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71화 (171/257)

171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니? 이게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야? 난 이제 혼자 남겨지는 건 싫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야!”

“이해해. 네 마음 다 이해하는데, 그럼 나야말로 어떡해? 네가 또 그렇게 무리하고 혼자 다 짊어지고 가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 내가 두 눈 뜨고 네 옆에 있는 한 그런 짓을 하는 건 뜯어말릴 거야!”

그 말에 미레아가 멈칫했다. 미레아는 자기 혼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 자신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파울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자신이 무리하게 움직여서 일행들을 가르는 바람에 서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위험했다. 그렇다고 단독으로 움직이자니 그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미레아는 분해 죽을 것 같았다.

파울로는 전보를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어쨌든 원정대가 해체되었다 해도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니까 너는 당분간 가만히 있어. 알겠어?”

미레아가 이를 와드득 갈았다. 그때, 커피를 큰 컵에 가득 담아 온 아리스가 퀭한 눈으로 나타났다. 긴 머리까지 다듬지 않은 상태로 풀어헤치고 유령처럼 배회하던 그는 그렇지 않아도 미레아와 파울로를 찾고 있었던 차라 둘을 보자 멈춰 섰다.

“무슨 일이길래 표정들이 그래?”

“너야말로 얼굴이 왜 그래?”

미레아가 산송장 같은 꼴을 보고 걱정스럽게 묻자 아리스는 입에 머금고 있던 커피를 삼키고 대답했다.

“계속 생각하느라고 잠을 못 잤어…….”

“무슨 생각?”

“어떻게 하면 황제랑 라우노를 죽일까 하고.”

“너도 참 너다.”

“난 그렇다 치고. 그래서 무슨 일이냐니까.”

그러면서 커피를 호로록 마시는 아리스에게 대고 파울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세피로스가 우리를 배신했어. 리비엘로를 살해한 것은 세피로스야.”

“왜 그렇게 단정을 지어?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미레아가 그렇게 파울로의 말에 반발하는 사이 아리스는 뜨거운 커피가 담긴 컵을 떨어트릴 뻔했다.

“뭐라고요?!”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외치다 사례가 들려 한참을 콜록거렸다. 얼마 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아리스의 태도는 아까와는 달리 제법 덤덤했다.

“뭐…… 생각해 보면 이 시점에서 배신을 한 게 의외기는 했지만 새삼스럽지도 않아. 난 그 사람에게는 기대한 것도 없었거든요.”

그러면서 다시 커피를 마셨다. 그 태평한 태도에 미레아는 어쩐지 화가 났다.

“너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아? 파울로의 주장대로라면 세피로스가 리비엘로를 죽였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야. 다만 그렇게까지 놀랄 필요가 없다는 거지.”

“너 혹시 세피로스가 이럴 걸 알고 있었어?”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나랑 세피로스는 서로서로 이용하는 관계였다고. 난 그에게 이용할 가치가 없어지면 버림받는 게 당연했고. 우리는 신뢰 관계보다는 상호 이익 관계로 묶였었으니 말이야.”

그동안 남은 여러 트라우마 때문에 아리스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행동했다. 그게 세피로스라 해도 말이다. 게다가 아리스야말로 아직도 수척한 몰골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해서 그런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세피로스의 배신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뭐, 너희야 충격이 크겠다만.”

아리스는 이해한단 얼굴이었다.

“그래서 당신들은 어떻게 할 건데요?”

“글쎄다…….”

파울로는 면도로 매끈해진 턱을 쓰다듬으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사실 그렇다 해도 우리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 라우노를 막는 것. 그건 이미 발록 대령에게 협조하겠다 했으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그러다 보면 세피로스도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요? 이번 일과 관계가 있다 보니…….”

“그래, 맞아. 그러니까 미레아 너는 좀 기다려 보란 말이다. 그리고 말이 기다리는 거지 우리가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건 아니잖니. 태세도 재정비하고, 라케드 님께 연락할 계획이야. 무엇보다 너는 쉬어야 해! 덧붙여서 아리스 너도! 잠도 못 잔 그런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자리걸음인 법이야.”

하지만 아리스는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켜고는 말했다.

“적어도 미레아보단 이성적이니까 걱정하지 마시죠.”

“하…… 정말…….”

미레아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옆에 아리스와 파울로가 없었다면 진작에 정신이 무너졌을 것이다.

“아무튼, 알겠어? 마음이 급한 건 알겠는데 제발 좀 마음의 여유를 찾아! 세피로스가 리비엘로를 살해했듯, 자기 일에 방해되는 다른 사람들 역시 살해할 가능성이 있는 한, 우리는 개인행동을 하면 안 돼.”

그 말에 미레아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세피로스가 누군가를 죽이고 다닐 것이란 상상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미레아의 심정을 알든 모르든 파울로는 말을 이었다.

“라우노가 이 세상을 전부 암흑 지대처럼 만들 계획이라면, 세피로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건에 대해서 말인데요, 제가 라우노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말에 파울로와 미레아가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라우노는 서리 여신을 죽이겠다고 그랬어요.”

그 어이없는 말에 두 사람이 눈을 끔벅거렸다.

“여신을…… 죽여?”

“그게 가능해?”

“가능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라우노가 제게 제안한 것이 그것이거든요. 서리 여신을 죽이는 데 동참해 달라고. 서리 여신만 없으면 가만히 손 놓고 있어도 영소의 흐름이 막히고 영소의 오염이 일어나 이 세상은 암흑 지대로 변하기 훨씬 쉬우니 말이에요. 어이없는 말이라 다들 믿지 않을 것 같아 며칠 전에는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세피로스는 라우노가 서리 여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막을 생각이겠지. 라우노가 하는 짓들을 전부 훼방 놓겠다는 말만큼은 진심이었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서리 여신을 죽이는 것은 용납 못 할 테니 말이야.”

“의문인 것은 람이 대체 어떤 것을 알고 있기에 그녀를 죽였냐는 점이겠군요.”

미레아는 세피로스가 리비엘로를 죽였다는 식의 말을 이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야?”

“더는 듣기 싫어.”

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죽였다. 미레아는 이 대전제를 당장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고 싶었다. 그래서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벗어나 방으로 돌아왔다. 화풀이로 방문을 쾅 소리 나게 닫자 같은 방을 쓰는 율비네가 깜짝 놀라 미레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몰라요.”

미레아는 그대로 침대로 고꾸라져 베개 밑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러다 율비네에게 어물거리며 말했다.

“율비네. 혹시…… 아리스가 율비네를 배신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 말에 율비네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아리스가 저를 배신하겠답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가정이에요, 가정.”

“왜 갑자기 그런 것이 궁금한 건진 모르겠지만 글쎄요…….”

율비네는 조금 생각해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음…… 배신을 한 게 다른 사람이라면 바로 목을 베었겠지만, 아리스라면…… 모르겠습니다. 아마 정 때문에 갈팡질팡하다 되레 당할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드네요.”

율비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자신 역시 그럴 것 같았다. 먼저 베지 못하면 베인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도 말이다.

율비네에게는 세피로스가 배신했다는 말을 아직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미레아부터 세피로스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으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 * *

다음날, 라케드가 합류했다. 보안 채널을 통해 그에게 연락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새벽 호는 함으로 접근하는 거대한 용을 보고 놀라 하마터면 발포할 뻔했다. 라케드를 알아본 파울로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외부 해치를 열어 주자 라케드가 인형으로 현신하여 내려앉았다.

그 역시 고작 일주일 사이에 상당히 얼굴이 상해 있었다. 그동안 뒤처리하기 바빠 잠을 못 잔 건 그도 똑같았는지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가 있었다. 라케드는 오자마자 사람들을 모아 두고 용건을 꺼냈다.

“세피로스가 배신했다고?”

그 말에 발록은 물론 류견우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당황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전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셋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라케드가 왔다는 호출만 받고 모인 인원이었기 때문에 라케드의 말은 폭탄 발언이나 다름없었다. 파울로가 머리를 싸매며 라케드에게 전보가 적힌 종이를 건네주었다.

“거꾸로 떨어진 용…….”

라케드는 전보를 들여다보며 그 내용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주먹을 꽉 쥐며 종이를 구기며 얼굴도 같이 구겼다.

“젠장, 그 덜떨어진 놈이 기어이……!”

라케드가 세피로스를 하대하는 것은 다들 처음 보았다. 하지만 라케드는 지금까지 세피로스가 1세대 용이라 존중해 준 것뿐이었다. 살아온 세월로만 치면 라케드는 세피로스에 비해 까마득한 연륜이 있었다. 라케드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세피로스가 배신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어리둥절해하는 진에게 아리스가 설명했다.

“록산에서 전보가 왔어. 거꾸로 떨어진 용이라고…… 우리가 아는 용 중에 지금 행방이 묘연한 사람이라고는 하나 아니야? 정황상 용이 세피로스를 뜻할 확률이 높고 그가 리비엘로를 죽이고 배신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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