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73화 (173/257)

173화.

그 말에 사람들의 눈이 커지자 아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라슈발렌에서는 루아드 제국의 속국에서 일어난 반란들 덕분에 상당히 골치였거든요. 우리 측에서는 속국들을 독립시키고 싶어 했지만, 명분이 없었는데…… 이참에 병력을 모으는 것도 괜찮겠지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죄를 덮어씌우면 그쪽도 나름대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아무 이유 없이 욕을 먹는다면 진짜 욕할 이유를 만들어 주라는 아리스의 철칙이 생각해 낸 결과였다.

“그들의 힘을 빌린다 해도 황궁에 다시 침투해야 할 수도 있군요.”

견우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다 아리스에게 말했다.

“한 번 침입자에게 뚫린 보안 때문에 두 번째 침투는 힘들 수도 있다. 병력이 보강된다 해도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거기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리자면 저는 황궁에 침투할 생각은 없습니다. 외숙부님 말대로 황제나 라우노나 이번에도 같은 수법에 당하리라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황제란 게 황궁에만 처박혀 있을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핑계를 만들어 끌어내야지요.”

잠자코 듣고 있던 발록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만약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 있습니까?”

“그 부분에 대한 것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없어도 해야 하니까요. 뭐, 겸사겸사 라우노의 수급까지 취하면 좋겠지만 그것까지 기대하기엔 상황이 전보다 더 어려워져서…….”

아리스가 다소 지친 기색을 보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신성력 결계는 어떻습니까.”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라우노가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 놓을 것 같습니다. 전에는 예상치 못하다가 당했으니까요.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요. 다만 지금은 우리가 가진 전력의 최대치를 생각하지 말고 최소치를 생각해야 합니다.”

파울로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했다. 류견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은 우리 측 사병도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싶지만…… 황제는 그렇다 치고 라우노를 정면으로 대적했을 때는 어째야 할지…… 그보다 황제를 황궁 밖으로 끄집어낼 방법은 있나?”

“제가 그것도 생각을 해 봤는데요…….”

독립군이나 혁명군을 이용하자는 것은 아리스가 낸 의견인 데다 황궁 사정을 제일 잘 아는 것 역시 아리스였기 때문에 그가 계속해서 계획을 보완해 갔다. 덕분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아마 제 예측이 맞는다면 이번에 가뭄으로 피해를 본 지역에 황제가 직접 시찰을 나갈 거예요. 매년 그래 왔거든요. 그중에서도 가장 피해가 큰 지역이자 공화정파 혁명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디넬 지역 혹은 체로타 지역이 유력합니다. 결정적으로 수도인 델루카와 멀지 않은 거리라 부담 없이 시찰하기 좋은 곳입니다. 피해 상황을 보고 받고 혁명군의 움직임도 견제하기 좋지요.”

“근거는?”

“제 감입니다.”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대충인지라 순식간에 사람들의 얼굴에 불신감이 어렸다. 하지만 아리스는 자신의 감을 제법 신뢰했다.

“그렇다 해도 그런 지역으로 간다면 보안 병력도 상당히 움직이거나 잔뜩 경계할 텐데 괜찮을까?”

견우의 말에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우노만 없으면 해 볼 만하다고 봐요. 시찰을 나간다면 병력을 대규모로 움직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우리 쪽은 게릴라전으로 가야 합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아리스는 제법 자신 있어 보였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 하면 문제는 시기가 언제인가…… 인데…….”

“라슈발렌의 정보망을 얕보지 마.”

반신반의하는 발록의 말에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라케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시간만 준다면 정보를 빼 오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리고 어차피 시찰은 기습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해당 지역에 미리 공지되니 그런 정보를 미리 아는 것쯤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

“그렇다면 시찰을 나섰을 때를 기회로 삼을 셈이라면 혁명군이나 타국의 독립군과 접촉할 방법은 있습니까?”

“몇 초 전에 똑같은 소리를 한 것 같은데, 라슈발렌의 정보망을 얕보지 마.”

그렇게 라슈발렌 부회장인 벨로아에게 연락이 갔다. 벨로아는 한 시간 안에 전보로 답신을 보냈다.

[5일 후, 체로타 지역으로 시찰 나갈 예정. 3일의 시간을 주면 타국의 독립군 세력을 지원해 주겠음. 합류 지점은 내일 공지. 현재 혁명군과 접촉 시도 중.]

그 간단한 답변에 일행들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고작 3일 안에 독립군 병력을 모아 오겠다는 말이 꿈처럼 느껴졌지만 벨로아는 무슨 소풍 날짜 공지하는 것만큼 간단하게 말했다. 다른 세력들의 병력을 끌어오기만 한다면 새벽 호는 세계에서 손꼽는 규모를 자랑하는 비공정이라 대규모 병력을 수용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진짜? 이렇게?”

자기가 제안을 하긴 했어도 기껏해야 지역 혁명군과 동맹을 맺어도 반쯤 성공한 것으로 생각했던 아리스는 얼떨결에 독립군 세력과 손을 잡게 되자 너무나도 쉽게 전력을 얻어 오히려 얼떨떨했다.

“아니, 그런데…… 이걸로 괜찮겠어? 어찌 되었든 아리스는 루아드 제국 출신인데 이건 제국이 망하라고 고사 지내는 수준인데.”

미레아의 걱정스러운 말에 아리스의 옆에서 진이 손을 좌우로 까닥거렸다.

“아리스는 루아드 제국에 엿 먹이는 데엔 그 누구보다 진심이니까 걱정하지 마.”

율비네가 한마디 보탰다.

“저는 아리스만 좋다면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가족도 없어서 제 주변의 누군가가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고, 기사 서임을 받긴 했어도 그마저도 아리스 때문에 하고 있었지 제국에 대한 충성심은 쥐뿔도 없었습니다.”

“그래, 맞아. 내가 이래서 복권하기 싫다 그런 거야. 속국들이 독립하겠다고 난리 피우고 황제 목은 떨어지기 일보 직전인데 내가 미쳤다고 그 자리를 꿰차겠어? 제국이 망하면 난 있는 듯 없는 듯 살 거야.”

이를 가는 아리스의 말에 미레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3일 뒤에 구체적인 말이 오갈 수 있겠구나. 그사이엔 좀 쉴 수 있으려나.”

아리스가 중얼거리며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하지만 미레아의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시오와 리비엘로가 죽고 나서 미레아는 항상 쫓기는 마음이었다. 리비엘로를 죽인 범인도 빨리 찾아야 했고, 지금은 세피로스의 행방을 하루빨리 추적해야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 * *

벨로아가 말한 3일의 준비 기간이 지나고, 새벽 호는 티케와 챠루 측의 독립 운동군에게 연락을 받았다. 은밀한 작전이었으므로 합류 지점까지 그들을 데리러 가야 했다. 새벽 호의 기동력은 덩치가 덩치이니만큼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고 눈에 띄었기 때문에 류견우가 그들의 중형 비공정으로 양국의 독립군을 수용해 왔다.

티케의 수장은 30대의 젊은 청년이었고, 챠루의 지도자는 아직 눈빛이 살아 있는 노인이었다. 티케와 챠루의 각각 병력을 모으고 류가의 사병과 텔라인의 전력까지 합하니 게릴라전을 하기에는 충분한 인원이 모였다. 사실 아리스는 독립군들을 지원한다고 이야기를 들을 때만 해도 이 정도 병력이 모일 줄은 몰랐다.

병력의 수용을 완료하자 각 수장이 한데 모여 회의에 나섰다. 주축이 되는 두 국가의 대표와 이번 작전의 중심이 되는 아리스, 그리고 파울로와 발록, 라케드, 류견우만 참가한 은밀한 회의였다.

“마누 싱입니다.”

챠루의 지도자가 통역을 거쳐서 자기소개를 했다. 그는 챠루의 왕가를 비호하는 장군 출신이었다.

“녹타 제롬입니다.”

티케는 현재 왕실이 무너지고 정부가 어수선한 상태였기 때문에 개중 세력이 가장 큰 쪽이 대표로 왔다.

“대략적인 상황은 비밀리에 전해 들었소. 그 메르티어스 황제가 꼭두각시 노릇을 한다지?”

마누가 지팡이로 땅을 쿵쿵 찍으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고작 꼭두각시에게 챠루가 흔들리다니. 자존심상 그건 용납할 수 없지.”

그 말에 녹타가 동의했다. 그때, 뒤늦게 아리스가 나타나자 그들은 경계했다. 아리스는 폐위 당했다 해도 일단 황족의 핏줄이기도 하고 소문이 흉흉하게 났으니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아리스는 정식으로 인사했다.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입니다. 폐위된 마라피네스 리겐우드 비르체 파니드라우 대공의 아들입니다.”

자신의 입으로 그 이름을 부른 적이 너무나도 오래되어 아리스는 그 발음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마누 싱과 녹타 제롬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갑습니다, 파니드라우 대공자.”

녹타의 인사에 아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저에게 붙은 수식어는 다 빼지요. 어차피 저를 그 이름으로 부를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뭐라 불러 주길 바라오?”

아리스는 잠시 생각하나 대답했다.

“아, 그러게요. 이젠 클라인셔드란 성을 쓰는 것도 웃기고…… 아리스라고 부르는 건 너무 친근한가?”

“류현천은?”

견우의 말에 아리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쪽에서 만들어 준 신분이 마음에 안 드니?”

아리스가 난처하게 웃었다. 실제로 그 이름은 마이련에서 몇 번 써먹었던 이름이었다. 류가에서 만들어 준 신분은 공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유용했었다. 다만 외형적인 부분에서 혼혈인 것이 티가 나는 와중에 류현천이란 이름은 되레 마이련 사람들의 호기심만 더 키울 뿐이었다. 마이련 사람들 시선에서는 마이련식 이름을 쓰는 외국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아리스 클라인셔드란 신분으로 지냈던 것이었다.

“이 땅에서는 그 이름도 튀어요.”

아리스는 조금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 어차피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은 제가 저 이름으로 행해야 하는 일들이니 루데키아스라 불러도 괜찮겠죠. 하지만 실제로 외부에서는 루데키아스라고 부르시면 큰일 납니다. 이 자리 밖에서는 아리스라고 부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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