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69화 (169/257)

169화.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아리스는 놀라지 말라고 했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레아가 어리둥절해하면서 아리스에게 물었지만, 그는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단 케이드를 찾기 바빴다. 하지만 케이드는 한 번에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의 끝조차 보이지 않게 숨어 있었다.

아리스는 미레아에게 케이드의 소식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러 댈 수 없었다. 마라피네스가 그런 그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고는 여전히 깔깔거리고 있는 페니드란을 지나쳐 덤불 사이로 가서 아까 케이드가 자신을 불렀던 것을 흉내 냈다.

“저기요. 이보세요? 이제 아까 제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됩니까, 제인스터 씨?”

그 말에 케이드가 느릿하게 덤불에서 나왔다. 그리고 미레아에게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미레아…… 나야. 아빠야.”

그는 가슴이 벅차오른단 표정이었지만 미레아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보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말했다.

“아, 또 꿈이구나.”

그 말에 페니드란의 웃음 소리가 한층 커졌다. 아리스가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몰라 일단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꿈이 아니야. 페니드란이 만든 가상공간이고 저 둘은 페니드란에 붙어 있던 우리 아버지와 케이드 씨의 영소를 형상화한 것이야. 두 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들은 영소의 잔재고 유령이래.”

하지만 미레아는 일전에 마수가 만들어 낸 자각몽에 데인 적이 있어서 그 말을 쉽사리 믿지 않았다.

“또 자각몽인가 봐. 난 또 아리스가 불러내길래 혼자 도끼질하고 있었네.”

그 말에 미레아의 시선을 피하고 있던 케이드가 갑자기 버럭했다.

“미레아, 네가 한 게 무슨 도끼질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 도끼질은 아니었으면 한다!”

미레아가 깜짝 놀라 케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씩씩거리며 아리스를 노려보았다가 미레아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뒷걸음질 치려 했다. 하지만 마라피네스가 그의 어깨를 꽉 붙들고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다. 미레아는 케이드 앞에 서더니 손을 뻗어 그의 볼을 매만졌다. 그리고 어색하게 불러 보았다.

“아빠.”

“응, 나야.”

“이번에야말로 진짜 아빠야?”

“진짜…… 라고 말하자니 애매한 것이 나는 케이드 제인스터란 인간의 영소가 남긴 잔류 사념이라. 그러니까, 미안해.”

미레아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가 케이드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 5년 전에 행방불명됐던 아빠가 이런 곳에 어떻게 있어?”

쉽게 믿지 못하는 미레아에게 아리스가 진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있잖아, 내가…… 그러니까 내가 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아리스가 미레아의 눈치를 슬슬 보고 있는데 케이드가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5년 전에 클라인으로 공간 전이를 해서 의지에 먹히던 아리스에게 마수로부터 클라인을 페니드란으로 봉인하는 방법을 알려 준 게 나거든. 그때 죽었어.”

“……케이드 씨, 아무리 그래도 죽었다는 말을 너무 쉽게 쉽게 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리스의 말에 케이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죽은 걸 죽었다고 하지 뭐라고 말하냐.”

그 말에 미레아가 케이드의 얼굴을 한없이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아빠 그러니까…… 죽었어? 5년 전, 그때?”

“응.”

케이드는 차마 상세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 미레아는 그 표정으로 충분했다.

“록산에서 클라인까지 공간 전이를 했다니, 그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가. 아빠는 마법은 못 썼잖아. 그러니까…… 니콜라우스에게서 페이릭의 영소가 분리된 것이 아빠지만,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들었는데…….”

“뭐, 나라 해도 그 정도의 능력은 남아 있었거든. 어쨌든, 당시에는 상황이 급했으니까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그래서 아리스를 도와 클라인을 봉인하고 그 대가로 목숨을 잃은 거야? 이 모습은 유령인 거고?”

“그런 셈이지.”

“그랬구나. 그래서 돌아오지 못했구나.”

“……미안해.”

“아니야. 상황은 대충 알았어.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도 이해했고. 오히려 맞지 않았던 퍼즐 마지막 조각을 발견한 기분이라 후련하기도 해. 사실은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는데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고 싶지 않았었어.”

미레아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입꼬리를 끌어 올려 겨우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내었지만, 그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나, 아빠를 보면 할 말이 되게 많았는데 하나도 생각 안 난다. 어떡하지?”

미레아가 눈을 벅벅 문질러 훔쳤다.

“아빠, 사실은 내가 요즘 너무 힘들거든…… 시오가 죽고, 리비엘로가 죽고, 세피로스는 행방불명이고…… 그런데 아빠까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나 너무 힘들어.”

미레아의 말에 케이드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리스는 뒤늦게 자신의 무신경함에 질려서 새벽 호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미레아의 말대로 그녀는 고작 며칠 사이에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케이드 씨의 소식까지 전하면 어쩌자는 거야, 나 새끼야! 그냥 황궁에서 자폭해서 라우노와 황제를 저승길 동무 삼아 죽지 그랬냐!’

아리스의 얼굴이 파리해지는 것을 보고 마라피네스가 끌끌하며 혀를 찼다.

미레아는 케이드 앞에서 한동안 코를 훌쩍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누가 봐도 울음을 삼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케이드가 어색하게 미레아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어도 그녀는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미레아가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케이드의 가슴에 꾹 기대어 왔다. 케이드는 연신 괜찮다며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 무거운 공기에 슬슬 아리스가 숨을 쉬기 힘들 때쯤 되자 미레아가 돌연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케이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5년 치 어리광.”

미레아는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짝짝 때렸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뭐. 말했잖아.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고.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것은 예상 못 했지만…….”

그 말에 케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미레아는 케이드에게 히 하고 웃어 보고는 아리스를 돌아보았다.

“너 왜 사실대로 말 안 했어? 우리 아빠가 너를 감싸다 죽었다고.”

아리스는 여전히 안색이 썩 좋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 안 좋아졌다. 미레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어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싫어할까 봐? 욕하면서 때릴까 봐? 우리 아빠 살려 내라고 떼쓸까 봐?”

아리스가 긍정의 의미로 침묵하자 미레아가 피식 웃었다.

“안 그래. 나 괜찮아.”

그리고 케이드를 향해서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여러모로 힘든 건 맞아. 그런데 괜찮아지는 방법을 알았어. 나 정말 괜찮아. 진짜라니까?”

미레아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지금까지 그럭저럭 버텨 왔어. 앞으로도 그럭저럭 버텨 볼게.”

케이드가 미레아를 끌어안았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미레아가 하하 웃으며 마주 안았다. 그런 둘을 말없이 바라보던 마라피네스가 아리스의 어깨를 콕콕 찌르며 속삭였다.

“이 아버지는 찬성한다.”

“무얼요!”

“밝고 싹싹해 보여서 좋아.”

“아버지가 좋으면 뭘 어쩌시게요!”

아리스는 귀까지 새빨개져서 바락거리다 마라피네스의 몸이 반투명해진 것을 보고 멈칫했다. 아리스의 반응에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마라피네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 이런. 여기까지인가 보군.”

케이드의 몸 역시 반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미레아가 당황해서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케이드를 바라보았다. 페니드란이 그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말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저도 죄송스럽지만, 시간이 다 되셨습니다. 부식 지역 밖에서는 영소의 흐름이 너무 거세서 두 분을 이 이상 잡고 있기 힘드네요.”

“이것만 해도 어디냐. 고마워, 페니드란.”

케이드가 감사 인사를 하자 그가 쑥스럽다는 듯 헤헤 웃었다. 마라피네스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상당히 어색해했다.

“잘 살아라.”

“그게 뭐예요. 무슨 인사가 그래.”

“다른 건 길게 말해 봤자 잔소리지. 그러니까 잘 살라고.”

그런 둘에게 케이드가 삭막한 부자 관계라며 고개를 젓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혼자 남겨 둬서 미안해. 하지만 레인이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말하는 케이드에게 미레아가 팔짱을 끼며 타박했다.

“엄마 말고 휴레오도 좀 챙겨 주시라고요.”

“그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거고.”

케이드의 대답에 미레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힘든 일 있으면 저 녀석에게 말해. 너희 둘의 인연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으니까. 너는 사실 저 녀석의…….”

케이드가 미레아에게 속삭이며 슬그머니 아리스를 지목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아니다. 이 말은 잊고…… 혹시 저 녀석에게 대한 다른 말을 듣는다 해도 그냥 지금까지처럼 지내면 돼.”

케이드는 잔소리를 하는 대신 궁금한 표정을 짓는 미레아의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게 정답이다.”

둘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빛으로 변하며 흩어졌다. 그들이 사라지기 직전에 케이드가 입술만 움직여 소리 없이 말했다.

‘사랑한다.’

그것을 본 미레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둘은 완전히 없어졌고 페니드란이 가상공간을 없애 버렸다. 미레아가 눈을 깜박이자 보인 것은 휴게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 자신이 유리에 비친 모습이었다. 둘은 서로 마주 보고 말없이 앉아 있다가 미레아가 손깍지를 끼고 거기에 이마를 기대었다.

“아빠가 봤을 때 나 정말 괜찮아 보였을까?”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미레아의 표정이 아리스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시지 않았을까?”

그 말에 미레아가 또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굵은 눈물이 방울져서 무릎 위로 뚝뚝 떨어지며 자국을 남겼다.

“변명은 안 하겠어. 치고 싶으면 쳐. 네 아버지는 나 때문에 죽었으니까.”

아리스의 결의 어린 목소리에 미레아가 반쯤 쉰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상황이 어쩔 수 없었잖아.”

미레아는 잠시 숨을 고르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괜찮은 것과 별개야.”

“알아.”

“못 본 척해 줄 테니까 너도 울어.”

아리스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안 울어.”

내가 어떻게 울겠어.

하지만 그런 아리스의 대답을 비웃기라도 한 듯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우는 방법조차 잊은 그였기에 그건 무언가가 결여된 울음이었다.

그래서 대신 웃었다. 지금만큼은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혹은 그 누구보다 슬프게 말이다.

* * *

그 시각, 은현은 1인실에서 아리스가 그랬듯 자신의 환도를 닦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손대지 않았지만, 여전히 잘 벼려진 칼날은 전선에 서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따듯한 바람이 불어 고개를 들었다. 실내였는데 살랑거리는 바람이 은현을 훑으며 지나갔다.

“……마라피네스?”

은현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왜 남편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오랜만에 아들과 재회해서 다른 그리운 이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을 수도. 은현은 하던 일을 마무리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은 그곳에서 어떠신가요. 저는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살고 있답니다.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쌓인 짧은 그리움은 슬픔보다는 추억이 되어 은현은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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