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77화 (177/257)

177화.

“자네의 인형 군단이라니?! 그것은 엄연히 내……!”

“‘저의’ 인형 군단입니다. 착각하지 마시지요. 그건 어디까지나 제가 호의로 힘을 빌려드렸던 것입니다.”

라우노가 차가운 눈으로 메르티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황제도 저도 죽일 셈인가요?”

“물론.”

아리스의 곁에 있던 미레아는 라우노에게 세렌트를 겨누었다.

“저 인형 군단인가 뭔가 하는 것들을 인간으로 돌려내!”

미레아의 진노에도 라우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저렇게 변해도 그들에게 큰 손해는 아니었을 겁니다. 어차피 다 마수의 먹이가 될 운명이었으니까요.”

그 말에 미레아는 머릿속이 새하얀 분노로 점멸되었다.

“라우노!”

이성을 반쯤 잃은 미레아가 먼저 덤벼들기 전에 아리스는 붙잡고 있던 황제를 견우에게 떠밀었다.

“이건 적당히 치워 둬요.”

라우노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허공에서 사복 검을 꺼내 들었다. 아리스가 검을 바투 잡으며 도약할 준비를 한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기둥이 대지에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자리를 잡은 거대한 기둥에선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아리스가 준비 동작 없이 날개를 펼치며 라우노에게 달려들었다.

“정말이지, 저 기둥은 성가시기 짝이 없군요.”

라우노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얼굴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전과 같이 구역감이 밀려왔지만 아무런 예상도 못 하고 있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조금 적응이 되었다. 신성력은 삿된 것들을 꺼리는 것이었지 마수 자체에 물리적인 타격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마력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면 이야기가 달랐지만, 저것은 어디까지나 약식 결계였다.

“그래도 유의미한 효과가 있는 것 같네. 람이 없는 게 안타까워.”

움직임이 굼떠진 라우노의 사복 검과 페니드란을 맞대며 아리스가 중얼거렸다. 새벽 호에 남아 있는 신성력 결계는 저것이 마지막이었다. 리비엘로가 있었다면 상황이 더욱 유리하게 돌아갔을 것이었다. 아리스는 자신이 서리 여신의 신성력을 바라는 날이 온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라우노는 결계의 범위를 벗어나기 위해 사복 검을 잠시 거두고 재빠르게 날아올랐다.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둘의 모습은 금방 점처럼 작게 보였다. 데르카이드 두 명의 공중전은 범인들이 따라갈 수준이 아니었다. 결계 범위 안에 있는 다른 일행들을 라우노로부터 보호한 후 아리스가 홀로 그를 상대하는 것이 나았다.

미레아는 지상에서 저격하기 위해 조준경을 들여다보다 혀를 차며 총을 집어 던졌다. 거리도 거리인 데다 아리스와 라우노 둘 다 고속으로 비행하고 중간중간 공간 전이를 쓰는 통에 정확한 조준을 하기 어려웠다. 오늘따라 시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라우노는 지상에 있는 인원들이 놀고 앉아 있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인원들은 아리스와 미레아를 제외하면 그에게는 전부 쓸모없는 패였다. 귀찮게 구는 것들은 하루빨리 없애 버리는 쪽이 나았다.

라우노가 여기저기 게이트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자 게이트마다 하얀 날개가 돋아난 인형들이 튀어나왔다. 이곳으로 인형 군단을 끌고 온 것이라면 라우노는 황제에게 말했던 대로 텅 빈 황궁을 지킬 생각이 없단 소리였다. 그에게는 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더 우선시 되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한 인형 군단이었다.

순수하게 마수의 영소로 구성된 라우노는 신성력 결계에 영향을 받지만, 용주였던 마석으로 이루어진 인형 군단은 신성력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라우노는 결계 범위 안의 일들은 인형 군단에 맡기고 자신은 빠르게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아리스가 아니었다. 그는 빠르게 이동하는 라우노를 뒤쫓아 날았다.

인형 군단을 처음 본 사람들은 당황한 기색들이 역력했지만, 미레아는 이미 두 번이나 상대한 적이 있었다.

“모두 왼쪽 눈의 마석을 공격하세요! 마수의 핵이 있듯 이 인형들 역시 왼쪽 눈에 마석으로 된 핵이 있습니다!”

파울로의 지시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미레아 역시 세렌트를 뽑아 들고 인형들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두려워?”

진이 미레아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며 물었다. 미레아는 뒤늦게 자신이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요.”

아직 인형 군단에 대한 공포는 남아 있었다. 이것들 때문에 원정대와 용들의 성소는 큰 타격을 입었고 시오는 죽었다. 라우노가 인형 군단이라고 부르는 이 하얀 괴물들은 한때 인간이었고, 왼쪽 눈에 이식된 마석 때문에 이러한 모습으로 변했다. 쥬드는 그 부작용으로 죽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채워진 과거의 트라우마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앞서 이것들과 싸울 때는 작전도 없었고, 지원도 없었지만, 지금은 동료들이 있었다. 대비책도 있었다. 두려울 이유는 없었다. 진의 걱정에 미레아는 몸의 떨림이 점점 수그러들었다.

“괜찮아요.”

미레아가 세렌트를 진의 도끼날에 가볍게 툭 치고는 호승심 넘치는 모습으로 달려갔다.

― 미레아, 나도 열심히 할게!

세렌트의 말에 미레아는 조금 기운을 얻었다. 이것은 미레아에게도 일종의 복수전이었다. 아드레날린이 치솟고 검을 휘두르는 동안 감정이 고양되는 느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으며 지나갔다. 미레아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냉철하게 상황을 볼 수 있었고 그 누구보다 라우노와 인형들을 증오했다.

미레아는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인형의 목을 잘라 버리며 소리를 질렀다.

“우선 하나!”

진은 자신의 도끼로 인형의 머리를 찍은 후 도끼에 내장된 폭약을 터트리며 마석과 함께 머리를 통째로 부쉈다. 마수를 상대하는 것과 비슷한 패턴이었기 때문에 진은 능수능란하게 인형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인형과 한 번 싸워 본 사람들이 다른 전투원들을 도우며 하나둘씩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인형 군단이 쓰는 마법은 상대하기 버거운 면도 있었다. 마력만큼은 넘쳐흐르는 상태고 아리스처럼 술식 따위는 없어도 마법을 부리니 말이다. 하지만 이지가 없어 라우노의 지시가 없다면 마수나 데르카이드의 마법보다는 정확도나 위력 면에서 한참 아래였다.

다만 미레아가 걱정인 것은 아리스였다. 라케드를 제한다면 라우노를 상대할 사람은 아리스밖에 없었고 실제로 라우노가 신성력 결계의 범위 밖으로 피하고자 달아나는 바람에 아리스가 그를 추격하느라고 지원 범위에서 벗어나 버렸다.

미레아는 틈틈이 무전으로 아리스를 불렀지만, 아리스는 답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아리스가 라우노와 싸우는 곳이 이 근방에서 얼마나 벗어난 것인지 먼 하늘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고통도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인형들은 사람들을 물어뜯었고 슬슬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라우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불러낸 거인들까지 게이트를 타고 넘어오고 있었다. 미레아는 혀를 쯧 찼다. 이대로라면 아무 지원도 못 받고 있는 아리스가 위험했다.

미레아는 난투 전이 벌어지는 지역을 벗어나 한적한 곳에 세워 두었던 자신의 바이크로 달려갔다. 혼자서 거인을 상대하는 것은 문제없을지 몰라도 라우노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리스가 아무리 라우노에게 필적하는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 해도 라우노는 100년 동안 수련을 거친 데르카이드인 마법사였고 아리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술식을 세우는 대신 다소 무식한 방법으로 밀어붙이던 실력이었다.

거인들의 다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질주하면서 미레아는 아리스와 라우노를 따라갔다. 그리고 파울로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저는 이대로 아리스를 지원하겠습니다!”

“미레아, 저놈이 또?!”

파울로가 부리나케 무전을 쳤다.

“누가 미레아 좀 따라가!”

어차피 말을 듣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파울로는 이제 미레아를 말릴 생각은 안 했다. 이 상황에서는 미레아를 지원하는 것이 차라리 속 편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라케드 님, 부탁드립니다!”

율비네가 달리자 라케드가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으며 용의 모습으로 현신했다. 율비네는 라케드의 뿔을 잡고 그 등에 훌쩍 올라탔다.

아리스는 자신을 모기 잡듯이 잡으려는 거인들의 손을 이리저리 피하며 라우노의 사복 검을 쳐 내었다.

“아, 정말!”

아리스가 짜증을 내며 거인의 팔을 잘라 내자 그 팔에 가려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곳에서 라우노가 튀어나왔다. 라우노가 휘두르는 사복 검을 피하려다 아리스가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아래로 라케드가 지나며 아리스를 받아 주었다.

“괜찮습니까?”

라케드 위에 올라타고 있던 율비네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인 아리스는 거인의 중심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미레아가 다리 쪽을 공격한 결과였다. 자신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발을 피해 미레아가 거인의 반대쪽 발에 반동과 관성을 이용해 바이크를 미끄러지듯 던져 버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연료통이 터지면서 불이 붙었다. 미레아는 능숙한 동작으로 데굴데굴 굴러 폭발 범위에서 떨어졌다.

― 거인은 우리에게 맡겨.

미레아의 무전이 들렸다. 아리스가 다시 라우노를 향해 검을 겨누자 라케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리스, 저 녀석에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야! 저 녀석의 부하였던 데르카이드는 핵분열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어! 라우노라면 핵융합도 가능할지 몰라!”

“그게 뭔데요?”

“핵융합은 별의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지금은 잃어버린 기술이다. 핵융합이든 핵분열이든 이 일대가 전부 괴멸될 수 있어!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아리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걸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단 소리지요? 알았어요, 그 전에 잡을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