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79화 (179/257)

179화.

뉴스의 절반 정도는 루데키아스가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완곡한 표현으로 떠드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미레아는 아리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같은 내용의 뉴스가 반복되자 조금 지루해진 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너 바쁘지 않아?”

확실히 아리스는 바빴다. 여러 일로 자신을 찾는 사람도 많았지만 생포한 황제의 처분도 결정해야 하고 델루카로 올라가 봐야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피로가 밀려왔다. 아리스는 누운 상태로 다리를 꼬고 발을 까닥거렸다.

“이 핑계로 사람들 눈을 피해서 좀 쉬고…… 생각 좀 정리하게.”

아리스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좁은 방에는 둘밖에 없었다. 밖에는 사람이 지나다니는 인기척도 없었다. 임시 거점에서 여러 일이 오가고 있는 와중에 새벽 호가 크게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미레아는 어깨가 씀벅거리는 것이 아까보다 더 심해지자 얼굴을 구겼다.

“어깨 아파. 진통제 없어?”

“아까 의식 없을 때 진통제 주사도 맞았는데 아파?”

“아파.”

미레아가 투정처럼 말하자 아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진통제 받아 올게.”

“어차피 먹는 약보다 주사가 효과가 더 빠른데 주사로 맞을래.”

미레아가 제 발로 서자 아리스는 불안한 눈으로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 같은지 미레아의 옆에서 언제든지 받을 준비 자세를 취했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던 미레아는 아리스가 다소 귀찮아져서 한마디 하려는데 맞은편에서 라케드가 오는 것이 보였다. 라케드는 미레아의 인사는 건성으로 듣고 그녀의 옆에 아리스가 서성거리는 꼴을 보고는 뒷덜미를 잡고 끌고 갔다.

“바빠 죽겠는데 어딜 갔나 했네!”

아리스는 라케드에게 끌려가는 와중에 미레아에게 잔소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주사 맞고 오면 누워 있어. 그리고 당부하는데 당분간 세렌트 쓰지 마!”

“예이, 예이.”

미레아는 자신의 주변인들은 자신이 그냥 다친 것 가지고 왜 전부 유난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 * *

라케드가 아리스를 끌고 간 곳은 메르티어스 황제를 감금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마누 싱과 녹타 제롬, 그리고 오르카가 미리 와 있었다. 그리고 류은현도 있었다.

아리스는 생포한 메르티어스 황제 앞에 섰다. 메르티어스는 핼쑥해진 얼굴로 불안함에 눈동자를 여기저기 굴리고 있었다. 아리스는 그의 얼굴을 유심하게 보았다. 아버지인 마라피네스와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 하지만 전혀 다른 눈빛.

메르티어스의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사방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거기에 자결하거나 소란을 부리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을 물린 상태였다. 일국의 황제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마누 싱은 복잡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고 녹타 제롬은 분한 얼굴이었다. 오르카는 혀를 끌끌 차며 아리스에게 느릿하게 말했다.

“듣자 하니 라슈발렌에서 당신에게 황제의 목을 주겠다고 했다던데…….”

그 말에 황제가 어깨를 크게 움찔거리며 초조한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를 무시하고 잠시 라케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라케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제야 오르카에게 대답했다.

“그랬었죠.”

“그럼, 자.”

오르카가 아리스에게 황제가 완전히 노출되도록 옆쪽으로 비스듬하게 비켜섰다.

“우리는 당신과 라슈발렌에게 신세를 진 셈이니 대공자 전하의 뜻대로 황제를 처분할까 합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읽은 아리스가 조금 놀란 얼굴로 오르카를 바라보았다.

“제가 황제를 뜻대로 죽여도 상관없다는 말씀인가요?”

“여러모로 복잡해지기는 하겠지만 상관없습니다. 감수해야지요.”

둘의 말을 듣고 있던 황제의 눈동자가 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지 입을 달싹거렸으나 재갈이 물린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발음이 잔뜩 뭉개진 신음밖에 없었다.

아리스는 허리에 차고 있던 페니드란을 빼 들었다. 스르릉거리는 스산한 소리를 내며 새하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르티어스 황제가 읍읍거리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리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리스는 검을 잡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이 광경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렸던가.

자신의 앞에 무기력하게 꿇어앉은 메르티어스 황제. 그리고 그 앞에 선 자신.

황제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검을 천천히 올리는 자신. 더없이 무기질적인 얼굴로 황제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치는 자신. 허공으로 붉게 튀는 선혈,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머리, 그리고 그 앞에서 웃음 짓는 자신. 혹은 울고 있는 자신.

반복된 상상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리스는 천천히 페니드란을 들어 올렸다. 메르티어스의 눈이 커지다 이내 체념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 보았다. 하지만 이내 아리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페니드란을 바닥에 떨궜다. 그는 한동안 메르티어스의 앞에서 씨근덕거리더니 등을 돌렸다.

“내가…… 내가 죽이면 안 돼.”

아리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혈육의 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국민의 손으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면 이런 건 의미 없어. 내가 황제를 죽이면 결국…… 혈통 싸움이 되어 버려.”

그 말에 마누 싱과 녹타 제롬은 물론 오르카까지 뜻밖이라는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처분은……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게…… 처형하는 것도, 살려 두는 것도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하지만 역시 제국법에 따라……. 아니, 뭐가 좋을지…….”

아리스는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하다 마른세수를 했다. 은현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그의 어깨를 감쌌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러니까…… 지금은 좀…….”

아리스는 두서없이 말을 내뱉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꼴불견처럼 보이는 거 아는데 메르티어스 황제는 제…….”

“네 아버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라케드가 아리스 대신 말했다. 아리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다.”

그걸로 다 이해했다는 듯 라케드는 오르카에게 황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되었으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다만 풀어 놓는 건 안 돼. 알겠나?”

“그건 저희도 원하지 않는 일이지요.”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이다 아리스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네. 라케드 님의 말대로 해 주세요.”

아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케드가 드물게 그의 상태를 물어 왔다.

“피곤해 보이는군.”

“조금…….”

“내일은 황궁으로 들어가야 하니 정신 차리고 있어라.”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페니드란을 주워 들어 검집에 넣었다.

“그럼 저는 이만…….”

아리스가 기운 없는 발걸음을 옮겨 도망치듯 방을 나가자 녹타 제롬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뭐야, 생각보다 패기가 없는 놈이네. 소문과는 다른 걸? 악독한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군.”

라케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 말대로 소문과 다른 놈이야. 그에게는 그 나름대로 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

라케드는 황제를 고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목숨은 질긴 놈이군.”

그 말에 황제가 어깨를 떨었다. 오르카가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죽지 않을 정도로 물만 주고 식사는 주지 말지요.”

그리고는 황제에게 말했다.

“배를 곯는 동안 당신이 등한시한 국민의 심정을 헤아려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 * *

아까 전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날씨가 해가 저물기 시작하니 먹구름이 끼면서 간간이 천둥과 번개까지 치기 시작했다.

“날씨가 궂네요.”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그 모습에 율비네가 걱정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율비네는 미레아가 진통제를 맞고 또 움직이려는 것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던 차였다.

“내일이면 아리스가 황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기왕이면 좋은 날씨였음 좋겠습니다만…… 내일은 괜찮겠지요?”

그 말을 나누다 보니 둘은 아리스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알기로는 아리스가 참석했던 회의는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자리가 파했다고 전해 들었다. 실제로 아리스를 제외한 오르카나 녹타 제롬은 그들의 눈앞에서 저마다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그들의 앞을 지나가던 중인 라케드를 불러 세웠다.

“아리스 못 보셨어요?”

“나는 너희들과 함께 있는 줄 알았는데?”

라케드의 말에 셋은 미간을 찡그렸다.

“아리스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지요?”

“나는 메르티어스의 처분 건으로 회의를 할 때 본 게 마지막이었다.”

“저희는 그보다 더 전에 봤으니…… 지금 아리스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네요?”

율비네가 자연스럽게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런 날씨에 어디를 간 건지…….”

미레아의 말에 맞추기라도 한 듯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온순하게 내리는 비였지만 구름 양상을 보아하니 곧 폭우라도 내릴 것 같았다.

“주둔지에 없다면 우산도 가지고 가지 않았겠지요?”

미레아가 중얼거리자 율비네가 자신의 군장에서 우비를 꺼내 입었다.

“비가 거세지기 전에 어디 있는지 찾아야겠습니다. 아까 보니까 좀 지쳐 보였는데 아무래도 걱정됩니다.”

“아, 그럼 저도…….”

“부상은 괜찮겠습니까? 의사가 분명히 큰 움직임은 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그냥 아리스를 찾으며 걷는 거잖아요?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요.”

미레아의 변명에 율비네 역시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율비네가 접이식 우산을 그녀에게 주었다. 둘은 무전기까지 챙기고 양 갈래로 갈라서 아리스를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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