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76화 (176/257)

176화.

황제가 이동하는 경로는 황제 측에서 먼저 사전 답사를 온 자들이 빈틈없이 점검했고, 위험 요소는 제거했다. 그 덕에 메르티어스는 마음 놓고 민간 시설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메르티어스 황제가 시찰을 나온다고 하면 혁명군들은 몸을 사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찰을 핑계로 그들을 억압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부 지원이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메르티어스는 오랜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밭과 시들거리는 농작물을 둘러보고도 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주민들의 피해 보고를 받는 중에도 메르티어스는 피곤한 기색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황궁이 공격받고 아리스가 도주했으니 밤잠을 설쳤을 것이었다.

이것저것 겹친 악재에 메르티어스는 국민을 돌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실 그런 핑계가 아니라 해도 메르티어스는 그다지 좋은 황제는 아닌지라 가장 힘없는 국민들이 겪는 이런 것들은 사소한 일로 치부해 넘겼다.

“농작물뿐만이 아니라 산에 있는 나무들도 전부 고사하게 생겼습니다.”

비통에 잠긴 농민들의 시름 역시 메르티어스에게 와닿지 않았다. 그는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다시 루데키아스를 잡을 궁리를 해야 했다.

라우노 듀랜트. 그자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멋대로 설치고 다닌 뒤를 봐주는 대신 루데키아스를 죽이고 혁명을 꾀하는 반역자들을 무력화시키는 일을 맡겼지만, 이제는 라우노의 속셈이 뭔지 의심스러웠다. 다 잡은 루데키아스는 눈앞에서 도주했고, 오히려 민심은 날로 흉흉해지기 마련이었다.

신세계의 신이 되겠다 했던가. 자신이 찬동한 이유는 별다른 게 없었다. 그와 함께 신이 된다면 그때야말로 천하에 군림할 수 있었다. 타국을 정복하는 것도 손쉬울 것이었다. 그래,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라우노에게 천하를 손에 넣을 날을 앞당기자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동하던 메르티어스는 차가 멈춰 선 것을 깨닫고 조수석에 앉은 보좌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죄송합니다, 앞에 방목한 소 떼가 지나는 바람에…….”

“그런 건 미리 치웠어야 하지 않나!”

메르티어스의 노성에 보좌관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소들은 제각각 자유롭게 길을 가로질러 걸어갔고 일부는 메르티어스가 탄 차량을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아이구우! 죄송합니다!”

목동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후다닥 달려와 소들을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메르티어스는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카시트에 몸을 기대었다.

앞선 경호 차량에 탑승했던 경호원들이 내려서 주변을 감쌌다. 그때 목동들 일부가 이쪽으로 움직이더니 소를 때리던 채찍으로 경호원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메르티어스의 차 안에 있던 경호원들은 당황했다.

“뭐야?!”

“폐하, 안에 계십시오.”

경호원들은 메르티어스를 엄호해야 했기 때문에 함부로 차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선두 차량과 뒤의 차량에 탄 경호원들이 괴한들을 상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메르티어스의 차량에는 방어 마법이 걸려 있어서 차 안에 있는 것이 제일 안전했다. 밖에서 쾅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폭약이 터지는 소리와 총성,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때, 메르티어스의 차 앞 유리로 다른 경호원이 날아와 쾅 하고 부딪쳤다. 그 덕에 차가 들썩거렸다. 메르티어스의 얼굴은 이제 파리해졌다. 정신을 잃은 경호원이 보닛 위를 뒹구는 것을 누군가가 그 앞으로 훌쩍 뛰어 올라오며 발로 걷어찼다.

그는 보란 듯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더니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남자의 긴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고 차가운 눈으로 비죽 웃고 있는 얼굴은 메르티어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얼굴이었다.

“큰아버님, 잘 지내셨습니까?”

“루데키아스!”

메르티어스의 비명에 경호원들이 창으로 몸을 빼 아리스를 향해 총을 쐈다. 하지만 아리스는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페니드란으로 차 지붕을 푸딩 자르듯 갈랐다.

“으아악!”

메르티어스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경호원들을 손쉽게 처리한 아리스는 메르티어스의 멱살을 잡고 차 밖으로 끌어내었다. 다른 경호 인력들 대부분은 아리스의 일행과 혁명군의 활약으로 전투력을 상실하고 전투 중 사망했거나 포로로 잡혔다.

목동으로 위장하고 있던 사람들은 당연하지만 미레아와 파울로를 포함한 다른 일행들이었다. 그중 하나였던 은현은 메르티어스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이네요.”

메르티어스는 은현을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당신 덕분에 저와 아리스는 지난 5년 동안 힘든 시간을 지냈답니다.”

“어머니, 이 자를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아리스가 묻자 은현이 차갑게 웃었다.

“원래 계획대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지금까지 온화한 웃음만 보여 주었던 은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미레아는 은현이 저렇게 웃는 것을 보니 아리스와 모자지간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했다.

주변의 상황을 둘러본 메르티어스는 덜덜 떨며 소리를 질렀다.

“네, 네놈! 네 이놈! 역시 그때 죽였어야 했다! 감히 이런 짓을 꾸미다니, 네가 정녕 미쳤구나!”

그런 메르티어스의 양팔을 뒤로 꺾어 묶으며 아리스가 하하 웃었다.

“미친 건 큰아버님이시고. 며칠 전과는 상황이 반대네. 참 재미있다, 그렇지요?”

하지만 메르티어스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라, 라우노! 라우노는 어디 있는 게냐!”

그것이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메르티어스는 연신 라우노를 찾아 대었다. 아리스는 메르티어스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그래, 빨리 불러내라고요. 당신의 이용 가치는 그게 다니까. 당신이 부르면 그 자식은 바로 날아올 거잖아요.”

아리스가 메르티어스를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라우노를 불러내서 그까지 일망타진하는 것. 아리스가 최대한 끌어모을 수 있는 전력이 이 정도가 최선이라면 지금이어야 했다.

라우노를 고작 데르카이드 하나라고 부를 수 없었다. 아리스 자신만 해도 홀로 1개 여단의 전력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홀로 상대하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 둔 차였다. 기왕 서로의 전력을 이용하는 처지에 이 정도는…….

아리스는 혀로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어서 그 자식을 불러!”

아리스가 메르티어스의 목에 페니드란을 들이밀며 협박했다. 그러지 않아도 메르티어스는 지금 라우노 듀랜트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라, 라우노 듀랜트! 내 곁으로 오거라!”

메르티어스는 검으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품속에 있던 총을 주섬주섬 꺼냈다. 아리스는 그것을 일부러 잠자코 보고 있었다. 메르티어스가 허공을 향해 발포하자 하늘이 찢어지며 공간이 갈라졌다. 탄환 대신 장전되어 있던 것은 라우노를 강제 소환하는 술식이었다.

“정말 도움 안 되네.”

라우노가 허공에서 불평을 토해 내며 나타났다. 여전히 새하얀 날개, 새하얀 피부, 새하얀 머리카락, 그에게서 색채를 지닌 것은 오직 피처럼 붉은 눈동자. 그는 아래의 상황을 보더니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 정말…… 루데키아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하지만 아리스는 말없이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씩 웃었다. 라우노는 그의 얼굴에 대고 미간을 구기고는 메르티어스에게 짜증을 내며 말했다.

“메르티어스 황제 폐하, 나를 이쪽으로 부른 것은 실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 무슨 말이지?”

상황 파악을 못 한 메르티어스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별말은 아니고.”

라우노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라우노와 황제가 여기 있는 사이 지금쯤 황궁은 혁명군과 독립군 동맹에 점령당했을 거란 소리입니다.”

“무어라?”

“경비 인력이 대거 빠져나가 텅 빈 황궁은 공격에 취약하지.”

그 말대로다. 메르티어스도 라우노도 없는 빈 황궁은 지금쯤이면 혁명군과 독립군들이 치고 들어갔을 것이었다. 아리스의 말에 메르티어스의 얼굴이 누렇게 떴다.

“그, 그런! 화, 황궁은 인형 군단이 지키고 있다! 반란 분자들에게 황궁을 순순히 내줄 듯싶으냐!”

“그래서 그곳에는 용들이 합류했다.”

라케드가 황제의 어깨 위에 발을 올리며 삐딱하게 웃었다. 라케드는 장로의 이름으로 몇몇 용들을 은밀하게 소집해 황궁에 침입하도록 했다. 그중에는 라슈발렌 의무실에서 발 뻗고 빈둥거리고 있던 라라미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말도 안 된다!”

“말이 됩니다, 큰아버님. 말이 되고말고요. 인형 군단은 마석으로 만들었으니 용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요. 게다가 살아 있는 용의 용주로 실험까지 했잖습니까. 분노한 용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옛 세대 용들의 용주로 만든 마석이 그렇게 쓰이는 것에 대해 진노했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적을 그렇게 많이 만들라 그랬습니까?”

그랬다. 메르티어스는 적을 너무나도 많이 만들어 버렸다. 고작 황제의 관 그 하나 때문에. 메르티어스가 적어도 아리스를 포용했다면 아리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메르티어스를 보호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족이니까. 이런 메르티어스라 해도 가족이니까. 가족이기 때문에 애초에 이런 길에 발을 들이지 않게 설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버린 것은 메르티어스 황제였다. 한때는 가장 가까웠던 자의 배신을 떠올리니 아리스는 입맛이 썼다.

“라우노! 이런 말은 없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황궁을 지키고 있었어야지!”

자신이 불러 놓고 노성에 펄펄 날뛰고 있는 메르티어스에게 라우노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한둘도 아니고 몇이나 되는 용들을 어떻게 상대합니까? 저는 고작 황궁을 지킨다고 제 인형 군단을 잃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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