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84화 (184/257)

184화.

제20장 거꾸로 떨어진 용

미레아가 록산으로 돌아온 지 석 달이 지났다. 시간은 소리 없이 빨리 흘러가 10월 중순이 다 되었다. 땅에 떨어져 바삭바삭하게 마른 나뭇잎을 밟고 다니기 좋은 계절이었다.

그사이 바뀐 것이 있다면 ‘라슈온 지적 생명체 협정 기관’ 통칭, 라슈발렌의 부회장이던 ‘벨로아 레버텐스’가 회장직을 맡게 되었단 점이었다. 회장석을 공석으로 둘 수 없어서 라케드가 일을 추진한 결과였다.

세피로스가 행방불명이란 것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저 세피로스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그가 회장직에서 물러났고 현재 은거 중이라는 것으로 발표한 게 전부였다.

세피로스의 갑작스러운 은퇴에 당황한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반발은 없었다. 벨로아는 인간이기는 했지만 세피로스 못지않은 유능한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미레아는 복직했다. 하지만 바로 주요 임무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벨로아와 파울로의 배려였다. 석 달 동안 일은 쉬엄쉬엄하면서 아직 수습되지 않은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하기 바빴다. 가령, 세피로스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라든가 말이다.

세피로스를 찾는 일에 대해서는 라슈발렌에서 어느 정도 지원이 있었다. 미레아는 라케드가 추려 준 세피로스가 가 볼 만한 곳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라슈발렌의 지원이 있었음에도 큰 성과는 없었다. 세피로스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별다른 소득 없는 일상은 피로가 배로 누적되게 했다.

3개월 동안 아리스에 대한 소식은 외신을 통해 연일 들어왔다. 아무래도 그의 행보가 충격적 이긴 충격적이었나 보다. 하기야, 황족의 일원으로 황궁에 돌아와 황제를 내치고 그 자리에 꿰차고 앉았으면서 즉위식은 하지도 않고 오히려 황제 자리를 걷어찼으니, 사람들은 저게 웬 미친놈인가 싶을 거다.

아리스는 황제가 아닌 황위 계승 제1순위이자, 황실 계보를 잇는 유일한 후계자인 황태자의 자리를 고수했다. 대신 의원내각제의 수상이 갖는 권한을 확대했다. 덕분에 수상 역시 급격하게 바뀐 정권에 대응하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리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클라인 지역의 재정비였다. 아리스에게 짧은 시간 동안 워낙 사건·사고가 연달아 터지는 통에 후순위로 밀려나 버렸지만 클라인의 정화는 그야말로 대사건이었다.

아리스가 황궁 지하 감옥에 있던 6일 동안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던 문구는 아리스에 관한 내용은 없었고 황제와 텔라인의 합작으로 마수를 몰아내고 클라인이 정화되었단 내용이었다. 황제가 아리스를 본의 아니게 6일이나 방치한 것도 사실은 여론몰이하면서 클라인의 상황을 수습하는 쪽이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부식 지역은 클라인의 주변부를 포함하여 국토의 13%가량이나 되는 지역인 데다 곡창지대라 정말로 중요한 땅이었다.

그곳이 5년 만에 제 기능을 한단 소식에 사람들은 기뻐했고 그게 사실은 메르티어스 황제가 아닌, 루데키아스 황태자가 그런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황태자에 대한 지지율이 소폭 상승했다. 물론, 자기가 싼 똥이니 당연히 자기가 치우는 건데 뭐가 대단하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거기에 다른 속국들의 독립을 승인하겠다고 소문내질 않나, 공화정 파를 지지한다고 그러지 않나, 보수 세력이 들고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들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것에 반감이 있는 이들은 쉽사리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루데키아스는 대공자가 되기도 전이었던 시절에 이미 한번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을 몽땅 베어 버린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공포정치의 형태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아리스는 다른 정치가들이 자신에 대해 오해를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리스는 그렇게 자신의 손으로 제국의 시스템을 야금야금 해체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식민지에서 수탈하지 못하니 국고가 지금 당장은 빈곤해지겠지만 국민은 그럭저럭 먹고살 방안을 마련하고 제도를 보완하면 그만이었다.

제국은 원래 부강한 국가였고 부자는 망해도 3대나 간다는데 제국 역시 먹고살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게 쉬운 길은 아니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했고 언젠가는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그건 자신이 하면 된다고 아리스가 자진 납세한 것뿐이었다. 아리스는 제국에 대한 반감만큼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뻔뻔하고 매사 시큰둥한 그가 가장 중요한 곳에서는 다소 무른 성격은 어디 가질 않았다. 아무래도 루아드가 ‘제국’의 칭호를 버리기 전까지는 아리스가 달달 볶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소식 덕분에 미레아는 아리스가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루아드에서는 관습의 잔재로 남아 있던 것들이 세로킨에서는 이미 예전에 청산한 내용이다 보니 아리스가 하는 것들이 미레아에게는 남의 나라 일인지라 큰 감흥은 없었다. 그저 아리스가 바쁘겠거니 싶어 약간의 동정심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아리스에 대해 깊게 생각하기에는 세피로스의 흔적을 찾는 것이 더 급했다. 그가 왜 행방을 감췄는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미레아는 하나도 알지 못했다.

리비엘로의 살해범은 경찰 수사 결과로만 따지고 본다면 아직도 진전이 없었다. 다만 일전에도 쿤둘렌이 세피로스가 범인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했던 것을 미레아는 이제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서리 여신의 조각을 자신에게 비밀로 했던 세피로스이니 다른 비밀들 역시 많을 것이었다. 그래서 세피로스를 여러 가능성 중 하나로 열어 놓았다.

“아무래도…….”

어느 날 잠시 록산에 돌아와 있던 미레아에게 라케드가 찾아와 말했다. 그는 여전히 회장의 보좌로 일하고 있었다. 벨로아는 과연 난 사람은 난 사람이었다. 라케드가 용의 장로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이렇게 태연하게 그를 부릴 수 있는 인간은 이 세계에 몇 없을 것이었다.

라케드는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앉아서는 미레아가 타 준 달콤한 사과 차를 티스푼으로 휘젓다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세피로스를 찾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겠다.”

라케드의 단언에 미레아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찾을 만큼 찾았어.”

미레아가 무어라 말을 더 하기도 전에 라케드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서류철을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추린 두 곳이다. 먼저 갈 곳을 정해.”

미레아는 라케드가 준 것을 넘겨 보다 종이 한 장을 빼 들었다. 그곳에는 지명과 그에 대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미레아가 자신이 고른 종이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까닥거리자 라케드가 그것을 확인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 둘 중 하나에 없으면 세피로스를 찾기 위한 임무는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미레아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언성을 높이려다 라케드의 앞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진정했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세피로스를 본격적으로 찾아 나서기 시작한 지 아직 3개월밖에 되지 않았어요. 세피로스는 고작 석 달 만에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허술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래, 네 말이 맞아. 세피로스는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지. 그래서 너와 내가 우선으로 수색을 한 곳에도 없다면 그가 어디로 갔을지 따라잡는 건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불가능에 가까워. 그런 기약도 없는 일에 라슈발렌은 이 이상 너를 지원해 줄 수는 없다, 미레아 제인스터. 그럴 만한 시간도, 자원도 없어.”

“그래도!”

“물론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아니야. 수색은 계속할 거다. 다만 너는 빠져.”

“어째서요?”

“너…… 5년 전이랑 눈빛이 똑같아.”

그 말에 미레아는 흠칫거렸다. 라케드는 신랄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아무것도 안 보이지? 주변을 돌아볼 생각조차 안 하고 있잖아. 아니, 주변은커녕 너 자신조차 돌보고 있지 않지.”

5년 전의 미레아가 식구들을 잃고 루데키아스에게 집착했듯, 지금의 미레아는 세피로스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자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세피로스를 찾아 나서는 것을 이렇게 끝낸다면 자신은 어떡하란 말인가. 미레아는 어느 것 하나 마무리 짓지 못하는 상태로 그를 떠나보내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라케드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미레아는 좀 더 스스로를 돌볼 필요가 있었고 현재 그녀의 상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니 이렇게 홀로 밖으로만 나돌아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라케드는 미레아가 어느 정도 이해는 했어도 초조한 기색으로 그를 힐끔거리는 것을 보며 사과 차를 깨끗하게 비우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건 사족일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세피로스는 말이지, 페이릭과 서리 여신의 뜻에 반하는 일이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할 작정일 거다. 그는 이제 누군가의 말을 듣고 따르지 않을 거야.”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요. 하지만 라우노가 서리 여신을 죽이는 일은 반대했잖아요.”

“그래. 세피로스 역시 라우노를 막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소리지. 그렇다면 세피로스는 지금쯤 라우노를 상대할 힘을 모으고 있을 수도 있다.”

라우노의 이름이 언급되자 라케드의 빈 잔에 차를 새로 채워 주던 미레아의 손이 멈칫거렸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서리 여신의 조각이 뜻하는 것에 대해서 들었어요.”

라우노에게 들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도 라케드라면 원래 알고 있었을 내용일 터였다. 다만 미레아가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니 관련된 정보를 공개하는데 여러모로 제약을 걸어 두어 원활한 소통을 하는 게 힘들었었다.

원래대로라면 미레아는 그냥 자신이 겪은 일을 이실직고하고 사실 여부에 관한 확인을 받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겁이 나 이 질문을 3개월이나 미뤄 두었다.

미레아의 발언을 들은 라케드의 눈이 커졌다.

“누구에게?”

그것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미레아는 굳은 표정으로 실토했다.

“라우노에게요. 체로타에서 저에게 접근해 왔어요.”

라케드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는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왜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책망 어린 시선으로 미레아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때가 되었다는 태도로 물었다.

“정확히 무슨 말을 들었지?”

“제가…… 여신의 의도대로 설계되었단 것?”

“그리고?”

미레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리스가 제게 품은 마음은 모두…… 거짓이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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