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78화 (178/257)

178화.

라우노는 마법 시전이 빨랐지만, 그 못지않게 아리스도 이미 여러 술식을 흡수한 페니드란 덕분에 시동어나 준비 동작 없이도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그러니 대형 마법을 준비하는 시간적인 여유는 아리스 쪽이 더 많았다.

미레아는 거인의 발목을 베어 넘어트리고는 왼쪽 눈에 있는 마석을 검으로 베었다. 남은 거인은 대략 여섯. 라케드와 율비네의 지원을 받으면 해 볼만 했다.

“역시 그 검은 너무 성가시군요!”

― 칭찬 고맙다고 전해 줘, 아리스.

페니드란은 다소 우쭐거리는 어투였다. 라우노가 사복 검으로 페니드란을 휘감았지만 페니드란에게 자체적으로 방호벽이 발생하면서 자신의 사복 검이 금방 풀려 버리자 그가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아리스는 숨이 턱까지 올라왔다. 사복 검을 상대하는 틈틈이 라우노가 마법을 쓸 틈새를 만들지 못하게 하자니, 신경 쓸 게 하나둘이 아니었다. 미레아와 다른 둘의 지원 덕분에 거인을 상대하는 것은 벗어났으나…… 라우노를 더 신성력 결계 쪽으로 몰아붙인다면 승산이…….

드디어 라우노의 마력 고갈이 아리스보다 먼저 시작되었다. 아리스는 승기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라우노가 공간 전이를 했다. 어디로 갔는지 위치만 안다면 아리스 역시 공간 전이로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라우노가 이동한 곳은 뜻밖에도 미레아의 바로 앞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여신의 조각을 내놔.”

라우노의 사복 검이 무방비한 미레아의 몸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미레아!”

그 광경에 아리스는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미레아는 세렌트가 쳐 놓은 보호벽에 사복 검이 가로막혀 관통상은 피했으나 라우노의 마력은 세렌트의 마력을 상회했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결국, 세렌트가 미레아의 마력까지 끌어 쓰는 바람에 미레아는 쿨럭거리며 입에서 피를 토했다.

― 미레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저 사람을 정면으로 상대하기엔 내 마력이 모자라! 이대로라면 네가 죽을 것 같아서 위험 부담이 있어도 네 마력을 조금만 끌어다 쓸 수밖에 없었어.

세렌트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연신 사과를 해 대었다. 미레아는 갑작스러운 기습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을 둥글게 보호 중인 보호벽을 다시 둘둘 감싼 사복 검이 단순히 미레아를 공격하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라우노는 여신의 조각을 내놓으라 그랬다. 미레아를 ‘죽인다’가 아니고 ‘내놓으라’라고.

빼앗기면 안 된다. 미레아의 안에서 무언가가 그렇게 경고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이대로 그냥 두어서는 안 됐다. 라우노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 이걸 빼앗기면 라우노는…… 자신은…….

아리스가 라우노를 떨어트리기 위해 공간 전이를 통해 달려왔지만, 라우노가 방어막을 쳐서 그의 접근을 막았다.

“라우노, 이거 열어!”

아리스가 페니드란으로 방어막을 찔렀지만 검은 꽂힌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페니드란을 놓지 마!”

라케드가 달려와 페니드란의 검 자루를 아리스와 함께 잡고는 자신의 마력까지 흘려 넣어 주었다. 그제야 방어막이 깨지면서 페니드란이 라우노의 목을 노리고 공기를 갈랐다.

“칫, 젠장.”

라우노는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에 더 핏기가 가신 상태로 공간 전이를 하여 도주했다.

“이놈이, 또!”

아리스가 라우노를 추적하려 했지만, 미레아의 보호벽이 무너지면서 미레아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보호벽을 유지하는데 너무 많은 마력을 긁어모은 까닭이었다. 아리스는 라우노를 추격하는 대신 미레아의 몸을 받쳐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인형 군단은 거의 진압이 되었고 남은 거인은 율비네가 창으로 처치하는 중이었다. 아리스는 정신을 잃은 미레아를 끌어안고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은 우리의 승리다.”

파울로가 그렇게 선포했다. 황제를 생포했고 라우노는 후퇴하였으니 본전은 건졌다.

“죽지는 않았다.”

아직도 미레아를 끌어안고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는 아리스에게 라케드가 미레아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아리스에게는 썩 만족스러운 말이 아니었다.

“죽지 않는다고 능사는 아니잖아요? 다른 부작용 같은 건 없겠지요? 저는 페니드란이 제 마력을 끌어다 쓰는 게 일상이지만 미레아는…….”

“그냥 익숙하지 않은 마력을 너무 많이 써서 기절한 거다. 마법하고는 별다른 연이 없어 자신의 마력을 이 정도로 끌어 쓴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푹 쉬면 회복될 거야.”

“역시 세렌트로는 라우노의 마력을 상대하기 버거웠나…….”

아리스는 미레아의 어깨와 무릎 사이에 팔을 넣어 안아 올렸다. 그러다 팔 쪽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느낌에 미레아를 내려다보았다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오른쪽 어깨와 쇄골 사이 부분에서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

옷을 들춰 보니 붕대를 둘둘 감아 둔 부분에서 출혈이 있었다. 일전에 다친 부분이 완전히 회복하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팔을 써서 상처가 벌어진 것이었다. 조금 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아리스는 이번에는 정반대의 의미를 담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몸으로 잘도…….”

……잘도 자신을 구출하고 싸웠다. 아리스는 미레아가 몸을 혹사하게 만든 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입맛이 썼다.

* * *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된 후 독립군과 혁명군들이 델루카에서 황궁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혁명군들은 공화 정권으로 한 발 더 내디뎠고, 식민 국가들은 독립의 꿈이 코앞이었다. 여러 사람에게 오늘은 의미 깊은 날이었다.

누군가가 라디오 방송을 틀었다. 뉴스 특보로 황궁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황궁 인근이 어떤 모습인지 국민은 어떤 반응인지 취재를 통해 전해 들은 내용은 그야말로 혼동이었다.

그도 그럴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황제가 붙잡히고 황궁이 점령당하는 시나리오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주모자가 이미 한번 피의 숙청을 저질렀던 그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였다.

미친 대공자가 기어이 자신의 백부를 끌어내리고 직접 정권을 잡으려 한다는 내용을 퍼트리는 언론들을 보면서 아리스는 두통이 밀려올 것 같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국민들에게 미친 대공자를 끌어내자며 역풍이나 맞을 게 뻔했다.

그러니 공화정파 혁명군을 잘 이용하여야 했다. 그들을 최대한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면서 앞으로 아리스가 해야 할 일들을 밀어붙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공화정파를 지지하는 국민들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이 미레아가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꼬물거리다 눈을 떴다. 그러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가슴팍에 안겨 있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다리를 버둥거리며 상대방을 밀쳤다. 하지만 의외로 상대방은 쉽게 밀리지 않았다. 당황한 미레아는 눈을 비비고 상대방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정신이 좀 들어?”

미레아의 등을 받치고 무릎 뒤쪽으로 손을 넣어 그녀를 안아 든 아리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너 정신을 잃었었어. 세렌트에게 마력을 너무 퍼 줘서. 당분간은 세렌트 쓰지 마. 네가 마력 조절하는 법을 제대로 모른다면 또 기절할 거야.”

― 미안해, 미레아아!

세렌트가 우는 목소리로 소리를 높였기 때문에 미레아는 깜짝 놀랐다. 세렌트가 자책하며 훌쩍이는 소리를 내기에 미레아는 자신의 검을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세렌트는 눈치라도 보는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미레아의 마력을 끌어다 써야 했던 상황을 변명하며 웅얼거렸다. 그것을 들으며 미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

“새벽 호. 다른 곳에는 침상이 부족해서 새벽 호로 너를 옮기는 중이야.”

“침상이 왜 부족해?”

“아직 남아 있는 황제의 세력이 무력으로 탄압할까 봐 일반 병원에는 갈 수 없었어. 임시로 야전병원을 세웠는데 인형 군단에 당한 사람도 많아서 침상이 부족했어. 너는 상대적으로 경상이라 중상 환자들에게 밀려 버려서 네 몫의 침상이 없어. 그래서 새벽 호가 보급차 내려온 김에 그쪽은 방이 있어서 가던 중이었지.”

“좀 정신이 돌아왔으니까 내 발로 걸을래.”

미레아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아리스가 팔에 힘을 주어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너 누워 있어야 해.”

다시 아리스의 가슴팍에 푹 안기게 된 미레아가 손을 버둥거렸다.

“아니, 그래도…… 아야!”

미레아의 새된 비명에 아리스가 팔 힘을 조금 풀고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깨가 아파? 그러게 얌전히 있으라니까.”

그 말에 미레아는 일찍이 상처 입었던 어깨 쪽을 확인했다. 옷 속으로 새로 감은 붕대가 보였다. 사실 관통상을 당했던 어깨 쪽 통증은 진통제를 먹어야 할 정도로 남아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움직이는 바람에 찢어진 것도 몰랐었다.

“그 붕대는 내가 감은 거 아니고 난 안 봤다.”

아리스가 뒤늦게 변명을 하고 나섰다. 미레아는 어깨를 돌려 보려다 얼굴을 찌푸리며 그만두었다.

“그것 봐.”

“진통제 먹으면 그럭저럭 쓸 만할 거야.”

“하지만 낫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짓이지.”

그러면서 자세를 다시 잡아 미레아의 몸이 편하도록 끌어안아 주었다. 미레아는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확실히 아리스의 몸은 쿠션감이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새벽 호에서 원래 미레아가 쓰던 방에 도착하자 아리스는 그녀를 침대 위에 곱게 내려 주고 손수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그러더니 챙겨 온 라디오의 선을 전기 코드에 꽂고 주파수를 맞추었다. 밀려오는 속보를 전달하기 바쁜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아리스는 미레아의 옆의 침대에 벌렁 누웠다.

“괜찮아?”

다치고 기절한 쪽은 본인이면서 미레아는 아리스에게 조심스럽게 상태를 물었다.

“다친 덴 없어.”

“몸 말고.”

확실히 몸은 괜찮았지만, 아리스의 정신은 반쯤 나가 있었다. 분명 전날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밀려오는 사념들이 너무 많았다. 둘은 나란히 누워 대화하는 대신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속보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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