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74화 (174/257)

174화.

사실 아리스는 자신을 루데키아스라고 부르는 게 부담돼서 체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오…….”

마누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운을 뗐다.

“메르티어스 황제가 없어진 후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 셈이오? 공화정을 세우기 위한 혁명군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그들이 우리의 독립을 도울 것이란 보장이 없소.”

“그래서 제가 나설 겁니다.”

아리스가 그리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황실의 적통은 저밖에 없으니 현 황제 이후 황실에서 정권을 잡자면 제가 가장 1순위입니다. 그러니 일단 정권을 제 쪽으로 넘길 것입니다.”

그게 아리스가 루데키아스의 이름으로 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황제가 되겠단 소리인가?”

“아니요!”

아리스가 펄쩍 뛰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임시 정부일 뿐, 양국의 독립을 진행하고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화 되면 깨끗하게 물러날 생각입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소?”

“제가 진작 그 자리가 탐났으면, 7년 전에 백부가 아닌 아버지를 황제로 만들어 지금쯤 황태자의 관을 쓰고 있었을 겁니다.”

마누의 말에 대답한 아리스가 작게 웃었다.

“저는 있는 듯, 없는 듯, 가늘고 길게 살고 싶습니다.”

라케드가 거기에 말을 보탰다.

“이 일은 라슈발렌에서 보장하겠습니다. 그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고 만약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면 라슈발렌에서 개입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확인을 하고 싶군요.”

녹타가 굳은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물었다.

“이 일에 대해 성공할 것이란 확신이 있습니까?”

“네. 성공합니다.”

아리스는 질문에 대해 생각이란 것을 깊게 하지도 않은 듯 즉답했다. 그 반응에 녹타는 그에 대한 믿음보다는 오히려 불안감이 들었다. 실패할 가능성을 어찌 염두에 두지 않는지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정말로 자신만만한 태도였기에 마누는 다소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고 싶군요.”

그 질문에 오히려 아리스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거야 제가 데르카이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여전히 수긍하는 분위기가 아니자 아리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저는 서리 여신의 의지에 얽힌 법칙에는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세계의 의지를 거슬러 그 운명을 제 뜻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데르카이드의 힘이 세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을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기실, 이미 한 번 증명한 적이 있었고 그 결과로 저는 흑익이란 이명을 얻었지요. 그러니 이번에도 제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게 될 겁니다.”

그런 설명을 하는 아리스에게서는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했던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이번에는 녹타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소.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저쪽 역시 라우노라는 데르카이드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오?”

“제가 들은 그자의 과거를 근거로 생각해 보자면, 라우노는 데르카이드이나, 세계의 운명을 바꿀 만한 힘이 없습니다.”

서리 여신과 최초의 용 페이릭, 데르카이드와 마수, 그리고 더 나아가 아리스와 라우노에 대한 비밀은 아리스와 그 주변 사람들밖에 모른다. 다른 이들과 손을 잡았다고는 하나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협력자들이 알고 있는 것은 라우노가 데르카이드인 것, 황제가 그의 꼭두각시인 것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아리스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었어도 이것 하나만은 확언할 수 있었다.

아리스가 봤을 때, 라우노 듀랜트는 반푼이다. 페이릭의 영소가 없는 이상 온전한 데르카이드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자는 페이릭의 영소를 불순물 취급했으나 아리스의 생각은 달랐다. 페이릭의 영소는 데르카이드에게 있어서 불순물이 아니라 데르카이드를 데르카이드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세계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란 신탁은 제게 내려졌지요. 라우노도 아니고 마수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존재는 그들이 아닌 저라는 소리잖아요? 그런 제가 전력으로 제 의지를 쥐고 흔드는 겁니다. 감히 누가 대적하겠습니까.”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 이유가 이해 못 할 것은 또 아닌지라 마누와 녹타가 서로를 바라보고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아리스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아리스와 라슈발렌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독립의 기회를 잡으려면 아리스의 허세 같은 작전에 참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몇 시간 동안 서로 작전을 세우고 의견을 나누며 병력을 개편했다. 그것은 지난한 일이었던지라 회의가 끝날 때쯤에는 아리스마저 녹초가 되어 있었다. 작전이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력 투입 시기를 조율해야 해서 2차 회의까지 가게 되었다.

다시 퀭한 얼굴이 된 아리스가 몇 분이나마 눈을 붙이려고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때마침 문 앞에서 만난 진이 재미있는 것을 본 얼굴로 말했다.

“야, 아리스. 방금 아버지에게 들었는데 너 황제 된다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제대로 전해 들은 거 맞아?! 황제가 아니고 임시! 임시 정권!”

아리스가 질겁을 하며 정정해 주자 진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가 복권 안 한다고 그랬잖아.”

“그렇지 않아도 율비네가 아쉬워하더라. 네가 복권한다 그러면 엄청 신이 났을 텐데.”

“왜 내가 복권하는 데 자기가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아리스는 까칠해진 얼굴 피부를 손으로 문지르다 진의 어깨너머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혹시…… 지금 안에 미레아 있어?”

“음? 미레아? 없어.”

“으음…….”

아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민에 잠긴 얼굴을 했다.

“왜? 할 말 있어? 대신 전해 줄까?”

진의 말에 아리스는 대답이 없다가 고개를 저었다.

“미레아가 그제부터 좀 이상하지 않아?”

“어떤 게?”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달까…….”

그 말에 진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 기분 탓이 아니고?”

“그게…… 요 며칠 사람들이랑도 잘 안 섞이고, 내가 말을 걸어도 단답식으로 대답하고…… 생각에 잠겨 있는 일도 많고.”

“너 또 무슨 잘못 했니? 전에 네가 머저리처럼 구는 바람에 미레아가 너랑 말도 안 했잖아.”

“그걸 모르겠단 말이지. 내가 잘못이라도 한 거면 무릎 꿇고 빌겠는데…….”

진은 그 자존심 강한 아리스의 입에서 무릎 꿇고 빌겠다는 표현이 나와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고 진짜로 이상하단 말이야.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럼 내가 대신 물어봐 줄까?”

진의 제안에 아리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별일 아닌데 유난 부리고 싶지 않아.”

진은 속으로 그 말을 비웃었다. 일전에 미레아가 저를 무시하니까 안절부절못하며 가벼운 불안 증상을 보인 것이 누구였더라?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면 별일은 아니겠지. 최근에 힘든 일이 많아서 혼자 있고 싶은 걸 수도 있어.”

아리스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누나가 좀 살펴봐 줘.”

다른 일에는 막 나가면서 미레아와 관련된 일에는 이다지도 조심스러운지 진은 눈꼴 셔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대화 주제를 바꿔 버렸다.

“그나저나 혁명이란 게 고작 3일 만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진의 혼잣말에 아리스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혁명이란 게 그래. 오랜 물밑 작업을 해야 할 때도 있지만 갑자기 찾아온 기회도 잡아야 하는 법이야. 나는 상대해야 할 세력들이 많아서 오래 걸렸어도 이번에는 황제만 칠 거니까. 이 정도만 해도 적당히 많아.”

“하지만 라우노를 상대하기엔…….”

“물론 부족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내가 애를 써 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다른 이들이 아리스의 잠재력을 가늠할 수 없듯 아리스 역시 라우노의 잠재력을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전에 쿤둘렌이 말했듯 자신의 마력량이 라우노에 대적할 정도라면 해 볼 만했다. 이러려고 쿤둘렌에게 마법도 배우지 않았던가.

요즘 들어 아리스는 술식을 만드는 것이 더 빨라지고 마력 소모량도 적어져서 이전보다 더 능숙하게 자신의 마력을 조정할 수 있었다. 벼락치기지만 꾸준히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그래도 잘도 그런 제안을 했네. 네 성격에…….”

진이 딱하다는 듯 말하자 아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양손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복권하기 싫어서 그렇게 피해 다녔는데 임시지만 결국 복권하게 생겼어…….”

“정말 괜찮아?”

진의 말에 아리스는 양 뺨을 가볍게 때리고 벌떡 일어났다.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긴 한데 지금은 이게 최선이니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역시 사람 인생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니까. 아, 정말 싫다. 나도 평온한 삶이란 걸 살고 싶다. 일이 잘못되면 국민들이 내 수급을 취해 황궁 앞에 효수한다 해도 할 말이 없잖아.”

아리스의 머릿속에는 벌써 최악의 시나리오가 흘러가고 있었다. 진은 그걸 보고 기가 막혔다. 보통은 권력이 있으면 불만 있는 자들의 목을 효수할 생각을 하지 자신이 효수 당한다는 생각은 안 하지 않나 싶었다. 이놈은 역시 황제의 재목은 못되었다.

“너무 어려워하지 마. 우리 쪽에서도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도와줄 테니.”

“아무리 그래도 외숙이나 외조부나 남의 나라 정치에 개입할 수 없으시잖아.”

아리스는 다시 몸을 일으키자 진이 믿음직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이번에도 도망치고 싶으면 돌아와.”

“이번에는 도망 안 쳐. 누나야말로 날 버리지나 마.”

그렇게 말하는 아리스의 등을 진이 퍽 때렸다.

“우리는 너를 버린 적이 한 번도 없어.”

생각해 보면 아리스는 항상 구석에 몰린 것 같을 때도 아군이 있었다. 이전에는 율비네가, 진을 포함한 외가만큼은 자신의 편이었다. 여기까지 기어이 따라온 율비네는 온전히 자신의 사람이었고, 외가는 혈육이란 이름으로 엮인 인연이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그래, 이번에도 혼자가 아니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모든 것에 날을 세우고 의심의 눈초리만 보냈던 날들이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함 내에 있는 시계가 저녁 8시를 알리는 종을 울렸다.

“아, 이런! 한숨 자려 그랬는데! 시간이 언제 이렇게…….”

아리스가 허겁지겁 눈을 비비며 정신을 깨웠다.

“나 회의 다녀올게.”

그러더니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혹시 미레아가 필요한 게 있거나 불편한 게 있다고 그러면 나한테 말해. 잠은 잘 자는지 밥은 제때 먹고 있는지…… 걔 며칠 전에도 정신 나가서 밥 다 거르고 있었단 말이야. 요즘 많이 힘들어 보이더라고. 나를 일부러 피하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바쁜 바람에 도통 얼굴을 마주치기 힘드니까 누나한테 맡길게.”

어절씨구, 아주 열부 나셨어. 진이 아리스를 아니꼽게 바라보았지만 아리스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리스는 진과 헤어져 통로를 돌아 나오다 율비네와 함께 걷고 있던 미레아와 마주쳤다.

“아, 안녕.”

아리스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율비네가 잠시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아리스 식사는 하셨습니까?”

“대충.”

그들이 짧은 인사를 나누는 사이 미레아가 둘을 지나쳐 걸었다.

“미레아?”

“어, 어? 아…… 아리스 안녕.”

미레아가 갑자기 정신이 깨어난 것처럼 뒤늦게 아리스에게 인사를 했다. 그 반응에 율비네와 아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미안. 요즘 내가 좀 정신이 없어.”

“너 괜찮은 거야?”

기어이 아리스의 입에서 걱정 섞인 질문이 나왔다. 확실히 미레아가 좀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당사자는 손을 내저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바빠서 그래.”

“뭐…… 그렇다면 모르겠는데 너무 무리하지는 마.”

“알았어.”

볼일이 있는 아리스는 미적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율비네는 다시 미레아와 걸으면서 하고 있던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그나저나 작전이 내일부터로군요. 황제가 체로타에 도착하는 날은 모레라 해도 실질적인 움직임은 내일부터라 긴장해야 하니 아리스도 신경 쓸 일이 많겠지요. 다른 것보다 며칠 전에 황궁에 침입한 이후 황제 주변의 경비가 삼엄해졌을 게 뻔해서 그게 좀 걱정이긴 합니다만…….”

“전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어땠어요?”

“아리스가 전부 해결해 주었습니다. 저희는 그저 그 뒤만 따르면 되었습니다. 참 쉬웠지요.”

율비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살면서 반란을 두 번이나 한 사람도 손에 꼽힐 겁니다. 인생 참…….”

그 실없는 말에 미레아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곱씹듯 중얼거렸다.

“모레…… 그렇네요. 모레구나.”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어도 모레면 한차례 세상이 바뀔 것이다. 아리스의 세상도, 미레아의 세상도.

그러면 그때는, 세피로스를 찾아 나서자.

미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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