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낮게 깔리는 미레아의 목소리를 들은 라케드는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는 집중할 때 늘 끼고 있던 안경을 벗어 눈가를 비비고 다시 꼈다. 그 반응에 미레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사실인가요?”
“…….”
“사실이군요.”
“하지만 거짓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아.”
“거짓이지요.”
미레아의 단호한 말에 라케드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레아의 표정은 덤덤했으나 그 속은 말이 아닐 것이다.
“미레아 제인스터. 너는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싫어해.”
“알고 있어요.”
“그런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똑똑하고, 자기 앞가림도 잘하고, 손이 덜 가는 유형이지.”
그게 라케드다워서 미레아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이유 없이 신경 쓰이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놈의 행실이 어떻든 말이야. 호감이란 그런 것이야.”
라케드는 사과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누군가는 웃는 모습이 예뻐서, 누군가는 체향이 향긋해서, 또 누군가는 관심사가 겹쳐서…… 비호감이었던 마음이 호감으로 발전하는 것 역시 흔한 경우지. 사람이 사람에게 빠지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리스가 네게 갖는 호감은 서리 여신의 특이점을 빼고 이야기한다 해도 그렇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야. 호감의 한 형태라 생각하면 되지 않겠나.”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있어도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 없으면 아리스는 제게는 별다른 감정을 품지도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미레아의 단언에 라케드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미레아는 제법 인기가 좋았다. 밝고, 명량하고, 구김 없고, 씩씩하고……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라케드 또한 미레아의 그런 점을 높게 샀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상은 큰 하자가 없는 한 인기가 좋기 마련이었다.
설령 아리스가 별다른 감정이 없는 상태였다 해도 미레아는 그에게 큰 의미를 남겼을 것이었다. 그게 성애적인 연애 감정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그것만큼은 라케드가 확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렇게 자신 없어 하는 태도라니, 미레아답지 않았다. 라케드는 남을 위로하거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역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미레아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짧지만 둘이 함께한 시간이 있지 않은가.”
“뭐, 그동안 나쁘지 않게 지냈던 것도 제겐 특이점이 있었으니까요.”
미레아는 마치 자신에게 특이점이 없었더라면 아리스가 그 모든 것을 함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태도였다.
매사 당당하던 미레아에게 무엇이 그렇게 그녀의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가에 대한 대답은 알고 있었다.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에 사소한 것 하나까지 여러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 사람이었고, 또 소중한 만큼 조심스럽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지나치면 사람은 관계가 깨지는 것에 겁을 먹기 마련이었다. 미레아는 아리스가 자신에게 가진 감정이 전부 사라졌을 때 자신이 받을 충격에 대한 자기방어로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해 못 하는 것은 또 아닌지라 라케드는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미레아가 먼저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저……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제가 특이점이 된 건 케이드 제인스터의 딸이기 때문인가요?”
“뭐, 네가 특이점을 갖게 된 것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네 말대로 케이드의 딸이라는 요소가 신경 쓰이긴 하지. 아마 그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케이드는 가장 서리 여신과 연관성이 큰 존재 중 하나였고, 그런 배경을 고려한다면 네 운명과 아리스의 운명은 타인보다 얽히기 더 쉬웠을 테니까.”
라케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케이드의 딸이기 때문에 세피로스가 거두었고, 케이드와 세피로스의 영향을 받아 라슈발렌으로 들어왔고, 세피로스는 너를 굳이 클라인 임무에 투입했지. 이것들은 처음부터 케이드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거다. 네가 특이점으로 태어난 다른 존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커진 것은 그런 연유이지 않을까 싶다.”
그 말을 들은 미레아는 어쩐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일전에 만났던 같은 서리 여신의 조각이었던 글로리아와 미레아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그 점이었다.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던 아리스에게 호감을 보이던 그녀였지만 아리스는 글로리아와 깊게 엮이질 못했다.
하지만 미레아는 달랐다. 몰락 귀족의 고명딸이던 글로리아보다 아리스를 더 가깝게 접할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글로리아와 아리스의 첫 번째 만남이 그것으로 끝맺지 않았다면…….
가령 아리스가 글로리아를 구해 주면서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거나 이름이라도 물었더라면 그 둘 사이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 깊은 관계가 되었지 않았을까. 그런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미레아는 자신의 상황이 꼭 편법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하지만 라케드는 그런 미레아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단 얼굴이었다.
“그를 좋아하지 않나.”
“네, 사랑해요.”
미레아의 입에서 미적지근한 중의적인 단어 대신 직관적이고 정확한 표현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더 아리스의 옆에 있을 수 없었어요. 아리스를 기만하는 것 같았거든요.”
라케드가 그녀를 이해시키려 해도 미레아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점점 식어 가는 차를 말없이 바라보던 라케드에게 미레아가 다시 물었다.
“일전에 용들의 성지에서 제게 서리 여신의 특이점은 쓰임을 다했지만 쓰임이 다 한대로 쓸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말의 의미는 정확하게 뭔가요? 아리스가 제게 품은 마음으로 이미 제 쓰임은 다했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라케드는 미레아를 빤히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 쉬었다.
“너와 아리스 사이의 관계란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니까. 너는 아리스가 네게 마음을 품었다는 것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냐는 말이다.”
“네, 잘 모르겠어요.”
“멍청한 것.”
미레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자 라케드가 또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일어나. 네 행동이 아리스에게 미칠 파급력은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일 것이다. 너는 여신의 조각으로 쓰임은 다했지만, 그 뒤에 남아 있는 것들은 온전히 너와 아리스의 것이야.”
그러나 라케드의 말에도 미레아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작이 그런 이상 그 뒤에 남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요. 오히려 지금까지 함께 겪은 그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녀답지 않게 주눅이 든 모습을 보니 라케드마저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좋아, 그렇다 쳐. 하지만 네 논리대로라면 네가 이 라슈온을 사랑하는 것조차 서리 여신에 의해 만들어진 감정 아니겠나? 그것도 거짓인가?”
라케드의 말에 미레아는 잠시 주춤했다.
“그뿐만이 아니고, 알툰이 이 세계의 원신인 보비네의 기억을 보여 줌으로써 너는 이 세계의 이방인이라는 신분과는 다르게 원신인 그들에게 깊게 공감할 수 있었지. 이 땅을 버리고 언제든지 훌쩍 떠날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는 우리 용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너는 이 라슈온을 절대 버릴 일이 없을 거야. 그렇지? 그 역시 알툰이 의도한 것이었어.”
미레아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그건…… 그건 다르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니라 해도 이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리고 그건 이 세계를 위해서라면,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감정이니까요. 이 세계를 사랑하는 것까지는 아니라 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애착 정도는 갖고 있을 거예요. 그야, 삶의 터전이잖아요. 비단 저뿐만이 아니고 누구라 해도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살아가는 게 힘들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 세계를 사랑하는 이 마음은 굳이 서리 여신이 아니라 해도…… 언젠가는 제게 생겼을 수도 있지요. 그렇지 않나요?”
라케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레아의 생각을 바로 바꾸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어 보였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라케드의 성격상 어르고 달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아 그는 그녀를 설득하는 것을 반쯤 포기하고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그것 말고 라우노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은 것은 없나?”
미레아는 짧게 회상하고는 말했다.
“제가 가진 서리 여신의 특이점을 내놓으라 그랬어요.”
“서리 여신의 특이점을?”
“애초에 그게 저에게서 분리가 가능한 건가요?”
“가능했다면 라우노가 네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네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분리했을 테지. 아니, 어쩌면 그 당시에 분리하면 라우노에게 있어서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던가.”
라케드는 손등 위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상관없을 수도 있지. 특이점…… 특이점이라…… 그건 네가 태어날 때 처음부터 너와 함께였어. 네 일부라고. 원래 너의 것이 아니라 해도 너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것을 함부로 분리했다간 아마도 높은 확률로 네가…….”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니 라케드도 확신을 갖진 못한 듯싶었지만 미레아는 그가 차마 하지 못한 그 뒷말을 이해했다.
“라우노는 제게 있는 서리 여신의 특이점으로 무엇을 할 계획인 걸까요?”
“서리 여신의 특이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개인의 특이점은 제각각의 우주와 같은 힘을 지녔지. 그런데 이 라슈온의 영소를 관장하고 있는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라면 서리 여신의 권한 중 일부를 끌어다 쓸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저는 그런 방법을 모르는걸요.”
“그게 정상이다.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특이점을 사용하는 방법도 모르고 더더욱 타인의 특이점을 사용한 용례는 지금까지 전무한데 무려 서리 여신의 특이점을 일개 인간이 사용할 수 있을 리가.”
라케드의 말에 미레아는 안도했다. 지금까지 이런 거대한 힘이 자신의 일부라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쓸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니 그럼 이 힘을 실수로 사용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