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72화 (172/257)

172화.

“뭐어?! 왜?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를 이렇게 한데 모은 게 세피로스 아니야?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가 배신했다고? 말도 안 돼.”

미레아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였다. 라우노를 막기 위한 인원을 모았으면서 인제 와서 배신이라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미레아가 라케드에게 매달려 말했다.

“진의 말이 맞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세피로스가 아니라고 해 줘요! 세피로스가 그럴 리 없어요!”

“세피로스라면 하고도 남아.”

미레아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지만, 라케드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한숨을 토해 냈다.

“솔직하게 말하지.”

그의 말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나는 세피로스가 무슨 일을 해도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라우노를 막고, 이 세계를 유지 시키는 쪽으로 움직일 테니 이 세계의 존망만 걸고 말하자면 마냥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 말에 미레아의 얼굴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라우노를 막는다면 그들과 목적이 똑같았다. 그런데 배신할 이유가 뭐가 있냐는 말이다. 하지만 라케드는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런데 너희에게는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지요?”

류견우가 묻자 라케드는 심란한 얼굴로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세피로스가 리비엘로를 죽인 것을 보면 모르겠어? 리비엘로가 무언가를 읽었어.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리려 했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자신이 세피로스에게 죽을 것도 알았겠지. 우리가 움직일 수 없게 묶어 두는 것을 보면 그의 정확한 목적에 있어서 너희는 방해꾼이야.”

라케드가 말한 그 정확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들 미레아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모르겠군.”

“서리 여신과 페이릭에 관한 이야기 말인가요?”

그것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전해 들었으니 대화를 나누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라케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세피로스가 갈 만한 곳을 추론할 수 있을지도 몰라.”

“어디인데요?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죠?”

“세피로스는 지금까지 유독 서리 여신과 페이릭에게 집착했어. 그 둘과 관련된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았지.”

실제로 세피로스는 설과 페이릭을 잃자 삶의 의지를 잃고 깊은 동면에 빠졌었다. 페이릭의 영소를 뜯어낸 니콜라우스를 부정했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페이릭의 영소를 가진 케이드를 살뜰히 보살폈다.

“그렇다면 이번에 움직인 것이 그 둘과 관련이 있다면?”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아리스의 말에 라케드가 설명해 주었다.

“사실 세피로스는 이 세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

“왜요? 페이릭과 서리 여신이 지켜 낸 세상이잖아요.”

“바로 그거야. 이 세상은 그 둘의 희생으로 세워진 세상이지. 페이릭은 죽고 서리 여신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신이 되어 이 세계에 매였지. 세피로스는 그 사실을 탐탁지 않아 했어. 그래도 그 둘의 유지를 이어야 하니 둘이 그렇게 된 이후에도 이 세계를 안정화하는 일에 동참하기야 했지만…….”

라케드는 한쪽 손으로 턱을 받히고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피로스의 목적은 희미하게나마 알겠는데 무슨 계획을 꾸미는 건지는 모르겠어.”

라케드가 모르면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럼 목적은 뭔가요?”

파울로의 질문에 라케드는 대답하기를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아마도 라우노를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서리 여신의 해방을 원하는 건지도…….”

“서리 여신의 해방이요?”

아리스가 듣기에는 서리 여신을 죽인다는 말만큼이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말했듯 이 세계는 서리 여신의 희생하에 평화를 이루고 있으니까. 그게 마음에 들지 않겠지.”

“하지만 서리 여신은 스스로 원해서 그 자리에 오른 것이에요.”

미레아의 말에 라케드가 고개를 저었다.

“당시에는 차선책이란 게 없었으니까. 원했다고는 하나 그보다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방법이야.”

일행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라케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긍정적인 점이 있다면 세피로스가 미레아 너는 손대지 않을 거야.”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저와 세피로스는……!”

미레아는 라케드에게 희망적인 표현이 나오길 기대했다. 세피로스는 자신의 대부였고, 항상 따듯하게 대해 주었다. 미레아 자신 만큼은 파울로보다 세피로스와 특별한 관계라 확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케드는 냉정하게 말했다.

“너는 케이드의 딸이니까. 세피로스가 케이드에게 집착한 이유가 그에게서 페이릭의 모습을 찾았기 때문이라면, 그의 딸인 너에게도 그의 모습을 투영하겠지. 세피로스는…… 페이릭의 일에 집착하니까.”

그 말에 미레아의 표정이 무너졌다. 결국, 자신은 케이드의, 페이릭의 대체품에 지나지 않는단 소리에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피로스는 미레아가 바다에 몸을 던지려 할 때 그랬었다. 5년 전, 마수 때문에 가족들을 잃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냥 죽어 버리자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세피로스는 그녀의 곁에 있었다.

너마저 잃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 처절하게 살아 보라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레아는 이제야 그 뜻을 온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세피로스에게는 그저 페이릭의 환영을 좇을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페이릭과 설을 잃고 혼자가 된 세피로스에게 미레아가 있다면 그는 혼자가 아닐 테니 말이다.

어느 날 록산의 집에 무작정 쳐들어와 자신의 집을 구할 때까지 그대로 눌러앉았던 세피로스. 어린애와 어설프게나마 놀아 주던 세피로스. 부모님과 휴레오가 죽었을 때 눈물을 흘리던 세피로스. 라슈발렌에 들어온 자신을 이끌어 주던 세피로스. 미레아의 일이라면 항상 무르던 세피로스. 그것이 미레아라는 개인의 온전한 것이 아닌 페이릭의 파생물이기 때문에 잘해 주었던 것이라면…….

미레아는 이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세피로스와의 추억을 다른 이유로 덮어 버리자니 너무나도 속상했다. 미레아의 마음속에서 세피로스는 여전히 그녀의 대부였고, 친구였고, 생사를 함께 한 동료였다.

“세피로스는 서리 여신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향할 거야.”

라케드가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어. 나도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가 본 적도 없고.”

“어떻게 가는 건데요?”

진의 호기심 어린 말에 라케드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그곳은 철저하게 서리 여신이 주관하는 곳이고 위치는 서리 여신 본인만 아니까. 세피로스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커.”

“그럼 무슨 생각인 거죠?”

“아까도 말했지만, 속셈은 알아도 계획을 모르겠다니까.”

“라우노는 서리 여신을 죽이겠다 그랬어요.”

아리스가 말했다.

“저에게 그런 제안을 하고 그 방법은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만…… 그렇다면 라우노가 서리 여신에게 접근할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방법을 알고 있다 해도 지금은 접근할 수 없을 거야.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원래는 페니드란이 가진 마력을 이용할 계획 같았는데 그 계획은 우리가 일단 훼방을 놓았으니…….”

“라우노를 잡아서 방법을 실토하게 털어 버리면 되지요.”

진이 가볍게 말했다.

“신성력 결계에 쥐약인 것도 알아냈고, 저번에는 준비도 못 하고 당해 버렸지만, 텔라인과 협력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일이 그렇게 쉽게만 풀리면 좋겠다만…….”

“아리스,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류견우의 말에 사람들이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라우노가 너에게 협력을 요청했다면 그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야. 그렇다면 그 무언가를 이용하면 라우노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발록이 아리스가 대답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라우노를 먼저 칩시다. 루아드 제국과는 이미 척진 이상 우리는 더 잃을 것도 없습니다.”

발록의 말에 사람 대다수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라우노를 어떤 식으로 끌어낼지는 생각해 봐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지 말고 친다면 황제를 먼저 치도록 해요.”

아리스의 말에 진이 질린 얼굴을 했다.

“또 그 소리야?”

“아니, 들어 봐. 라우노가 꼭두각시로 황제를 내세웠잖아. 그렇다면 그 꼭두각시를 없애면 본인이 직접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어? 원래 자신은 뒤로 쏙 빠져서 수하만 부리는 놈들은 그 수족부터 잘라 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아리스 군.”

발록이 입을 열었다.

“라우노는 몰라도 당신이 황제를 암살이라도 한다면 우리 쪽에서 당신을 감싸기 어려워집니다.”

아리스는 다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발록에게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저도 생각해 보았는데, 혁명군이나 독립군들을 이용하는 것은요?”

“혁명군과 독립군?”

아리스를 구출하기 위해 황궁에 침입한 사건은 로아메나 대륙을 넘어 아이나 대륙과 리프칸 대륙까지 소문이 쫙 났다. 그 난리를 쳤는데 언론의 입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황궁에 침입한 범인은 독립군이라는 식으로 발표가 나갔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일개 용병 집단인 텔라인과 타국의 사병들이 황궁에 침투했을뿐더러, 루데키아스 대공자를 잡았다가 놓쳤다면 그것도 망신이었다. 뒷공작을 입막음하고 이참에 독립군들을 압박할 명분이 생긴 것이었다.

“최근에 루아드 제국의 속국들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메르티어스 황제는 제국주의를 유지하고 싶어 하지만 속국들의 반항은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커지고 있지요. 그래서 페니드란과 라우노가 만들어 낸 인형 군단을 얻어 절대 무력의 힘을 갖고자 했고…… 그렇다면 그쪽이야말로 일거양득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황실에 반하는 공화정 파의 움직임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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