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80화 (180/257)

180화.

아리스를 찾아 헤매던 미레아는 인적이 드문 자작나무 숲길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미레아는 목표물의 흔적을 찾아내 추적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아리스는 그만큼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데 능숙한 쪽이었다. 어찌나 잘 숨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아리스 덕분에 걷는 동안 지루해진 미레아는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하얀 자작나무들 사이에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팩 돌렸다가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미레아는 그를 보자마자 재빨리 몸을 물리며 거리를 벌렸다. 들고 있던 우산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굴렀다.

“라우노!”

라우노가 나무 사이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오늘 있었던 전투로 하얀 옷이 조금 더러워지기는 했으나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그게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 없었다. 마법이라도 썼는지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그는 옷자락 하나 젖지 않았다.

미레아는 습관대로 허리춤을 더듬었다가 자신이 무전기만 들고 왔지 무기를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그녀는 혀를 차며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훑었다. 어디 무기라도 될 만한 것들이 있을까 했지만, 라우노를 나뭇가지로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전으로 율비네를 불러올까 하는 생각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래 봤자 시체만 한 구 더 늘어날 뿐이었다.

그런데 라우노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려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을 전해 왔다. 미레아는 라우노를 쉽게 신용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아쉬운 건 미레아 쪽이었다. 그녀는 조금 고민하다 자신 역시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라우노를 훑었다. 그는 일전에 정체를 모르고 만났을 때와 비슷한 차림이었다. 마치 집 앞 공원이라도 산책하는 것 같은 가벼운 차림에 살기는 전혀 없었다. 그는 눈매를 곱게 접어 미레아를 보고 웃었다.

“미레아 제인스터.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미레아가 듣기에는 그 사과에 진정성 따위는 없었다. 미레아는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무슨 볼일이지요?”

“당신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말을 걸고 싶었는데 마침 당신이 일행들과 따로 떨어져 오신 덕에 이야기를 나누기 좋군요.”

라우노의 말에 미레아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게 도망가지 마세요. 무기도 없는 당신이 제게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은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였다. 미레아는 그냥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이 죽더라도 이런 상황에서라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불리한 쪽은 미레아이기 때문에 라우노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들어 줄 의사 정도는 있었다.

“좋아요…… 내게 무슨 일인데요?”

그러자 라우노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그는 땅에 떨어진 우산을 주워 들고 미레아의 바로 앞에 섰다.

“비에 젖습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라우노의 손에서 미레아가 우산을 낚아챘다.

“개수작 부리지 마.”

“정말로 걱정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마니샤의 말대로 당신은 제 조카 같은 사람이니 이 정도 오지랖은 좀 봐주세요.”

“당신을 아버지의 형제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하, 저와 케이드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이야기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요. 라케드가 알려 주던가요? 하지만 당신이 부정하고 싶다 해도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합니까.”

미레아가 받아들일 생각을 않자 라우노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미레아를 유심히 보았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톡, 톡, 빗방울이 간헐적으로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미레아에게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거슬렸다. 라우노도 빗소리도 모두.

라우노는 미레아의 얼굴을 훑어보며 고개를 그녀 쪽으로 천천히 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서리 여신의 조각에 대해 알고 싶지 않습니까? 정확하게는 당신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미레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고요……?”

“다른 것들에 대한 진실은 알려 주었어도 서리 여신의 조각이 무엇인지 당신에게 아무도 정확히 알려 주지 않았지요? 제가 알려 드릴까요?”

“정말로 무슨 개수작인지 모르겠네.”

미레아의 말에 라우노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저는 당신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해 알려 주려는 것뿐입니다.”

“선택권?”

“라케드나 세피로스를 포함해 서리 여신의 조각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이 왜 당신에게 숨겼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제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 모든 게 다 명확해질 겁니다.”

“당신이 내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요.”

“제 모든 것을 걸고 당신에게 말하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 약속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걸고도?”

“네. 물론이지요.”

하지만 미레아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라우노는 그녀의 짧은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었다.

“당신이 서리 여신의 조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당신이 알고 싶어도 라케드와 세피로스가 제대로 말해 주지는 않았지요. 당신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고 절친했던 리비엘로 람 역시 당신에게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어디서 정보가 샜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우노는 미레아의 상황을 제법 잘 파악하고 있었다.

“제가 그들을 대신해서 전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들렸다. 하지만 미레아는 그에게서 도망치지도 않았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핑계로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우산 위에서 톡톡거리던 빗소리의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당신이 가진 서리 여신의 조각…… 그러니까 특이점은 일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요.”

“하지만 어떤 식으로? 나는 그냥 평범한 인간입니다. 물론 아버지가 좀 특이하긴 하지만 나는 아니잖아요?”

미레아의 말에 라우노가 고개를 저었다.

“맞습니다. 미레아 제인스터란 사람은 어디를 보나 평범한 인간이지요. 하지만 단 한 사람에게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 한 사람?”

라우노는 바로 대답해 주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루데키아스가 태어난 날짜가 언제인 줄 알고 있나요?”

미레아는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라우노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2989년 3월 12일.”

“당신이 태어난 날은 2989년 12월 3일이지요?”

라우노는 아무래도 미레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이 자못 불쾌하여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우리 생일이 무슨 상관인데 그러지요?”

“날짜를 셈해 보면 당신은 루데키아스가 태어난 날 잉태되었습니다.”

미레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라우노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태어난 날, 잉태된 모든 아이는 서리 여신에 의해 만들어진 겁니다.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자에게 대항하기 위해.”

“뭐? 그게 무슨…….”

미레아는 순간 이전에 봤던 글로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과 같은 날 태어났던 글로리아. 아리스를 좋아하는 글로리아. 그리고 리비엘로가 여신의 조각 중 하나라 지목했던 글로리아. 그녀와 자신이 태어난 목적이 똑같다면…….

미레아의 상념에 라우노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 수많은 서리 여신의 조각 중 제 기능을 한 것은 당신밖에 없지요. 왜인지 아십니까?”

미레아가 눈을 깜박였다.

“자격을 갖춘 수많은 후보 중 루데키아스, 흑익과 많은 것을 공유한 것은 그들 중 당신이 유일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게 뜻하는 게 뭔데요? 내가 아리스에게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라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 신탁을 내린 서리 여신은 그에게 대항할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서리 여신은 데르카이드에게 직접 개입할 수 없지요. 그러니 다른 방법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루데키아스가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지 못하도록. 그러기 위해 이 세계에 애착을 갖도록. 그러한 것들을 연결해 주는 장치가 필요했습니다.”

미레아는 여전히 이해를 못 한 얼굴로 라우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친근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미레아의 귓가에 대고 은밀하게 말했다.

“그게 바로 당신이란 존재입니다, 미레아 제인스터.”

톡톡 작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던 빗줄기는 이제 제법 굵어져 툭툭거리는 소리로 변하더니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점점 퍼붓기 시작했다. 빗소리 때문에 라우노의 속삭임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빗줄기가 굵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비에 젖지 않았다. 미레아만 우산 속에서 비를 피할 뿐이었다.

“……그 말은 꼭 아리스가 나 때문에라도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처럼 들리는걸요.”

“맞습니다. 당신은 이 세계를 사랑하잖아요?”

“일단은 그렇지요. 그런데 그게 무슨 관계가…….”

“루데키아스는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속절없이 당신에게 빠져들었습니다.”

그 표현에 미레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러나 라우노에게 그러한 감정을 들킨 것은 당사자들 처지에서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루데키아스 본인도 슬슬 자각했을 겁니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속에 무언가 자리 잡아 버렸다고. 그게 어떤 식이었든 사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감정일 테고.”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그걸 그런 식으로 말하면 좀 이상한데요.”

“이상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것만큼은 확실하지요. 루데키아스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세계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이 사랑하는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마음먹을 겁니다. 뭐, 본인은 아직 그런 생각까지 미치지는 못한 것 같지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하나도 이해를 할 수 없네.”

라우노는 빙긋 웃었다.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루데키아스가 당신을 사랑할 수 없게끔 처음부터 서리 여신에게서 만들어진 겁니다. 당신이 이 세계를 사랑하는 그 마음조차 만들어진 거지요. 당신의 그러한 마음으로 하여금 이 세계의 종말을 루데키아스가 멈출 수 있게.”

그 말에 미레아의 손끝이 떨리다가 기어이 우산을 떨어트렸다. 젖은 낙엽 위에 우산이 핑그르르 돌았다.

“뭐?”

“당신이란 사람은 서리 여신에 의해 설계된 존재다, 이 말입니다.”

라우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당신의 얼굴, 당신의 성격, 당신의 몸짓,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모든 것이 흑익의 마음을 동할 수 있도록 그에게 맞춰 만들어진 서리 여신의 의도이지요. 흑익이 당신에게 빠져들도록 말입니다. 그에게 호감을 살 수 있는 조건만 있으면 나머지는 쉽습니다. 당신에게는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 있고, 흑익에게는 페이릭의 특이점이 흡수된 영소가 있으니 말입니다. 서로를 사랑하던 두 사람의 영혼이 새로 태어난 이후에도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미레아는 미치광이라도 보는 얼굴로 사납게 외쳤다.

“거짓말! 당신을 믿을 수 없어!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소리야?”

하지만 라우노는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거짓이 아닙니다. 저를 믿기 어려운 건 이해하지만 제가 이런 일로 당신에게 거짓을 고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당신의 검기와 루데키아스의 검기는 그 양상이 비슷해서 서로의 검도 바꿔 쓸 수 있을 정도지요. 왜 그럴까요? 당신들 둘의 관계에 유독 우연히 겹치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창백하게 질린 미레아에게 라우노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 모든 게 지나치게 딱 맞아떨어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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