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70화 (170/257)

170화.

제18장 모의

쿤둘렌은 여전히 리비엘로의 살해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 수사는 진행 중이었지만 며칠째 범인을 특정하기는커녕 용의자조차 찾을 수 없어서 상당히 곤란했다. 증거도,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이 꼭 하늘로 솟은 것 같았다.

하늘로 솟아……?

쿤둘렌은 마법사였고 하늘에 솟는 방법쯤은 몇 개 알고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것에 대한 가능성도 열어 두었기 때문에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남았을까 싶어 남아 있는 마력을 추적했지만 특이한 것은 없었다.

그날도 범행 현장인 신전에 한 번 더 찾아갔다. 할 수 있는 조사는 다 했지만 그래도 발걸음을 옮겼다. 쿤둘렌은 잠시 기도석에 앉아서 서리 여신께 기도를 올렸다. 오빈이 인간들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은 상당히 우스운 광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쿤둘렌이 도움을 요청할 만한 존재는 그녀밖에 없었다.

그리고 석상 앞에 올려진 초에 불을 붙이려 했다. 그때, 쿤둘렌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앞에 있는 초를 먼저 사용하기 때문에 아직 불을 붙인 적이 없는 가장 끝에 있는 초가 거꾸로 세워져 있었다. 그저 거꾸로 세워 놨구나 하며 넘어가려 했는데 아래쪽에 녹은 자국이 있었다.

사용하던 것을 왜 끝에 세웠을까. 저것 먼저 켜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뻗었는데 촛농이 제단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누군가가 명백하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고의로 촛농을 녹여 고정해서 세워 둔 것이다. 쿤둘렌은 초를 들고 그것을 훑어보다 어떤 것을 발견했다.

여신의 제단에 바치는 초에는 원래 음각으로 여러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꽃일 때도 있고 구름일 때도 있었다. 장식적인 의미만 있으면 딱히 가리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쿤둘렌이 본 초에는 용이 새겨져 있었다. 위쪽으로 고개를 뚝 빼고 날개를 쫙 편 모습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응시하던 그때, 쿤둘렌의 머릿속에 벼락같은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용이라면…… 마법을 사용해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증거를 남기지 않고 이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용이 누구냐, 인데…….

이것이 리비엘로가 남긴 다잉 메시지라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다른 일행에게는 물론 라슈발렌 전체에 알려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초를 들고 헐레벌떡 통신실로 향했다.

* * *

미레아는 하루 정도 잠만 잤다. 아리스를 구출하고 나니 당장 할 일이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남았다. 덕분에 미레아는 요 며칠 일들이 많아 깊은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에 죽은 듯이 잠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고대로 잠에 쏟아부은 미레아는 다음 날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났다.

그녀는 높은 고도로 비행 중인 새벽 호 선내에 마련된 사방이 유리로 된 창이 난 방에 들어가 수평선만 한없이 들여다보았다. 새벽 호는 지금 망망대해 한복판을 비행 중이었다. 공해라면 라우노와 루아드 제국이 쉽게 추격해 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고요한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은 썩 재미있는 광경은 아니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기엔 적당했다.

석양이 지는 것을 보고 슬슬 시간관념이 돌아오자 허기가 밀려왔다. 아침, 점심도 거르고 계속 밖의 풍경만 보며 앉아 있기만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허기만 느낄 뿐 입맛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자리를 뜨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앉아만 있는데 사람이 한 명 나타났다.

“왜 식사하러 안 와? 여기는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놓치면 그대로 굶어야 한단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파울로가 오렌지 주스와 샌드위치를 들이밀었다. 미레아는 그것을 사양하지 않고 기운 없는 표정으로 오렌지 주스부터 한 모금 머금었다. 새콤달콤한 음료라 그런지 목으로 넘기기 그나마 수월했다. 그렇게 입을 축인 다음 샌드위치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짭짜름한 햄과 달콤한 소스를 버무린 달걀과 감자 스프레드가 번갈아 가면서 미뢰를 자극하자 입맛이 돌았다.

미레아가 반쯤 초점 풀린 눈으로 기계적으로 쩝쩝거리며 먹는 것을 보며 파울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울로라고 해서 시오나 라일라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미레아의 상태가 이러니 본인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레아는 단순히 슬프거나 기운이 없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과부하가 걸린 바람에 역으로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음식물이 들어가자 두뇌가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어쩐다.

미레아는 주스를 꿀꺽꿀꺽 목으로 넘기며 생각했다. 아리스는 연신 메르티어스와 라우노를 죽여 버리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라우노가 어떤 식으로 나올 지도 몰랐고 일행들의 전의를 가다듬어야 했다. 사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라우노가 그들을 찾아낼 것이 뻔했다. 그 동안 그들은 휴식을 취하고 전력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미레아는 그것 말고도 리비엘로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록산에 남은 쿤둘렌이 대신 조사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첼시가 찾아왔다.

“보안 채널로 록산에서 전보가 왔습니다.”

미레아는 빵가루가 묻은 손을 털며 벌떡 일어나 첼시가 내민 가늘고 긴 종이를 받았다. 그들이 새벽 호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벨로아 부회장을 포함해서 쿤둘렌과 라일라뿐이니 파울로나 미레아의 앞으로 온 것이라면 셋 중 한 명이 보낸 내용일 것이다.

전보라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미레아는 파울로와 그것을 들여다보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거꾸로 떨어진 용.]

그것이 끝이었다. 미레아는 그것을 한 번 더 보고 종이를 뒤집어 보았다가 첼시에게 물었다.

“이게 끝이에요?”

“예. 보안 채널이라 길게는 보내지 못합니다.”

첼시는 그들에게 그것만 넘기고 돌아갔다. 미레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글자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하면 마치 저절로 해답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이지?”

암호 같은 글귀를 도통 해석하지 못한 미레아가 중얼거렸다. 파울로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아는 암호문에서 거꾸로 떨어졌다는 뜻은 딱 한 가지인데…….”

“그게 뭔데?”

미레아는 평소 사무적인 태도를 보일 때 하던 존대를 접어 두고 편안하게 물었다. 파울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배신.”

“그럼 거꾸로 떨어진 용이란 것은 용이 배신했다는 소리란 뜻이구나.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용이 누구인데? 용들이 배신했다는 소리야?”

“용족 전체가 배신했다는 소리는 아닐 거야. 그랬다면 복수형을 썼겠지. 쿤둘렌이 지목한 용이 리비엘로를 살해했다는 뜻이 맞다면 여기서 용은…… 혹시…….”

파울로의 설명에 미레아의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지금 그들이 아는 한 행동이 수상쩍고 행적이 묘연한 용이라면 세피로스밖에 없었다.

“아니야.”

미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파울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용이 세피로스를 말하는 거라면 아니야.”

“하지만 말했잖아. 그때 세피로스는 우리를 버렸어.”

“이유가 있을 거라니까! 그리고 만약 세피로스가 정말로 우리를 버린 거라 쳐! 그렇다면 리비엘로는 왜 살해당한 건데?”

파울로는 눈꼬리를 손으로 꾹 눌러 피로가 쌓인 눈을 좀 풀며 말했다.

“이 전보를 보낸 사람도 거기까지는 알 수 없으니 이렇게만 보낸 것 아닐까? 아마 쿤둘렌이 보낸 게 아닐까 싶은데.”

“아무래도 쿤둘렌이 되었든 벨로아 부회장님이 그랬든 라슈발렌에 직접 연락해야겠어. 뭔가 오해가 있을 거야.”

“당분간은 안 돼. 도청당해.”

“그럼 어떡하라고?”

미레아는 손톱을 잘근거리며 서성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역시 안 되겠어. 세피로스를 찾아야겠어.”

그 말에 파울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작정하고 숨어 버린 사람을 어떻게 찾아? 일반인도 아니고 그 세피로스인데. 라케드 님도 찾지 못했잖아.”

“하지만 이해가 가질 않아! 세피로스가 왜 우리를 배신해? 그래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지금은 그걸 알 수 없으니…….”

“그렇지? 범행 동기가 명확치 않단 말이야. 그런데 섣불리 배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말에 파울로는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미레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배신이라니. 그럴 리 없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피로스가? 아니야. 절대로.”

하지만 파울로의 생각은 달랐다. 세피로스는 가끔 의뭉스럽게 굴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다 뜻이 있으니 그렇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케이드가 믿고 의지하던 상대였다. 케이드를 보고 자란 파울로였기에 자연스럽게 케이드가 믿으니 세피로스를 믿는다는 생각으로 자랐다.

그런데 그것이 다 눈속임용 거짓이라면……?

한번 그렇게 생각하니 의심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리비엘로라면 무언가를 알아차렸을지도 몰라. 예지 능력을 갖췄고 서리 여신의 신녀니까. 록산으로 돌아가야겠어. 리비엘로가 남긴 것을 다시 한번 더 찾아보고…….”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파울로가 역시 안 되겠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여기까지 알아냈으니 나머지도 록산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

“뭐? 왜?”

“세피로스가 정말로 배신했다면 우리가 뿔뿔이 흩어져서는 안 돼.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따로 행동했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배신한 게 아닐 거라니까?! 왜 자꾸 배신했다고 확신하는 거야?”

미레아가 화를 내자 파울로는 그녀를 진정 시켜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쨌든 세피로스를 찾아야 한다는 네 주장에는 동의해. 하지만 너 혼자 보내지는 않아. 너무 뜬구름 잡는 상황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그사이 무언가 일이 틀어져서 이번에도 누가 죽으면?!”

미레아의 말에 파울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레아.”

“그게 이번엔 파울로일 수도 있어! 어쩌면 진이나 율비네일 수도 있지!”

“미레아.”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어쩌란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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