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제17장 아버지
서로 마주 본 방문 앞에서 미레아와 헤어진 아리스는 오랜만에 손질해 볼까 싶어 고이 모셔 둔 페니드란을 꺼냈다. 검집에서 꺼내기도 전에 페니드란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 아리스,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그래.”
아리스는 진에게 빌려 온 숫돌과 기름 먹은 천을 나란히 놓으며 피식 웃어 보였다. 6일 전에는 아리스가 페니드란을 잡자마자 소란스럽게 인사를 하고 도망치라는 경고를 해 준 것이 대화 전부였던지라 이런 식으로 나누는 대화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신이 난 페니드란의 감정이 그대로 아리스에게 흘러들어 왔다. 페니드란은 검 주제에 콧노래를 흥흥 부르며 아리스를 불러 댔다.
― 있잖아, 있잖아. 내가 부탁받은 게 있는데 며칠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말 못 했어.
“부탁?”
아리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자 페니드란이 의뭉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아리스의 시야가 변했다. 그가 있던 방 풍경이 사라지고 그는 사방이 풀로 우거진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하늘은 파랗고 아리스가 있는 언덕에는 푸른 들풀들이 자라 산들바람에 산들거리고 있었다.
아리스는 그것이 일전에 그가 살던 클라인 영주 성의 뒤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아리스의 손에 들고 있던 페니드란은 변함이 없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아리스가 미간을 찡그리자 페니드란의 검신에서 소년의 모습을 한 인형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10살 남짓 되는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는데 아리스의 어린 시절 모습과 쏙 빼다 닮았다. 예쁜 공단 천으로 높게 묶은 긴 머리에 커다란 눈망울은 제법 귀여운 인상이었다.
“잠시 현실 세계와 떨어진 공간을 한번 만들어 보았어.”
아리스는 한숨을 푹 쉬곤 어린 자신의 얼굴을 보며 투덜거렸다.
“너 인마. 네 인형을 만들 때 내 모습을 본뜨는 것은 그만두라고 예전에 말한 것 같은데?”
“하지만 난 이 모습이 좋은걸.”
페니드란이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자 그의 머리를 묶은 리본이 하늘하늘 나부꼈다.
“그래서, 오랜만에 보자마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공간으로 나를 불러냈어?”
페니드란이 양손에 뒤통수를 받치고 콧노래를 부르며 딴청을 부렸다. 대신 다른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미안, 내가 그 녀석에게 부탁한 거라.”
아리스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 자색 눈동자를 한 남자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살짝 처진 눈꼬리는 가만히 있어도 눈웃음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딱 한 번 봤지만, 사진으로는 몇 번 본 덕에 잊을 수 없었던 그 얼굴을 오랜만에 본 아리스는 한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안녕? 우리 오랜만이지?”
“케이드 제인스터! ……씨.”
아리스가 벌떡 일어나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가 눈치를 보며 끝에 존칭을 붙였다. 케이드는 그 반응이 귀엽기라도 하단 듯 눈을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그새 내 이름을 알았구나.”
“아니, 진짜…… 케이드 씨?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죠? 세피로스 님은 분명히 당신은 죽었을 거라고…….”
“응, 맞아. 나 죽었어.”
케이드가 선선히 대답했다. 자기 죽음을 너무나도 쉽게 꺼내는 케이드에게 아리스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헷갈렸다.
“내가 케이드 제인스터인 건 맞는데…… 정확하게 따지자면 진짜는 아니야. 나는 케이드의 영소에 남은 케이드 의지의 잔재지.”
아리스는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기 때문에 케이드가 설명을 덧붙였다.
“내 몸이 죽고 나서 몸을 떠나는 내 영소를 몰려든 마수가 먹으려고 노리고 있어서 원래라면 완전히 소멸할 위기였거든. 그런데 마수에게 먹히기 직전에 내 영소를 페니드란이 흡수해 주어서 지금까지 페니드란에게 붙어 있었어. 그러니까 나는 일종의 유령인 셈이지.”
“유령이요?”
아리스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마수들이 없는 공간에 나와 정상적인 영소의 흐름에 편입하기 전까지는 페니드란이 나를 보호해 주기로 했거든. 그래도 진짜 나는 죽은 거고 난 일종의 흔적일 뿐이니까 진짜 케이드가 맞냐 그러면 그것대로 맞지 않는 것 같고…… 기억만으로 당사자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많고…… 뭐,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이겠지. 네 마음대로 생각해.”
“그런 게 가능한가요?”
그 물음에 여러 생각 사이에서 방황하던 케이드가 아리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니까 여태 붙어 있었지. 하지만 결계 밖에서는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해. 아마 내가 이러고 있을 수 있는 것도 몇 시간 안 남았을 거야.”
그는 애매하게 긴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며 말했다. 아리스는 미레아가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꼬는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어?”
“세피로스 님과 미레아에게 들었어요.”
그 말에 케이드가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 석연치 않은 얼굴로 되물었다.
“세피로스는 그렇다 치는데 네가 미레아를 어떻게 아냐?”
“아, 모르시겠군요. 미레아는 라슈발렌 전투부에 들어갔어요. 올해로 3년 차고요. 오늘 저를 구해 준 게 미레아인걸요.”
“뭐어?!”
케이드는 진심으로 놀란 얼굴이었다.
“난 걔가 다른 쪽으로 진로 잡을 줄 알았는데 기어이?!”
케이드는 당황한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너랑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다.”
“음, 뭐…… 대충 그렇게 되었어요. 케이드 씨랑 미레아에 대한 사연도 어느 정도 알아요.”
“그래?”
“하지만 미레아에게는 제가 5년 전에 당신을 만났다는 말을 안 했어요. 아니, 못 했어요. 죄송합니다.”
아리스가 고개를 꾸벅이자 케이드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잘했어. 그럴 만하니까.”
그리고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빙빙 돌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세피로스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미레아까지 자기 밑으로 데리고 오냐. 가뜩이나 위험한 일투성이인데…… 아니, 무슨 생각인지 이해는 해. 이해는 하는데 그렇다고 진짜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케이드와 그 주변을 둘러본 아리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페니드란을 시켜서 저를 이 공간으로 불러낸 이유가 무엇인가요?”
“페니드란에 붙어 있는 동안 말동무가 둘이나 있어서 5년 동안 심심하지는 않았는데 그중 하나가 쑥스러움을 많이 타서 이렇게라도 만나게 해 주려고.”
“둘?”
아리스는 여전히 멍청하게 반쯤 입을 벌리고 케이드의 말을 계속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페니드란일 테고 다른 하나는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그래, 둘.”
케이드가 아리스에게 다가오더니 그가 들고 있는 페니드란의 검신을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저기요. 이보세요. 좀 나와 보시지?”
하지만 페니드란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리스는 그가 페니드란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지켜보았다. 몇 초 정도가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케이드가 손날로 검신을 깡하고 내리쳤다.
“나와!”
그러자 검신에서 누군가 툭 튀어나왔다. 그는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케이드에게 항의했다.
“내가 나와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얼굴 한번 보는 거지.”
“하지만 난 네 말대로 진짜가 아니라 의식의 잔재인 걸.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만나?”
케이드의 말에 상대방은 난처한 웃음을 흘리면서 대꾸하다 아리스를 돌아보았다. 그가 튀어나왔을 때부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아리스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들고 있던 검을 뚝 떨어트렸다.
“아리스, 잘 지냈니?”
마라피네스가 이제는 장성한 제 아들을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아, 기억 속의 그 모습이었다. 메르티어스에게서 투영한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 진짜 마라피네스의 모습.
아리스는 차마 그 얼굴에 대고 사실은 잘 못 지냈다고, 힘들었다고 투정 부릴 수 없었다.
“나랑 비슷한 연유로 함께 있었어.”
케이드가 마라피네스의 옆구리를 쿡쿡 누르면서 그에게 뭐라도 말하라고 부추겼다.
“하…… 하하…….”
아리스가 웃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급작스러운 만남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한 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
“그래. 사실 네게 아버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상태가 맞는지 확신이 서질 않지만…… 마라피네스의 기억과 생각 대부분은 내게 남아 있으니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쁘긴 하구나.”
마라피네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페니드란이 아무리 뛰어난 마검이라 해도 이런 상황까지 전개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리스는 자신이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가 부모의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기엔 그사이 너무 커 버렸다. 그래서 그냥 웃었다. 아리스의 반응을 살피던 마라피네스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는 페니드란에 붙잡혀 있는 동안 파악했다. 그래, 어머니는 잘 있니?”
“그럭저럭이요.”
아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에게는 좋은 말만 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요.”
“그래.”
“죄송하고요.”
“그럴 필요 없다.”
마라피네스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네가 부채감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스럽긴 했지만, 그 상황에서는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어. 그러니 내가 미안하구나.”
부자의 인사는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어도 그 짧은 마디마디에 서로의 감정이 충분히 전달되었다. 고작 인사만 했을 뿐인데 마라피네스는 벌써 할 말이 떨어진 것 같았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케이드가 옆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걸로 끝? 거, 오랜만에 본 아버지와 아들인데 할 말이 더 있지는 않고?”
“원래 우리 부자 사이는 그렇게 말이 많은 관계가 아니다.”
“나랑 내 아들은 이렇게까지 삭막한 관계가 아니었는데. 5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정도는 물어봐도 되잖아.”
“혼자 알아서 잘하고 있는 녀석에게 말을 더 해 봤자 잔소리밖에 더 되겠나.”
케이드의 말에 마라피네스가 툴툴거렸다. 아리스는 그런 둘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아무래도 이 두 분은 5년 동안 이 안에서 제법 친해진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