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75화 (175/257)

175화.

제19장 서리 여신의 조각

메르티어스 황제가 탄 비공정은 체로타 지역을 향해 순항 중이었다. 비공정은 같은 고도와 그 아래 지역을 정찰하기는 쉬웠지만, 그보다 높은 고도에 있는 것은 추가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위쪽은 취약했다. 그래서 황실 비공정 같은 경우는 위험을 피하고자 비공정이 비행할 수 있는 최고 높이에서 비행했다.

하지만 새벽 호는 달랐다. 대형 비공정답게 다른 중소형 비공정보다 더 높은 고도로 운항할 수 있었고 그 고도는 현존하는 비공정 중 최고치에 달했다. 황실 비공정이 눈에 띄자 새벽 호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구름 속에 몸을 숨기고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황실 비공정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공중에서 접근하여 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높은 확률로 라우노가 주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되레 반격당할 수 있었으므로 기각되었다. 비공정의 인원은 황제의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함이었고 어제 비공정이 출발하기 전 먼저 육로로 이동한 지상 인원들은 체로타에서 대기 중이었다.

파울로는 하루 앞서 체로타 지역의 혁명군과 접촉했다. 라슈발렌의 인장을 내보이고 황제를 치고자 그들을 설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들었다. 사실 체로타에 주둔 중이던 공화정파 혁명군들은 아리스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도 황실 혈통이긴 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같은 뜻을 품고 있다 해도 온건파와 강경파, 급진파로 나뉘기 때문에 온건파 사람들은 이 작전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지라 만약 일이 잘못되면 아리스가 자신들에게 책임을 홀랑 뒤집어씌울 속셈인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나마 그들 중 급진파 사람들을 설득한 끝에 반란군들은 이후 일에 대해 라슈발렌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벨로아가 그것을 허락하는 것까지 일이 진행되었다. 그것이 메르티어스 황제가 체로타에 발을 들이기 고작 반나절 전의 일이었다.

혁명군의 지도자는 오르카라고 하는 중년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동맹 요청을 한 아리스를 직접 만나기 위해 먼 걸음에 나섰다. 그리고는 아리스를 아직 불신감이 섞인 눈으로 보고는 인사를 했다.

“제가 설마하니 당신과 손을 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제가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말 성사되리라곤 생각 못 했습니다.”

“말씀대로 당신은 루아드 국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니 말입니다, 루데키아스 대공자.”

아리스는 이제 사람들이 자신을 대공자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하나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오르카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오르카 씨께서 굳이 저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습니다만…….”

“우리에게 동맹을 요구한 것이 루데키아스 대공자라면 말이 다르지요. 황족 출신의 적통인 대공자가 제국주의를 반대한다면 그보다 더 명확한 명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동맹 제의를 거절하면 아쉬운 건 우리 쪽입니다.”

오르카는 제법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루아드 국민이라면 누구나 루데키아스를 꺼리기 마련이었다. 마누 싱과 녹타 제롬의 국가인 챠루와 티케는 5년 전의 참사에서 피해가 가장 적은 지역인 데다 루데키아스의 악명을 듣기는 했어도 말 그대로 다른 나라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었다.

게다가 티케와 챠루와 전쟁을 일으켜 속국으로 만든 것도 선대 황제였고, 루데키아스는 그런 선대 황제의 목을 손수 내리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동맹 제의가 왔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혁명군으로서는 루데키아스 대공자라 하면 치를 떠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장 5년 전에 직격타를 입은 사람도 많았고 집안싸움 하느라고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당사자 중 하나인데 곱게 보일 리가. 마라피네스가 유능한 대공이었다는 것은 이미 5년 전의 참사로 별개 취급받는 이야기였다.

다른 독립군들과 라슈발렌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켰다고는 하나 아리스의 제안에 본인이 직접 온 것으로도 모자라 동맹을 맺자는 제안까지 수락한 것을 보니 과연 누가 혁명군 아니랄까 봐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인사는 마냥 느긋하게 이어질 수 없었다. 메르티어스 황제가 체로타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급하게 결성된 팀이다 보니 합을 맞출 새도 없었고 겨우 작전만 세운 차였다. 함께 세웠다기는 보단 대부분은 아리스 혼자 큰 뼈대를 세웠고 자잘한 부분만 혁명군이 채운 정도였다.

하지만 다들 이 정도의 다급한 작전은 몇 번이나 겪어 본 정예부대 출신들이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작전이 없는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투입된 적도 많다 보니 여의치 않은 상황에 대해 불평불만을 쏟기보단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에 매달렸다. 임시지만 작전 본부가 세워지고 서로 보급품과 물자를 공유하였으며 얼굴을 익히기 바빴다.

아리스는 요 며칠 사이 급격하게 피곤함에 절은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눈빛만큼은 생기가 넘쳤다. 대기 지역까지 차로 이동하는 사이 진이 아리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너는 긴장되지도 않아?”

그 말에 아리스는 푸른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대답했다.

“긴장되기는 하지만 오늘 내로 귀찮은 일들이 한꺼번에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활력이 넘쳐.”

아리스는 손에 들고 있던 페니드란을 숫돌로 갈고 기름 먹인 천으로 닦으며 말을 이었다.

“황제도 죽이고 라우노도 죽이면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앞으로 없을 것이고, 세계 멸망이니 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황제 대리로 맡은 일들만 처리하고 그 뒤에 일은 공화 정권에 넘긴 다음 마이련의 시골구석에 처박혀서 조용히 여생을 사는 거지.”

페니드란의 새하얀 검신에 비친 얼굴은 그 누구보다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의 말대로 아리스의 인생 설계가 드디어 완벽한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과거와는 달랐다. 아리스에게도 미래를 꿈꿀 기회가 온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처럼 어떤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는 대신 시시콜콜한 잔걱정이나 하며 일상생활을 하는 것은 아리스가 가장 원하던 삶이었다.

“그럼 앞으로 뭐 할 거야? 네가 잊고 있나 본데,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노동이란 걸 한단다. 설마 백수 한량처럼 지내겠단 소리는 아니겠지?”

“백수 한량처럼 지낼 건데.”

진은 그리 대답하는 아리스의 뒤통수를 때려 주었다.

“아야! 아!”

“일해야지, 응? 정 할 일이 없으면 우리 아버지 일이라도 돕던가!”

진은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때까지 때릴 기세였기 때문에 아리스가 황급히 말했다.

“군졸들 훈련시키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정 할 게 없으면 농사라도 지으면 되잖아!”

그때 옆에서 풉, 킥,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율비네가 입을 틀어막고 빨개진 얼굴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아리스가 농사요? 노옹사아?”

그 명백한 비웃음에 아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난 진담이야.”

“농사는 뭐 쉬운 줄 아십니까? 차라리 다른 일을 하십시오. 젊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아직 고급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있을 나이입니다.”

“음…….”

율비네의 말을 아리스는 제법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뭘 할까…… 그래, 무얼 할까나…… 나도 마도 공학을 배울까. 적성은 그게 딱 맞는데.”

“그보다 너희…….”

운전대를 잡고 조용히 있던 견우가 헛기침하며 끼어들었다. 젊은이들의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자 그가 어른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혼은 안 하니?”

그 말에 진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나를 또 선 자리에 내보낼 생각이라면…….”

진이 불평스러운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에 견우가 선수 쳤다.

“너희도 혼기 놓치면 진처럼 된단다. 성격이 저래서 데려갈 사람이 없는데 그러면 나이로나마 승부를 봐야 하지 않겠니. 하지만 이제는 어린 나이도 아니고 저걸 누구에게 시집보낼지 이 아버지는 고민이 크다.”

그도 그럴 게 진은 25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보통 마이련에서는 여성들은 20살이 되면 결혼을 하거나 최소 약혼자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아리스도 황족이라 일찍이 약혼녀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아무도 그에게 딸을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정혼자가 생기는 일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견우의 잔소리에 아리스는 뭔가 벅차오르는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결혼하란 소리 들어 봤어요.”

결혼도 상황이 안정될 때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정된 상황이란 것은 지금까지 아리스와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그러니 그 누구도 그에게 결혼하란 소리를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나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도 될 법 싶은 여건이 되는구나.

“우와…….”

아리스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감탄사에 견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호쾌하게 웃었다.

“이 외숙이 선 자리라도 알아봐 주랴?”

하지만 아리스는 단호하게 끊어 내었다.

“아, 그건 되었습니다. 그냥 결혼하란 소리를 들은 게 새로운 거지 결혼하고 싶다는 뜻과 직결된 것은 아니니까요.”

“아니면 마음에 든 사람이라도 있는 게냐?”

“제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이번엔 진 쪽에서 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스가 바라보자 진이 그를 바라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없어? 정말?”

“시끄러워. 도착했어.”

아리스가 밖을 내다보며 대답했다. 밖에는 그들보다 먼저 도착해서 준비 중이던 혁명군 인원이 있었다. 아리스는 잘 손질된 페니드란을 검집에 넣으며 차에서 내렸다.

“이제 긴장하라고. 실패하면 다들 목이 날아가는 모반이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