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그러니까 두 분이 진짜는 아니라 이 말이지요?”
“그래서 실망했니?”
마라피네스가 시무룩한 얼굴로 묻자 아리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단 낫네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아리스는 이 기회를 알차게 이용하기로 했다.
“아, 저 여쭤볼 게 있어요. 케이드 씨에게요.”
아리스의 말에 마라피네스를 구박하고 있던 케이드가 두 눈을 끔벅거렸다.
“나? 마라피네스가 아니고?”
“네. 페이릭과 마수의 영소에 대한 부분인데요…….”
“오, 그것도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구나. 너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냐?”
케이드가 심각한 얼굴을 하자 아리스도 덩달아 심각해져서 대답했다.
“건너 건너 들었어요. 케이드 씨는 원래 니콜라우스의 일부였는데 그가 마수의 영소와 페이릭의 영소를 둘로 나누었고, 케이드 씨 쪽은 순수하게 페이릭의 영소만으로 구성된 분이라고…….”
“응, 맞아. 그렇다고 착각하면 안 되는 게, 니콜라우스의 기억을 일부 갖고 있긴 하지만 난 니콜라우스도 페이릭도 아니야. 한번 육신을 떠난 영소의 흐름은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때 완전히 별개의 존재가 되는 것이거든.”
“저는 라케드 님께 직접 설명을 들은 게 아니라 기왕 이렇게 당사자를 본 김에 더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은데요…….”
아리스의 말에 셋은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케이드가 나뭇가지로 땅에 그림을 찍찍 그리면서 설명해 준 내용은 미레아가 라케드에게 들었다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당사자라 그런지 설명이 더 자세했다. 모든 데르카이드는 어느 정도 마수의 영소를 가지고 있고 마력의 양은 마수의 영소량과 비례한다는 설명에 아리스가 질문했다.
“그럼 저는 뭔데요?”
케이드는 아리스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마력이 강한 데르카이드들은 그만큼 마수의 영소가 큰 영향을 끼치고 있어. 니콜라우스는 최초의 데르카이드인 만큼 마수와 페이릭의 영소를 아주 많이 갖고 태어났지. 그래서 마수의 영소에 휘둘렸던 거고…… 너 역시 마력이 강한 만큼 마수의 영소가 네게 끼치는 영향이 많은 건 맞아. 하지만 단순히 네 영소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마수와 페이릭으로 이분법 하기에는 너는 페이릭의 영소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갖고 있어.”
“그게 뭔가요?”
아리스의 말에 케이드가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보였다.
“가장 중요한 부분.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그의 표현에 아리스는 발가락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그러든 말든 케이드는 말을 이었다.
“각각의 영소에는 전생의 마음이 깃들이 마련이지. 영혼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은 그런 전생의 마음들이야. 너는 페이릭의 영소 중 내가 말한 부분을 가장 많이 갖고 태어났어.”
너의 영혼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그 시적인 표현에 아리스는 정말로 손발이 다 오그라들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케이드의 설명을 묵묵히 경청했다.
“그러니 니콜라우스처럼 인간을 증오한다거나 마수의 영소에 마음을 잡아먹히게 될 일은 없을 거야. 무엇보다 네 세대쯤 되는 데르카이드는 두 영소 사이의 결합이 니콜라우스보다 융화가 잘 되어서 인간에 가깝거든. 마력이 강하든 아니든 간에 말이야.”
케이드의 말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리스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아리스의 표정을 보고는 마라피네스가 심란한 얼굴로 말했다.
“여태 그런 것을 걱정하고 있었니?”
“니콜라우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아리스의 말에 마라피네스는 그가 아들의 어린 시절에 그래 주었던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생각보다 귀여운 걱정인 걸?”
케이드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것이 미레아의 얼굴과 비슷했다. 케이드는 둘의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물었다.
“지금 미레아와 함께 있으면 나도 내 가족들 소식을 알 수 있을까? 내가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와 버려서 다들 내 걱정 많이 했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아리스가 심란한 얼굴을 했다.
“아, 그게…… 소식을 모르시나 보군요. 당연하겠지만…….”
“무슨 소식인지 모르겠지만 난 5년 전 그 사건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죽었으니까.”
“미레아의 어머니와 동생분은…… 그러니까, 그때…….”
아리스는 말을 듬성듬성 잇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케이드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었구나.”
아리스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본인 때문에 죽었으니 유감이라는 소리를 하기에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후회와 자책하는 말은 케이드 쪽에서 터져 나왔다.
“하…… 나 너무 무책임한 사람이네…… 나는 다른 식구들을 남기고 혼자 죽어 버린 줄 알았는데. 내 멋대로 죽어 버린 주제에 다른 식구들이 어떻게 되는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네. 막연하게 그 난리 통에도 살아남을 줄 알았는데…….”
그는 손으로 양 눈을 가렸다. 울음을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아리스는 겨우 입을 열어 사과했다.
“아니, 네 책임만은 아니고…….”
그는 다시 양손을 떼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럼 미레아는 혼자 남았던 거구나…… 5년 동안. 나 정말 답 없는 아버지네. 어쩌지…….”
케이드의 얼굴은 그렇게까지 슬퍼 보이지 않았지만, 혼잣말을 주절주절 내뱉는 것을 보니 제법 충격 받은 듯싶었다. 그는 한동안 얼굴을 쓸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사실은 네게 부탁해서 미레아의 얼굴이나 보고 미련 없이 사라질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케이드가 마른세수하였다.
“딸내미 얼굴을 볼 낯이 없다. 그냥 사라지련다.”
“아니, 잠깐! 잠깐만요!”
아리스는 황급히 그를 잡았다. 케이드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결계에서 나온 페니드란이 이 이상 우리 영소를 붙들고 있는 것도 한계고…… 우리는 오늘 내로 사라질 텐데, 뭐…….”
“그래도 보고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애초에 오늘밖에 시간이 없다는 소리잖아요! 미레아는 아직도 케이드 씨를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케이드 씨의 무덤도 안 만들었다고요!”
“그래, 맞다. 나에게는 이럴 기회에 얼굴 보는 것이라고 당신이 그랬잖아.”
마라피네스가 아리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말꼬리를 흐리다 케이드는 다시 눈가를 훔쳤다.
“빌어먹을, 내가 누구를 위해 죽었는데……!”
아리스는 어쩔 줄을 모르고 혼자 욕설을 내뱉고 있는 케이드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영혼만 있는 상태인데도 케이드의 눈물은 너무나도 현실감 넘쳤다.
“그래도 미레아는 살았어요.”
아리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도 계속 살아가고 있어요. 한때는 도망치기도 숨기도 했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어요. 케이드 씨 덕분에요.”
케이드는 그런 아리스를 심란한 얼굴로 바라보다 물었다.
“너 우리 미레아랑 친하냐?”
“친…… 하죠?”
누군가에게 미레아와 친하다고 말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럴까. 아리스는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반쯤 자신의 희망 사항을 담아 말했다. 그래도 이쯤은 친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감정이 어떻든 말이다.
“좋아하냐?”
젠장, 이 사람이 귀신인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누가 귀신 아니랄까 봐 정말 귀신같이 알아차리네. 그 기습 질문에 아리스는 허를 찔린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케이드는 아리스를 가자미눈으로 보며 경계했지만 이내 다 안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괜찮아. 우리 미레아는 이전부터 인기가 많아서 좋아하는 남자애들이 많았거든. 좋아해도 이해해 줄게. 실제로 사귀는 것은 내가 좀 생각해 봐야겠지만.”
하지만 마라피네스는 급격하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아리스에게 물었다.
“너 케이드의 딸 좋아해? 언제부터? 예쁘냐?”
“아, 우리 딸이면 예쁜 게 당연하잖아!”
“우리 애는 내 아내 때문에 눈이 높단 말이다!”
케이드는 미레아를 싸고돌았고 마라피네스는 은근슬쩍 아내 자랑까지 해 댔다. 두 사람의 극성에 아리스는 피로가 몰려왔다. 그들의 옆에는 아리스의 어린 시절을 본뜬 형상의 페니드란이 배를 부여잡고 깔깔거리며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리스는 그들에게서 도망가고 싶어졌다. 몇 분 사이에 10년은 늙은 느낌이었다.
“페니드란, 나 좀 이 공간에서 꺼내 줘! 제발!”
“알았어.”
아리스의 도움 요청에 페니드란이 흔쾌하게 그를 꺼내 주었다. 환영으로 만들어 냈던 푸른 언덕의 풍경이 아리스가 묵고 있는 방으로 바뀌었고 케이드와 마라피네스의 모습도 없어졌다. 아리스는 몰려오는 두통에 잠시 이마를 짚고 있다가 비척거리면서 일어났다.
“너 방금 그거 얼마나 더 할 수 있어?”
― 두 분의 영소를 붙잡고 있을 수 있는 건 앞으로 길어야 한 시간이야. 그 이상 가면 영소의 오염이 진행될까 걱정돼. 사실은 지금도 제법 무리해서 붙잡고 있는 거거든.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어차피 언젠가는 미레아에게 이야기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이 지금일 뿐이다. 아니, 지금이어야 했다.
아리스는 다급하게 맞은편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다 문득 다른 방에 있을 어머니가 떠올랐다. 이 기회를 자신의 어머니께 드린다면…….
“너 그사이 무슨 일 있었냐? 얼굴이 왜 그래?”
아리스가 생각에 잠깐 잠긴 사이 방문을 열어 준 진이 물었다. 아리스는 침대 위에 누워 있다가 튕기듯 벌떡 일어난 미레아를 보는 순간 지금 이 선택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급한 얼굴로 미레아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왜? 뭔데?”
아리스는 말없이 미레아의 옷자락을 끌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왜……?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아무리 봐도 아리스의 거동이 수상했기에 미레아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미레아는 심장이 또 제멋대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고백하려고? 지금?
장렬하게 헛다리를 짚고 있는 미레아에게 아리스는 마침내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는 미레아를 앉혔다. 그리고 다짜고짜 페니드란을 내밀었다.
“잡아 봐. 그리고 놀라지 마.”
이런 것은 예상 못 한 미레아가 엉겁결에 페니드란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미레아의 눈에 들어오는 공간의 풍경이 바뀌었다. 들풀이 산들바람에 살랑거리고 있는 언덕배기 중간 즈음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미레아는 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도 모르게 손가락질했다.
“어어, 파니드라우 대공!”
마라피네스는 별다른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사이 저 애도 데려오다니, 행동력 한번 좋구나.”
마라피네스의 혼잣말에 미레아가 두 눈을 끔벅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