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81화 (181/257)

181화.

미레아는 기운이 빠져서 상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라우노는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가슴이 불안하게 뛰고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귀에서 이명이 울리더니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라우노의 말은 미레아가 생각해도 너무나도 깔끔하게 맞아떨어졌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못 믿을 것도 없었다.

미레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라우노를 쏘아보았다. 어느덧 빗줄기가 굵어진 장대비는 순식간에 미레아의 온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차가운 빗줄기에 미레아의 몸이 덜덜 떨렸다. 라우노는 그런 그녀를 딱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상처받으셨나요?”

미레아가 비가 쏟아지는 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라우노를 보았다.

“좋아요…… 당신이 한 말이 진실이라고 치면…… 그럼, 아리스가 저를 좋아하는 마음은…… 가짜인가요?”

“글쎄요. 그것을 가짜라 말할 수 있을까. 이미 자리 잡아 싹 튼 마음만큼은 진심일 텐데.”

“하지만……!”

미레아는 말을 더 내뱉으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라우노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당신에게 달렸지요.”

“여신의 조각은 그 쓰임을 다했다는 것이 이런 뜻이었군요. 아리스는 저를 이미 사랑해 버렸으니까. 그것으로 서리 여신이 제게 주었던 역할은…… 끝이군요.”

지금까지 아리스가 자신에게 준 것은 전부 서리 여신에 의해서 설계된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나자 아리스를 기만한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어떡하지…….”

미레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어떡하면 좋지?”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주절거렸다. 라우노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리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한 질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지금처럼 살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평범한 인간이니까요.”

미레아는 자신의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쓸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가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아리스와는 이런 식으로는…….”

서리 여신이 아니었다면 아리스가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갖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서리 여신을 증오하는 그가, 서리 여신의 설계대로 움직였다고 하면…… 자신을 어떤 식으로 바라볼지 미레아는 두려웠다.

자신을 미워하게 될까? 서리 여신처럼 증오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뭐라고?”

반발감에 미레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라우노는 불쾌한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사랑이란 것은 사랑에 빠진 당사자 자신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것에 비하면 명확하지 않나요?”

미레아는 기운이 턱 빠진 얼굴로 멀거니 라우노를 바라보았다.

“이래서…… 아무도 내게 알려 주지 않은 거구나. 내가 상처받을까 봐…….”

“불쌍한 미레아 제인스터.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가 보군요.”

그 말에 미레아는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지금까지 이런 말을 나불거린 것은 라우노였는데 아무리 걱정을 담은 목소리라 해도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은 말은 참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내게 이런 것들을 알려 준 이유가 뭐야?!”

“당신이 알고 싶어 했으니까요.”

“그것만이 아니잖아!”

“그렇긴 하죠.”

라우노는 마법으로 떨어진 우산을 공중에 띄우더니 빙글빙글 돌리다 미레아의 머리 위에 씌워 주고 말했다.

“여신의 조각을 제게 넘겨 주실 생각은 없습니까?”

“뭐라고……?”

미레아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서리 여신의 조각은 그녀의 특이점 중 하나가 되었다. 애초에 어떻게 분리하는 것인지 아니, 분리할 수나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데 그것을 어떻게 준다는 말인가.

“여신의 조각으로 무엇을 할 생각인데?”

라우노는 의뭉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제가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의심하는 것보단, 생각해 보세요. 여신의 조각을 제게 넘기면 루데키아스가 당신에게 이끌렸던 호감 역시 없어지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당신이 지금 느끼는 그런 부채감은 이 이상 가질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그 말에 미레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가 단순히 서리 여신의 조각 때문에 당신을 호감을 느끼는 게 마음에 걸리는 거잖아요. 그것을 도와주겠단 소리입니다.”

라우노는 달콤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미레아는 일순간 흔들렸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 역시 싫었다. 아리스가 자신에게 가졌던 호감이 없어진다 생각하니 그것은 그것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애초에 라우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서리 여신의 조각을 당신에게 넘길 수는 없어요.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는 둘째 치고 말입니다.”

미레아는 주춤거리며 라우노에게서 물러났다. 우산 밖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다시 비를 맞게 되었다. 그 태도는 털을 잔뜩 세우는 야생동물 같았기에 라우노는 양손을 올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그렇게 나올 줄 알았습니다. 특이점이 분리되면 높은 확률로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라우노의 말에 미레아가 깜짝 놀라 대꾸했다.

“그럼 특이점을 제게서 분리하면 안 된다는 소리인데 그렇다면 당신에게 내가 협조할 리 없잖아요?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뭔가요?!”

“말하는 건 공짜니까요. 밑져야 본전인 거죠. 뭐, 지금 당장 긍정적인 대답을 들려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럴 기대를 하고 온 것도 아니고.”

“설령 시간이 지난다 해도 당신에게 내가 옳다구나 하고 협조하는 일은 죽어도 없을 테니 그렇게 아세요.”

“글쎄요.”

그 태도에 미레아는 제대로 빈정이 상했다. 하지만 라우노는 덤덤한 얼굴로 미레아에게 허공에 떠 있던 우산을 가볍게 던졌다. 미레아가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자 라우노는 하얀 날개를 펼치더니 날갯짓을 한 번 했다. 미레아가 우산을 치우자 하얀 깃털만 날리면서 그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미레아는 라우노가 사라진 자리를 멀거니 보다가 그제야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우노가 했던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라우노가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라우노라면……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이 말들이 정말 사실이라면 미레아는 아리스를 볼 낯이 없었다.

서리 여신의 조각이란 게 없으면 나는 아리스에게 어떤 존재일까. 그런 고민을 해 보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런 중요한 것을 알려 주지 않은 세피로스와 라케드에게 저도 모르게 원망이 들었다.

문득 라케드가 지나는 말처럼 상처받을 것이라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건 이런 의미였다. 리비엘로는 이것을 알고 죽었을까.

미레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었지만, 이곳에 더 있기 힘들었다. 빗물에 젖어 식어 가고 있는 몸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 먹먹한 하늘을 바라보며 빗물을 온몸으로 맞았다.

나는 시오를 잃고, 리비엘로를 잃고, 가족을 잃고, 세피로스를 잃고…… 이제는 아리스도 잃게 생겼구나.

지금까지 씩씩하게 털고 일어났던 것과는 달리, 이번만큼은 세상이 너무 가혹하다고 느꼈다.

* * *

아리스는 자신이 너무 머저리인 것 같았다.

원래 메르티어스를 잡으면 바로 목을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를 생포하고 보니…… 그는 아리스의 기억 속 메르티어스보다 훨씬 더 초라했다.

고작 이런 사람 때문에 자신이 그 고생을 한 건가 싶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을 정리할 겸 한없이 걷다가 자작나무 숲 한가운데서 쓰러진 나무를 의자 삼아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천둥과 번개가 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머지않아 빗줄기가 떨어졌다. 비를 막을만한 것은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비를 맞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해가 저물어 사방이 컴컴해지기 시작할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슬슬 돌아갈까 싶었지만 모처럼 혼자가 된 김에 이 빗소리를 더 듣다 가고 싶었다.

“찾았다!”

아리스는 익숙한 목소리를 향해 돌아보았다가 눈이 커졌다. 쏟아지는 빗방울 아래에 우산을 쓴 미레아가 숨을 고르며 서 있었다. 아리스는 미레아가 자신을 찾은 것보다 그녀가 쫄딱 젖은 것에 더 놀랐다. 우산을 쓰고 있었는데 어째서 젖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우산은 대체 뭐에 쓴 거야? 다 젖었잖아. 상처에 물 들어가면 어떡하려고?”

아리스가 미레아에게 달려오며 또 잔소리해 대었다. 미레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부루퉁하게 쏘아붙였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찾아다녔단 말이야!”

“왜?”

“그야, 네가 말도 없이 없어지니까!”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어?”

“그럴 리가.”

미레아는 우산을 아리스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젖은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이 날씨에 우산도 없이 돌아다니면 어떡해? 돌아가자.”

빗물이 미레아의 붉은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졌고 얼굴도 젖어서 엉망이었다. 아리스는 어쩐지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미레아의 태도는 평소랑 같아 보이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무슨 일 있었어?”

“응?”

미레아가 체온이 떨어지는 바람에 보라색으로 변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이내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 지금 가장 심란한 건 너겠지.”

아리스는 그것이 못마땅하였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 기색이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리스는 잘게 떨리고 있는 미레아의 어깨를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은 여름 날씨라 겉옷은 둘 다 입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체온을 데워 줄 것이 없었다. 아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너 옷 좀 벗어 봐.”

“……뭐?”

미레아가 일순간 치한이라도 만난 것 같은 얼굴을 했기 때문에 아리스가 얼른 손을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게 아니고 다 젖었잖아?! 옷 벗어서 이리 줘. 말려 줄게. 안 볼 테니까!”

“그렇다면 입은 상태로 말려 달란 말이야.”

“열을 일으켜 물을 증발시킬 생각인데 잘못하면 화상 입는다고. 그러니까 좀 벗어 봐. 이대로라면 체온 떨어지잖아.”

그러더니 미레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예 몸을 돌리고 싶었지만, 우산을 받쳐 주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고개를 최대한 옆으로 돌리고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빈손만 쓱 내밀었다. 미레아가 잠깐 주저하는 것 같더니 부스럭거리며 상의를 벗는 소리가 들렸다.

‘미치겠네.’

아리스는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괜한 오지랖인가 싶었는데 부상도 다 안 나은 애가 저러고 있으니 별다른 수가 없었다. 내민 손에 축축한 셔츠가 올라오자 아리스는 그것을 몇 번 털었다. 그러자 마법 덕분에 수분이 날아가 뽀송뽀송한 셔츠가 되었다.

“와.”

미레아가 가볍게 감탄했다.

“역시 마법은 여러모로 편리하네.”

이번엔 다시 셔츠의 단추를 끼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아리스의 어깨를 손가락을 톡톡 건드렸다.

“다 입었어. 고마워.”

미레아가 손으로 탁탁 치며 옷의 주름을 폈다. 아리스는 잠시 우산을 미레아에게 들게 하고 자신의 상의 역시 같은 절차로 말렸다. 하지만 상의만 말랐지 다른 부분은 그대로였다. 특히 부츠 안에는 빗물이 들어와 고여서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대로라면 둘 다 나란히 감기에 걸리기 딱이었다. 둘은 하나밖에 없는 우산에 서로의 몸을 구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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