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83화 (183/257)

183화.

미레아는 눈을 뜨자마자 어제 내키지 않아 아침으로 미뤄 두었던 짐 정리를 시작했다. 짐이라고 할 만한 건 많지 않았다. 간편한 옷가지 몇 벌에 군장이 전부였다.

아리스는 육로로 델루카까지 이동할 예정이었고 미레아와 파울로는 류견우가 류가의 비공정으로 록산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가방을 싸매고 나오니 밖은 이동할 인원들을 선별하느라 분주했다. 아리스의 몸만 가면 되는 일이 아니다 보니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황제는 일단 황궁 지하 감옥에 가두기로 했다. 비록 파울로에게 한 번 털리기는 했으나 그곳은 루아드에서 가장 보안이 철통같은 곳 중 하나였다. 아리스의 눈이 닿는 곳에서 감시하기에는 그보다 더 좋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후에 재판을 열 예정이었다.

죄목은 국정 농단으로 인한 부정 청탁과 반인륜적인 실험을 묵인한 행위 말고도 조금만 파고드니 그 밖에도 어마어마한 죄목들이 쏟아져 나왔다. 밝혀지지 않은 것은 더 많을 것이었다.

황제를 재판에 세우는 것은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아리스가 ‘류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의 이름으로 나서서 행하는 것들은 여러모로 제국민들에게는 충격적인 행보였다. 저 멀리서는 어제부터 냄새를 맡고 달려온 취재진이 연신 셔터를 터트리고 있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진이 혀를 끌끌 차며 비공정에 미레아의 짐을 싣는 것을 도와주었다. 둘이 지나는 길목마다 셔터가 펑펑 터지는 바람에 눈이 부셔 얼굴을 손으로 가려야만 했다.

“아, 정말! 왜 저렇게 사진을 찍어 대는 거야?!”

“아리스 얼굴 하나 건지면 남는 장사니까요. 아리스가 언론에 공개되는 건 5년 만이잖아요. 거기에 대공비까지 있으니 신문 1면을 장식할 만한 사진을 찍기엔 딱 좋지요.”

미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이 말한 이유로 기자들의 극성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으나 이런 상황이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미레아는 라슈발렌 특수 기동대 소속이라는 신분이 있었다. 은밀한 작전에 많이 참여하는 만큼 외부 노출을 최대한 자제해야 하므로 아리스의 옆에 조그맣게라도 얼굴이 찍히면 난처했다. 미레아는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선글라스를 꼈다.

비공정에 짐을 올린 미레아가 손을 탁탁 털며 다른 짐을 가져오기 위해 다시 몸을 돌렸을 때 누가 그녀를 잡아끌어 좁은 건물 틈 벽에 밀쳤다. 미레아는 무의식적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상대방에게 관절기를 걸었지만, 상대는 너무 쉽게 빠져나갔다.

미레아에게 기습을 해서 성공하는 사람도 적었고 그녀의 공격을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도 몇 없었다. 그래서 미레아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도 상대방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미레아는 어두운 것을 확인하고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어젖혔다.

“뭐 하는 거야?”

당황한 미레아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지려 하자 깜짝 놀란 아리스가 얼른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봐. 지금 나랑 나가면 내 얼굴 옆에 네 얼굴까지 동네방네 나붙어 돌아다니기 딱 좋으니까.”

아리스의 설명에 미레아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리스가 손을 풀어주었다. 그는 멀끔하게 제법 격식을 차린 옷에 매번 대충 땋아 내리던 머리는 정갈하게 빗어 하나로 질끈 묶은 차림이었다. 그것은 그의 준수한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언제 어느 각도에서 사진이 찍혀도 제법 멋스럽게 나올 만한 상태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헤어지기 전에 제대로 인사도 못 할 것 같아서.”

“인사는…… 그냥 하면 되잖아.”

미레아가 이해 못 한 얼굴로 되묻자 아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했던 거 또 해도 돼?”

아리스가 너무 뻔뻔한 얼굴로 말했기 때문에 미레아는 그가 어떤 것을 말한 건지 한 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다 ‘어제 했던 거’가 무엇인지 상기하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팩 돌렸다.

허락할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 짧은 갈등을 겪고 있는데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아리스가 자기 마음대로 미레아의 턱을 잡아 돌리고는 허리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제처럼 긴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입술에 미레아는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좋네.”

아리스는 어쩐지 개운한 얼굴로 웃으며 그렇게 평했다. 미레아의 턱을 잡고 있던 손은 턱선을 훑으며 귓불을 살짝 건들더니 다홍빛 뺨을 살살 쓸었다.

“몸조심하고…….”

금방이라도 다시 입을 맞출 것 같은 거리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심장 안쪽을 간지럽혔다. 이 좁고 어두운 건물 틈새에 단둘이서 이런 행위를 비밀스럽게 한다는 게 더욱 기분을 이상하게 했다. 아리스는 아쉬운 표정으로 상체를 바로 했다.

“또 봐.”

“……응.”

미레아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바람에 손에 땀이 흥건히 젖어 옷 위에 손을 문질러 닦았다.

“이쪽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만나러 갈게. 그러니까 그때까지 잘 있어.”

“만나러 올 거야?”

눈을 깜박거리는 미레아에게 아리스가 뭘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정원을 보러 오라고 한 건 너잖아.”

맞다. 그런 말을 했었더랬지. 미레아는 뒤늦게 자신이 아리스에게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우리 둘의 관계에서 정원을 공유하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너는 서리 여신의 조각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도 기꺼이 와 줄까.

미레아는 알 수 없었다. 대신 기대감을 조금 덜어 놓은 상태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래,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아리스는 미레아의 표정이 어쩐지 애달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미레아를 꽉 끌어안았다. 작은 체구가 자신의 품 안에 폭 안긴 느낌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미레아는 잠시 버둥거리다 이내 포기하고 몸의 긴장을 풀었다.

“아,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일 다 때려치우고 록산에서 바다나 보며 빈둥거리고 싶거든.”

“록산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런 곳은 마음에 안 들기가 더 힘들지.”

아리스가 낮게 웃자 맞닿은 가슴을 통해 울림이 전해져 왔다. 미레아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아리스는 몸을 떨어트리며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을 거야.”

그거 착각이야. 서리 여신의 조각 때문에 그런 거래.

미레아는 속으로 신랄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상처받는 쪽은 미레아 자신이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아리스의 품이 따듯하면 따듯할수록 일종의 자학 같은 그 행위를 멈출 수 없었다.

* * *

비공정으로 록산에 미레아와 파울로, 라케드를 내려 준 류견우는 류은현과 함께 돌아갔다. 은현은 루아드의 정세가 안정되면 아리스와 합류할 생각이고 지금은 친정인 류가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메르티어스 황제라는 위험 요소가 없어졌으니 더는 숨어 있지 않아도 되었다.

헤어지기 전에 은현은 미레아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작 미레아는 자신이 한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어색해했다. 은현은 다음에 또 보자는 따듯한 말과 함께 떠났다.

멀어지는 비공정을 보며 미레아는 멍하니 서 있었다. 파울로가 부르지 않았더라면 한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기색이었다.

“괜찮냐?”

어째 오늘 비공정을 타고 오는 내내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하기에는 표정이 복잡해 보여서 파울로는 미레아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미레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상시 얼굴로 돌아와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별일 아니야. 괜찮아.”

“혹시 시간 되면 우리 집에서 저녁 안 먹을래?”

“카디 언니의 부군께서 포로 생활 하다 생환했는데 거기 눈치 없이 끼어들 수 있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슈발렌 본부 건물 정문에 눈가리개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나온 푸른 머리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파울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짐을 내던지고 자신의 아내에게 달려갔다.

“카디!”

이름을 부르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가 팩 돌아갔다.

“파울로!”

카스카디아는 파울로와 부딪히지 않도록 움직이지 않는 대신 양팔을 벌렸다. 파울로가 바람처럼 달려가 그녀를 꽉 끌어안더니 번쩍 들어 올려 한 바퀴 빙글 돌렸다. 두 사람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자신의 남편은 무슨 일이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다소 무신경하게 말한 사람치고는 파울로를 만나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 그동안 남몰래 바싹 타들어 갔을 속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와…….”

미레아가 그 광경을 흐린 눈으로 보았다.

“외롭다…… 솔로인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서로 끌어안고 떨어질 줄 모르는 잉꼬부부를 등 뒤로 한 채 그녀는 트램 정거장으로 털레털레 걸었다.

“아, 미레아! 저녁 먹고 가라니까?”

뒤늦게 파울로가 부르는 것에 대답하는 대신 미레아는 거절의 의미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흔들거리는 트램에서 꾸벅꾸벅 졸다 정거장을 놓칠 뻔한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미레아는 무사히 집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미레아는 텅 빈 자신의 집 대문을 기운 없이 밀고 들어왔다. 지금까지 경황이 없는 그녀를 대신하여 쿤둘렌의 아내인 샤르네가 정원을 잘 가꿔 준 덕분에 며칠 만에 본 정원은 여전히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미레아는 일부러 정원을 한 바퀴 돈 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층으로 털레털레 올라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흐아아…….”

미레아의 입에서 신음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옅은 상아색으로 페인트칠이 된 천장에는 유리로 된 모빌이 달려서 늦은 오후의 햇빛을 산란했다. 반짝반짝하는 빛무리가 벽에 예쁜 모양을 만들어 내었다. 빛으로 방이 가득 찬 것 같았지만 미레아는 여전히 허전함을 감출 수 없었다.

“또 혼자구나.”

이 넓은 집에 또 자신 혼자였다. 한때는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느새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괜찮아.”

생각해 보면 미레아는 5년 전부터 항상 혼자였다. 그러니 이번에도 괜찮을 것이었다.

“괜찮다고.”

미레아는 혼잣말을 곱씹듯 내뱉었다. 이 집과 도시에는 여러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슬픈 기억도 있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기억 역시 함께였다. 그것은 힘들 때마다 퍽 위안이 되어 주었다.

적어도 이 집이 있는 한 미레아는 추억 속에서 자신의 몸을 누일 곳이 하나쯤은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손에 아무것도 없는 대신 추억을 끌어안은 상태로 죽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것은 미레아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네가 만든 이 정원만큼은 내 것이야.

미레아는 엄지로 입술을 문질렀다.

그래, 이것만큼은 내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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