 시일이 촉박하니 내일 당장 출발해야 할 거야.”
“바라던 바입니다.”
라케드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직접 움직이고 싶기는 하나…… 나는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성지를 복구하고 벨로아 회장에게 인수인계해야 하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라케드는 서류 뭉치를 미레아에게 돌려주고는 볼일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이번에는 파울로를 붙여 주마.”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미레아는 그것만으로도 꽤 힘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야 조금 웃을 수 있었다. 라케드는 착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는 죽지 마라.”
“노력해 볼게요.”
라케드는 여전히 미덥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미레아는 애써 웃었다.
* * *
라케드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온 미레아는 편지함에 편지가 꽂혀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조금 전에 국제 우편으로 도착한 것 같은 그 편지는 푸른색의 실링 왁스로 봉해져 있었다. 왁스의 인장은 가문을 뜻하거나 단체를 뜻하는 문양이 아닌 단순한 산새 모양이었다. 발신지 주소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는데 대신 발신자 이름만 덜렁 있었다.
발신자의 이름은 날아가는 것 같은 유려한 필체로 ‘아리스 클라인셔드’라고 적혀 있었다. 미레아는 복잡한 기분으로 그것을 수거했다. 소파에 아무렇게나 앉아 편지 봉투를 이리저리 뜯어 보다 떨리는 손으로 왁스를 떼어 내었다.
봉투는 꽤 두툼했다. 미레아는 몇 장이나 되는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중 일에 치여 죽을 것 같단 투정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나머지 절반은 자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고서 같은 내용과 그리고 미레아의 근황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아리스의 편지를 키득거리며 읽어 내려가던 미레아는 제일 마지막 줄을 보고 멈칫했다.
‘네가 그리워. 미레아, 정말 보고 싶어.’
유독 그 문장만 꾹꾹 눌러 썼는지 잉크가 진하게 번져 있었다.
미레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편지지를 접어 다시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서랍장 안쪽 깊숙이 보관했다.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 * *
미레아는 군장을 등에 메고 끙차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동행하는 파울로의 짐 역시 만만치 않게 많았다. 다른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둘은 커다란 군장을 메고 연병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걷고 있는 둘의 등 뒤에서 클랙슨이 빵빵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라일라가 지프를 타고 쫓아오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둘이 멈춰 서자 라일라 역시 지프를 세웠다.
“지금 떠나는 거야?”
“응.”
“그렇다면 나랑 같이 가자. 어차피 공항으로 가는 길이지? 마침 나도 그쪽으로 가야 하거든.”
그 말에 미레아와 파울로는 별다른 의심 없이 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둘을 공항까지 데리고 간 라일라는 곧바로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떠나지 않고 손수 격납고에서 비공정까지 꺼내 주었다.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미레아는 괜히 라일라의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미안함에 말을 꺼냈으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야. 어차피 우리는 함께 갈 거니까.”
“우리?”
미레아의 반문에 라일라가 지프에서 자신의 짐을 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도 갈 거야.”
“뭐?”
미레아가 입을 딱 벌렸다.
“어차피 비공정을 조종할 사람도 필요할 테고 마도 기구도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하는데 그럼 내가 가야지, 뭐.”
“하지만 위험해! 비공정은 나나 파울로도 조종을 할 수 있으니까 다른 조종사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게다가 이번 임무는 전과 달리 나와 파울로만 움직이는 거고……! 애초에 정식 임무가 아니야. 협회에 허락은 받았어?”
라일라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라케드 님께 허락받았어.”
“하지만 네가 왜 우리랑 같이 가는 건데?”
비공정을 조종할 사람이 필요하단 것도, 마도 기구를 손볼 사람이 필요하단 것도, 다 핑계라는 것을 미레아는 알고 있었다. 라일라가 굳이 동행할 필요가 없었고, 그녀가 간다 해도 위험 부담만 컸기 때문에 미레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라일라는 단호한 목소리로 미레아의 말을 끊었다.
“네가 3개월 동안 홀로 나돌아 다니는 것을 보고 나도 걱정돼서 그래. 나 역시 리비엘로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 그리고 시오가 죽은 것이 헛되지 않았으면 해. 이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건 이젠 싫어! 그러니 나도 이번만큼은 이 일에 끝까지 동참하고 싶어. 동참하게 해 줘!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잖아!”
그 말에 미레아는 할 말을 잃었다. 라일라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미레아가 대답을 주저하고 있는 사이 파울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쩔 수가 없네.”
“파울로!”
“너는 라일라에게 뭐라고 할 자격은 없어. 말 안 듣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래, 난 괜찮아. 나도 데려가 줘, 미레아.”
미레아는 어쩔 수 없단 얼굴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비공정에 오르는데 익숙한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쿤둘렌이었다.
“늦으셨군요.”
“쿤둘렌이 여기 왜 있어요?”
“그야 저도 같이 갈 거니까요.”
“리비엘로 사건을 조사해야 하지 않아요?”
“네, 그럴 목적입니다. 리비엘로 군이 거꾸로 떨어진 용이라는 단서를 남겼으니 저는 그녀의 뜻대로 그것을 추적해야지요. 그러려면 여러분과 동행해야 하고요.”
쿤둘렌은 그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리프칸 대륙으로 갈 거잖아요? 보다 전문가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리프칸 대륙은 오빈족들이 사는 땅이다 보니 쿤둘렌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쿤둘렌과 라일라가 합류했다. 라케드가 뽑아 준 장소 목록 두 곳은 각각 리프칸 대륙과 일곱 별의 바다였다. 그들은 그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부터 둘러보면서 내려오기로 했다.
“처음부터 당첨이면 좋겠는데.”
파울로가 지도를 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일이 쉽게만 풀린다면 좋으련만 솔직히 앞날이 깜깜했다.
그들의 첫 번째 목적지는 리프칸 대륙의 아즈타니 지역이었다.
* * *
그 무렵, 아리스는 편지 한 통을 전달받았다. 편지를 갖고 온 사람은 율비네였다. 아리스는 일전에 자신이 보낸 편지에 미레아가 답장을 보낸 줄 알고 반색했는데, 율비네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선뜻 내주는 것을 주저하다 기다리기 지친 아리스가 무슨 연유인지 묻기 직전에서야 편지를 건네주었다.
“사실 이 편지를 전하께 드리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지 봉투는 개봉한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용물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율비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발신인은커녕 편지가 어디서 왔는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미레아라면 결코 저런 식으로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혹시 무슨 장치나 독극물이 포함되어 있을까 봐 탐지 마법을 걸어 보았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을까. 내가 봤을 때도 편지 자체는 평범해 보이고.”
그래도 내용은 확인해야 했기에 아리스는 편지 봉투를 개봉했다. 빠른 속도로 글을 읽어 나간 아리스는 편지지에서 시선을 떼고 급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가 봐야겠어.”
“가신다니요? 어디를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리스는 대답 대신 편지를 율비네에게 건넸다. 율비네 역시 편지를 읽다가 미간을 구겼다.
[너는 앞으로 서리 여신의 신탁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거다, 루데키아스. 네가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정말 이 세계의 종말을 막는 것인가? 이 세계의 끝을 보고 싶다면 나를 찾아. 나는 별에서 내린 자 일곱이 잠든 곳에 있다. -세피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