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그들이 달릴 때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아리스가 워프 게이트를 연 것은 그들의 발 바로 아래에 있던 황궁의 지하 수로였다. 반대편 좌표를 잡아 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게이트를 멀리까지 열 수 없었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 자체는 추적 할 수 있어도 이 미로 같은 곳 안에서는 움직임을 추적하기 까다로웠다.
그러니 이곳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이쪽 공간에 있는 게이트 좌표는 아리스가 황궁에 있던 시기에 비상용으로 한 번 사용해 본 적 있는 것이었다. 한 번 이용해 본 좌표는 다시 사용할 때 공간 워프 게이트를 열기 더 쉬워진다. 그래서 덕분에 마법을 전개한 후 빨리 열 수 있었다.
지형을 아는 아리스와 율비네를 선두에 두고 달리며 파울로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지금은 일단 이걸로 됐어! 아리스도 탈출시켰고 페니드란도 빼 왔고!”
“아니, 하나 아쉬운 게 있어요.”
아리스의 말에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를 죽였어야 했는데…… 생각해 보면 할수록 아까운데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안 돼요?”
낮게 뇌까리는 그의 말에 진이 아리스의 뒤통수를 퍽 때렸다.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네 목숨 하나도 건져 오기 힘들었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황제를 또 언제 만날 줄 알고? 이런 절호의 기회가 어디 있냐는 말이야!”
아리스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분개했다.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돼?”
아리스가 진에게 물었다.
“일단 루아드를 떠야지. 마이련으로 가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류가는 위치가 노출돼 있어서 라우노가 추적해 올 것 같아 포기했어.”
“용들의 성지는 이미 한 번 이용한 데다 라케드 님이 이번에야말로 다른 장로들에게조차 이동하는 위치를 알려 주시지 않을 작정인가 보더라고.”
미레아의 보충설명에 아리스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뭔가 6일 사이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 이야기를 도통 따라갈 수가 없어.”
“아무튼, 그래서 수소문해 보았는데 새벽 호로 가는 게 어떨까 싶어. 첼시와 발록 대령님이 며칠 정도는 괜찮다고 허락했거든.”
진의 말에 율비네와 아리스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텔라인은 아리스를 기껍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 덕에 율비네는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얼마 전에 연이 있기는 했으나 용케 허락해 주었네요.”
“라우노를 경계해야 하는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니까.”
그러는 사이 수로의 출구가 보였다. 황궁의 외각인지라 주변에 경비병은 없었다. 그들은 살금살금 움직여 미리 정해 놓은 지점으로 가서 류은현과 류견우, 류신우와 합류했다. 아리스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은현이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아리스는 그 품에 얌전히 안기면서 투덜거렸다.
“어머니! 여기 오시면 어떡해요?!”
“오랜만에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런 소리니?”
은현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 어려 있었다. 아리스는 오랜만에 보는 외숙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큰 외숙부님, 작은 외숙부님 오랜만입니다. 좋아 보이시네요.”
“나는 네 몰골을 보니 좋아 보인다는 말은 할 수 없구나.”
견우의 말대로 아리스의 긴 머리는 엉망진창으로 풀렸고 옷은 누더기로 변했다. 잘생긴 얼굴에는 땟국물이 줄줄 흘렀다. 그것은 파울로와 율비네도 다를 바 없었다.
“아, 나는 우리 마누라님 빨리 보고 싶은데 당분간 집에 가는 건 글렀네. 혹시 모르니 말이야. 나 수배 내려지는 거 아니야?”
파울로가 한탄조로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그런 파울로에게 미레아가 카스카디아의 안부를 전했다.
“카디 언니가 파울로 걱정은 별로 안 하던데.”
“우리 카디는 나를 너무 믿는 건지 무심한 건지 모르겠네.”
그들은 새벽 호가 있는 곳까지 육로로 이동했다. 류가의 비공정은 표적이 되기 쉬우니 새벽 호로 이동하는 것이 짧게나마 눈속임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치고 빠지는 신우와 사병들과는 달리 은현과 견우는 그들과 끝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새벽 호에 오르자 첼시가 무뚝뚝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이걸로 확실히 루아드와는 척을 지게 되었군요. 이 빚은 나중에 톡톡히 받아 내겠습니다.”
“라우노에 대한 정보를 넘기는 거로 봐주면 안 돼?”
진이 머쓱한 얼굴로 말하자 첼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과 이것은 별개입니다.”
“여전히 앞뒤 막혀 있기는.”
진이 투덜거리면서 첼시의 안내를 받아 발록에게 향했다. 발록 역시 팔짱을 끼고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빚은…….”
첼시와 똑같은 말이 나오려 하자 아리스가 성을 내었다.
“아, 알았어요! 알았다고! 나중에 배로 갚으면 되잖아요!”
발록이 다른 인원들이 생활하던 비공정의 4인실 방을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내주었다. 다들 연막탄을 뒤집어쓰거나 감옥에서 며칠씩 뒹굴거나 전투를 하고 지저분한 지하 수로에서 달린 바람에 몰골이 엉망이었다. 그들은 청결하게 씻고 휴식을 취하는 게 시급했다. 하지만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급한 대로 물만 끼얹는 것만 마친 그들은 발록의 호출에 그를 찾아갔다.
루아드로 오는 내내 미레아와 진은 라케드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텔라인에 알릴지 고민했다. 그들이 알기에는 너무 위험한 정보였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있자니 그것은 그것대로 위험했다. 전력이 하나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텔라인이 납득할 만한 정보로 그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회유해야 했다. 결국, 그들은 정보 일부만 사실대로 말하는 쪽을 선택했다.
텔라인에서는 이미 마수와 데르카이드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피로스가 라우노 듀랜트에 관한 정보를 이미 흘리기도 했다. 어차피 그들도 알게 될 진실이라면 시간을 끌 이유가 없다는 견우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텔라인이 아리스를 빼 오는 것에 협조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마수 부대이기 때문에 라우노의 속셈을 알아차린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루아드와 척을 지게 되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들에게 정치 문제는 마수를 대항하는 것보다 후순위였다. 물론 하루 안에 텔라인에게 루아드와 척을 지는 위험 부담을 갖는 일을 하자고 설득하는 것은 제법 애를 먹었다. 용의 장로인 라케드의 보증이 없었다면 아마 일이 풀리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발록은 위엄 있는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내게 말한 정보를 루데키아스가 알고 있는지 궁금하군.”
아리스는 발록의 시선에 위축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을 돌아보았다. 진의 표정이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아리스는 아직 몰라요…….”
그 말에 발록이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를 불러 주었으면 좋겠군요. 그가 받아들일 시간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러더니 아리스와 그 일행들만 남겨 두고 방을 나갔다. 라우노에게 붙잡혀 갔었던 세 사람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른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해요. 6일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조금 어두워 보이기까지 하는 미레아의 말에 다른 일행들이 각자 의자를 찾아 앉았다. 아리스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누가 죽었어?”
그 말에 진과 미레아의 입매가 굳었고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바 없는 파울로와 율비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그게 그러니까…….”
미레아가 머뭇거리자 진이 대신 말했다.
“시오가 전사하고 리비엘로가 살해당했어. 참고로 세피로스 회장은 무슨 일이 있는지 지금 연락 두절이야.”
그 단순한 말에 파울로는 한숨을 푹 내쉬며 행간을 읽어 내었다.
“어쩌다? 누구에게?”
전자는 시오의 상황을 물은 것이고 후자는 리비엘로를 살해한 범인을 묻는 것이었다.
“시오는…… 라케드 님이랑 고모님이 있는 곳으로 나와 미레아와 함께 피신했는데 그곳으로 라우노의 부하가 추적해서…… 그 금색 날개를 가진 데르카이드 말이야. 그자가 우리를 따라왔는데 그 전투에서 전사했어.”
미레아가 입술을 달싹이자 진이 대신 말해 주었다. 그 말에 물꼬를 튼 미레아가 진의 말을 받아 마저 설명했다.
“그리고, 리비엘로는…… 그때 록산으로 피한 건 맞지만 무슨 일인인지는 몰라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어요. 범인은 아직…….”
미레아는 말하는 중간중간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을 완성 지었다. 그 이상으로 설명하는 것은 괴로웠다. 아리스는 손깍지를 끼고 입을 가렸고 파울로는 착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하지만 시오는 그렇다 치고 리비엘로는 왜……? 록산까지 무사히 도착했잖아요?”
율비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단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식을 전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울로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말이지…… 세피로스가 우리를 버렸어.”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찌푸렸다.
“네?”
“그때 전투에서, 우리가 붙잡히기 전에 갑자기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어.”
“말도 안 돼!”
미레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피로스가 다른 사람들을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도망갔을 리 없잖아!”
미레아가 반발하는 것이 당연했다. 처음에는 파울로 역시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으니 말이다. 미안하다니, 대체 무엇이 미안하단 소리인가. 자신들을 버리고 간 것? 그런 것들을 생각하자 파울로의 반듯한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그때 분위기만 보면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는 사람 같지는 않았어. 도망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봤을 때는 자리를 피했다는 쪽이 더 맞을 것 같아.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단 말이지.”
“이유가 있겠지. 우리와 연락 두절인 것도 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미레아가 애써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중얼거렸다.
“아무튼, 지금은 그런 상황이야.”
서로 정보를 교환했지만, 상황이 명쾌하게 해명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복잡하게 얽혀 버렸다.
“그래서, 그것 말고 우리에게 알려 줄 게 뭐야?”
미레아와 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라케드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은 미레아가 나서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인간과 용이 어디서 왔는지, 용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데르카이드란 무엇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