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66화 (166/257)

166화.

파울로와 율비네는 제법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다만 아리스는 라우노가 헛소리한다며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내 몸에 있는 영소 중 마수의 영소도 일부 있다, 이 소리인 거지?”

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옆으로 저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마수의 영소만으로 네가 만들어진 건 아니잖아. 페이릭의 영소도 있지. 그래서 전부 마수의 영소로만 이루어진 라우노는 신성력 결계에 맥을 못 추었지만 너는 아니었잖아. 마수는 서리 여신을 꺼리지만, 페이릭은 아니지. 서리 여신의 신성력이 네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하지만 마수의 영소는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지.”

아리스가 그렇게 말하자 미레아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조금은 허탈해 보이는 얼굴로 혼잣말했다.

“그래서 라우노가 내게 그렇게 말했구나. 이 대륙을 부식 지역으로 만들자고. 정말 신이 되고 싶었던 거네, 그 사람은.”

“그 계획을 막을 방법이 있는 건가?”

지금까지 조용히 경청 중이던 견우가 물었다.

“황제를 막고 라우노를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리스의 말에 파울로 역시 동의했다.

“나는 세피로스가 연락 두절인 게 마음에 걸려.”

“라케드 님은 우리보고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하고 움직이라고 조언했어요. 세피로스가 없다고 마냥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요.”

미레아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였다.

“아리스,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은현의 말에 아리스가 자신의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 옆에는 견우가 함께 아리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견우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가문에서 지원을 조금이나마 해 주마.”

그 다정한 말에 아리스가 눈썹 끝을 늘어트리며 대답했다.

“저는 반쪽이 마수라고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그렇게 약속하시는 건데요.”

진이 아리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멍청이야! 우리가 너를 모르냐? 그리고 그 반쪽짜리 마수라는 표현은 그만둬! 지금까지 인간으로 살았으면 인간인 거지! 네가 결정하기 힘들다면 내가 하는 대로 따라와!”

그러더니 정강이를 붙잡고 구르는 아리스를 내버려 두고 내선 전화기를 이용해 발록을 다시 불러들였다. 발록이 들어오자 진이 말했다.

“우선 우리는 대령님께 협조하겠어요.”

“대령이 우리에게 협조하는 것이 아니고?”

진은 그딴 말을 하는 아리스의 정강이를 또 걷어차며 말을 이었다.

“텔라인은 이 땅이 마수 소굴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보나 마나 묻지 않아도 라우노를 막으실 거죠? 우리는 그것에 협조하겠어요.”

진이 제멋대로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다들 비슷한 생각이었다.

“너희를 신용하기엔 아직 모든 것을 납득한 것은 아니지만 용의 장로가 보증하는 이들이니…….”

발록은 그들을 굽어보며 말했다.

“용이 마수와 대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은 우리도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그 이상의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말이다.”

실제로 텔라인의 설립 멤버와 참모 총장은 용족이었다. 그리고 텔라인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후원인들도 용이었다. 텔라인 내에서는 새삼스럽지 않은 내용이었다.

“다음 지령이 내릴 때까지는 일단은 쉬시지요.”

발록은 그들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래로 포섭했다. 파울로만이 사랑하는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는 집에 가고 싶다고 웅얼거렸다.

“아리스.”

방을 나서며 은현이 아들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리고 여기저기 까지고 굳은살투성이인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낳은 것을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그 말에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러니 너도 이 삶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해.”

“네.”

아리스가 마주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는 실제로 보니 더 좋았다.

* * *

다른 일행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각자 방으로 향하는 길에 아리스가 세렌트를 가리키며 미레아에게 말했다.

“그 검에 이름을 지어 준 모양이네.”

“아, 응! 세렌트라고 해. 너는 대체 뭐야? 석 달 만에 마검을 만들어 낼 생각이었으면 미리 설명을 해 줬어야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세렌트구나. 좋은 이름이야. 개조도 좀 했구나.”

항의하는 미레아에게 아리스가 손을 내밀었다. 세렌트를 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미레아가 검을 풀어 그에게 쥐여 주자 세렌트가 해맑은 목소리로 아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 아빠, 안녕?

아리스는 검을 집어 던질 뻔했다.

“누가 너에게 아빠란 표현을 가르쳤지?”

졸지에 자식이 생긴 아리스가 세렌트에게 말을 하며 미레아를 노려보았다. 미레아는 찔끔한 얼굴로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나, 난 아니야! 세렌트 혼자 자기를 만든 사람이면 아빠냐고 그러고 있었단 말이야! 애당초 이 애가 가진 지식의 출처는 너잖아!”

― 나를 만든 사람이면 아빠 아니야?

세렌트의 말에 아리스는 복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페니드란은 한 번도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그냥 마력 공급자라고 말해 주면 안 돼? 결혼도 안 했는데 애 아빠 되기는 싫단 말이다.”

한탄하는 아리스에게 미레아는 차마 세렌트가 라일라를 엄마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실토할 수 없었다. 세렌트는 아리스와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는 검을 미레아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뭐, 세렌트에게 설명을 들었다면 알겠지만 네가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그건 이제 네 검이야.”

“진짜 내가 가져?”

“난 페니드란을 되찾았으니 되었어. 급하게 만드는 바람에 자아도 훨씬 어린애 같은 수준이고 페니드란의 하위 스펙 버전이 되었지만 쓸 만할 거야.”

세렌트가 하위 버전이면 몇 년이나 아리스의 마력을 먹은 페니드란은 얼마나 대단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미레아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그런데 넌 검 하나만 써도 괜찮아?”

“응, 괜찮아. 난 원래 검술은 가리지 않아서 검 하나만 있어도 잘 써.”

아리스는 속으로 괴물 같은 놈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미레아에게는 석 달 만에 마검을 만든 아리스 쪽이 더 괴물같이 느껴졌지만 그 생각들은 서로 속으로만 해서 알지 못했다.

“아, 빨리 침대에 누워 쉬고 싶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아리스의 말에 깨끗하게 씻었어도 아직은 수척한 그의 몰골을 보며 미레아는 혀를 끌끌 찼다.

“그래, 고생했어.”

“거기에 다들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어야 말이지. 정보가 전부 차단당한 상태로 6일이나 있었더니 별의별 생각이 다 나더라.”

아리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시오와 리비엘로 일은 유감이야.”

미레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꼽으라면 세대 차가 나는 세피로스와 파울로를 제외하곤 리비엘로와 시오가 첫 번째, 두 번째였다. 그런 둘을 한꺼번에 잃은 미레아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리스의 말에 또 감정이 북받쳤는지 미레아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그는 그저 위로하고 싶었던 것이지 미레아를 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 당황해서 허둥지둥거리자 미레아가 눈을 벅벅 문질러 닦은 후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 생각을 많이 했어. 너도 어떻게 될까 봐 무서웠어.”

미레아가 코를 훌쩍였다.

“6일 동안 잘 버텨 줘서 고마워.”

아리스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야 했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 쪽은 아리스였지 미레아 쪽이 아니었다.

“나도 다들 보고 싶었어.”

아리스는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특히 네가.”

그 말에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슬렀던 미레아는 이번엔 발이 꼬여 넘어질 뻔했다.

“나, 나는 왜?”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글쎄.”

아리스의 얼굴을 뜻밖에도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제법 진지했다.

“왜일까.”

아리스의 진득한 시선에 미레아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관자놀이께를 긁었다.

‘너 아리스 좋아하지?’

‘네가 지금 당황하는 의미의 좋아한다는 뜻이다.’

라케드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미레아는 이런 시기에 아리스와 이렇고 저렇고 한 감정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다. 여러모로 뒤숭숭한 시기였고 자신은 감정적인 소모를 여기저기 분산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특히, 아리스가 주는 것이 말이다.

차라리 아리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거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은 아주 간사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 버린 이상 자기도 모르게 기대라는 것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라일라를 떠올렸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라일라는 시오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맺든 후회는 남았을 것이라 했었다.

좋아하면 좋아한 대로, 싫어하면 싫어한 대로, 관심이 없었다면 관심이 없었던 대로…….

이럴 때일수록 감정에 충실해야 할 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어떤 것이 그나마 나은 선택인지 알 수 없었다.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 사이 둘은 어느새 배정된 방문 앞에 다다랐다.

“푹 쉬어.”

아리스가 손수 방문을 열어 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야말로 고마워.”

마지막 막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간지럽게 느껴졌다. 미레아는 방문이 닫히고 나서야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너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차라리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심장이 제멋대로 어수선하게 뛰었고 머릿속은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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