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82화 (182/257)

182화.

“그런데 네 어깨가 다 젖고 있는데.”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는 그제야 자신의 어깨가 그대로 우산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좀 젖으면 어때.”

그러자 미레아가 아리스의 등 뒤로 팔을 둘러 몸을 꽉 끌어안았다. 미레아가 자신을 끌어안은 것보다 자신의 체온이 올라간 건지 아니면 그녀의 몸이 차갑게 식은 상태라 그런지 아리스는 상반된 체온 차에 놀랐다.

“그럼 네가 이쪽으로 와. 비 들이쳐.”

“내가 문제가 아니고 너 여기서 더 비 맞으면 안 돼. 너 지금 입술이 파란 거 알고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둘 다 괜찮잖아.”

아리스는 어쩔 줄 몰라 하다 미레아의 옆에 바싹 붙었다. 맞닿은 부분이 따듯하다 못해 뜨거웠다. 우산으로 미레아의 머리 바로 위를 막아 주고 있던 아리스는 미레아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 찰싹 달라붙자 얼떨결에 자신의 머리 위쪽까지 우산으로 덮어 버렸다.

“이쪽으로 좀 더 붙어 봐.”

아리스는 당황스러웠다. 일부러 거리를 두고 미레아 위에만 우산을 씌워 줬던 이유는 자신까지 들어가게 된다면 미레아와 얼굴을 너무 가깝게 맞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정수리가 바로 턱밑에 있는 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더 숙여 보라니까?”

그 상태에서 미레아가 고개를 들어 자신과 눈을 마주쳐 오자 아리스는 하마터면 뒤로 물러날 뻔했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잡아 눌러 자신과 비슷한 눈높이로 아리스의 상체를 내렸다. 서로의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워지자 아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애써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덕분에 아리스 역시 비를 거의 안 맞을 수 있는 자세가 되었다. 미레아는 모처럼 눈높이가 맞은 김에 아리스가 말려 준 덕분에 깨끗해진 자신의 옷소매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이마를 문질러 닦았다. 덕분에 아리스는 여전히 태연함을 가장해야 했다.

아리스는 옹송그린 자세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레아의 손길을 받았다. 그러다 어색함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도 반대쪽 소매로 물기를 쓱쓱 닦고 있는 미레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글쎄. 그냥 알았어.”

미레아의 대답에 아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눈꼬리가 휘는 것과 동시에 표정이 푸슬푸슬 풀어졌다. 그리고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피식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거 알아? 나를 찾는 건 언제나 너인 것 같아.”

미레아가 의아한 얼굴로 아리스를 보자 그가 설명했다.

“왜, 마이련에 있을 때도 나를 가장 먼저 찾은 건 너였잖아. 그리고 술 속에 녹아 있던 마수 때문에 꾼 꿈속까지 들어와 나를 찾아내기도 했지. 황제에게 붙잡혀 있던 나를 찾아낸 것도 너였지. 뭐, 그땐 다른 사람들도 있었긴 했지만 내 눈앞에 떨어진 건 네가 가장 먼저였으니.”

그 말에 미레아도 피식 웃었다.

“그게 뭐야.”

“그냥, 네게서 도망가는 건 글렀다는 뜻으로 한 말이야.”

미레아는 순간 멈칫거렸다. 아리스는 기민한 감각으로 그녀의 얼굴에 아주 찰나 동안 스친 갈등을 읽어 냈다. 아니, 불안감인가. 어찌 되었든 복잡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눈치채지도 못 했을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리스는 그 이상 정보를 읽지 못했다. 미레아는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럼 반대는……?”

“반대?”

미레아의 그 말이 어째서 의미심장하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리스가 반문하자 미레아는 하하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냥 해 본 말이야.”

미레아는 문득 서로의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아리스를 물끄러미 보더니 입을 열었다. 충동적인 욕망이 미레아를 집어삼켰다.

“나……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사실 이건…… 그저 내 욕심이야. 그래도 허락해 줄래?”

아리스가 의아한 얼굴로 미레아를 내려다보았다.

“뭔데?”

미레아의 살짝 굳은 얼굴에는 갈등이 남아 있었지만, 몸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미레아가 아리스의 목에 양팔을 둘러 자세를 약간 숙이게 한 다음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눈을 질끈 감은 미레아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닿는 그 생경한 감촉에 아리스의 눈이 커지고 동공이 떨렸다. 빗방울이 자작나무 이파리를 시끄럽게 때리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고 들고 있던 우산이 뚝 떨어졌다.

처음에는 갑자기 무슨 일인가 하는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을 물음표가 꽉 채웠다가 해일 앞의 모래성처럼 쓸려 갔다. 깊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이건 아무래도 좋았다. 잠시 그대로 굳어 있던 아리스는 이내 천천히 미레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깊숙이 입을 맞추며 답했다.

아리스는 마침내 원했던 것의 답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리스는 줄곧 미레아와 이러고 싶었던 것이다. 기분이 붕붕 떠올랐다.

그건 미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레아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맞닿은 가슴을 통해 상대방의 심장 박동이 쿵쿵 울리며 전해져 왔다. 입술이 뜨거워서 데일 것만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고 황홀했다.

둘은 팔에 힘을 주어 상대방을 꽉 끌어안아 서로의 입술을 탐했고 온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단순히 좋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이 세계에 단둘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격렬한 키스는 아니었어도 진득하게 서로의 체온을 천천히 나누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점점 밀려오는 갈증이 더욱 심해질 뿐 가슴속에서 아릿해져 오는 기분을 달래 주지 못하였다. 충분하지 않았기에 떨어지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미레아가 잠시 뒤로 물러났을 때는 아리스가 저도 모르게 달아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붙잡아 다시 입술을 겹쳤다. 미레아는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키스를 이어 갔다. 미레아의 뒤통수를 받치고 있던 손은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귓불을 조물조물하더니 조심스럽게 얼굴을 감싸 들었다.

그것이 더없이 간질거려 아리스를 끌어안고 있던 미레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으면서도 느리게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둘 다 그 행위에 워낙 집중해 있던 탓에 시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쏟아지는 빗물이 피부 위를 미끄러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레아의 손 아래에서 아리스의 등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간신히 입술이 떨어졌을 때 미레아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반쯤은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에 대해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리스 역시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고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대신 미레아가 하하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둘 다 다시 젖어 버렸네. 우산을 잘 들고 있지 그랬어?”

아리스는 이번에는 옷을 말려 주겠다며 나서지 않았다. 지금 이 이상의 것을 한다면 내면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 무슨 일을 벌일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대신 떨어진 우산을 주워 다시 썼다.

“가자.”

아리스가 쉰 목소리로 미레아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미레아는 또 저만 비를 맞고 있는 아리스에게 찰싹 달라붙으려 했지만, 아리스가 기겁하면서 몸을 물렸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미레아가 오는 것을 막고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내 몸에 손대지 마.”

“뭐야, 화났어?”

미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자 아리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암튼 내 몸에 손대지 마. 떨어져.”

“화났네.”

“아니라니까.”

“떨어지라면서 손은 잡고 있고. 어쩌라는 거야?”

“그건……!”

아리스가 귀 끝까지 붉어져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빨리 가자. 여기서 더 이러면 감기 걸려.”

그러면서 미레아에게 우산을 떠넘기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 쪽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었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뒤를 따라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미안해.”

“왜 사과하는 거야?”

“내가…….”

네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키스했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아리스 입장에서는 분명 이상하게 들릴법한 말이었다.

“됐어. 이 일에 대한 건 아무래도 좋아.”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러자 아리스는 몸을 돌려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난 화나지도 않았고, 네가 사과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야. 다른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었어.”

그러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등을 보며 따라 걸으며 그의 등이 넓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그러자 얼굴에 다시 열이 몰려왔다. 비를 잔뜩 맞아서 추웠으나 몸의 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 *

미레아와 아리스가 일행들이 있는 주둔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두컴컴해졌을 때였다. 진이 그들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기함했다.

“너희들 그게 무슨 꼴이야!”

“좀 젖었어.”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아리스의 말에 진이 그들을 새벽 호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좀이 아니잖아. 일단 뜨거운 물로 씻어!”

진의 말대로 그들은 서둘러 씻고 나왔다. 서로 할 일들이 쌓여 있어 느긋하게 욕조에 몸을 담그지는 못했지만 차갑게 식었던 몸은 따듯해졌다. 미레아는 새벽 호의 방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는데 율비네가 들어오더니 자신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미레아가 그것을 말없이 구경하자 율비네가 먼저 설명을 했다.

“저는 내일 아리스를 따라 델루카로 갈 예정입니다.”

“그렇게 됐군요.”

“이래 봬도 저는 전하의 충직한 부관이니까요. ……전하라고 부르면 화냈었는데 이젠 전하라고 불러도 되겠지요. 아무튼, 아리스는 제가 없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율비네는 가방을 꾹꾹 눌러 내용물을 쑤셔 박았다.

“미레아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예정인가요?”

“저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손이 멈추었다.

“세피로스를 찾으려고요.”

“아…….”

세피로스와 리비엘로에 대한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들었던 율비네는 쓸데없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잘 되길 바랍니다.”

그저 응원의 말을 보내는 것이 율비네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해 주세요.”

“고마워요.”

머리를 얼추 말린 미레아는 그대로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 몸을 내던졌다.

‘당신은 루데키아스가 당신을 사랑할 수 없게끔 처음부터 서리 여신에게 만들어진 겁니다.’

라우노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의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당신들 둘의 관계에 유독 우연히 겹치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래, 우연이야. 전부 우연이야.

‘이 모든 게 지나치게 딱 맞아떨어지잖아요.’

라우노의 말대로라면 미레아의 인생은 모두 아리스를 위해 설계되었고 그저 마련된 무대 위의 배우였던 것에 불과했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것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 따듯했던 입맞춤 속에는 어떤 거짓도 없어야 했다. 아리스는 몰라도 적어도 미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내일은……. 내일이 되면 둘은 헤어질 수밖에 없다. 각자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미레아는 오늘 있었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최소한 추억 정도로 남겠지.

미레아는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가슴이 술렁거리고 머릿속은 심란해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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