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64화 (164/257)

164화.

진의 말에 아리스가 목소리를 낮춰 그들을 일갈했다.

“누나의 아버지면 큰 외숙부? 외숙부가 여기 왜……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머니는 왜 모시고 왔어?! 검에서 손을 놓은 지 몇 년은 되셨단 말이야! 이 멍청이들 같으니! 라우노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고작 넷이 오면 어떡해? 라우노와 정면으로 승부를 겨뤄서 대체 어떻게 하려고?”

아리스의 말에 진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누가 정면 승부한다고 그랬어?”

그때, 실내에서 강풍이 불더니 연막이 걷혔다. 라우노가 마법으로 바람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덕분에 다시 모습이 노출된 그들에게 총탄이 날아오는 그 순간이었다.

“엎드려!”

창밖을 확인한 진이 귀를 막고 몸을 숙이며 외쳤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굉음이 났다.

쾅!

무언가가 떨어져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건물이 울렸다. 창문 유리가 깨지면서 이미 한 번 파손된 알현실 천장에서 자잘한 잔해들이 떨어져 내렸다. 경비대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포, 포격이다!”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황궁이 포격 받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포격이 아니었다. 창밖으로 금색 빛이 번쩍이더니 공기가 우웅 하며 울렸다. 라우노가 구역감에 입을 틀어막고 황급히 물러났다.

“신성력……!”

“역시!”

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놈이 마수와 영소가 비슷하다면 신성력에 반응할 줄 알았지!”

놀랍게도 황궁의 정원 한가운데 떨어진 것은 텔라인에서 만든 신성력 결계였다. 델루카 밖에서 구름 속에 은신하고 있던 텔라인의 새벽 호에서는 첼시와 발록이 신성력 기둥이 제대로 낙하해 신성력을 내뿜는 것을 확인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들을 끌어들인 것은 진의 깜찍한 소행이었다. 새벽 호가 황제에게 클라인과 관련된 일을 보고하기 위해 델루카 근처에 와 있다는 것을 첼시가 진에게 연락해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델루카에 들어오기 전에 새벽 호에 협조를 부탁했다. 처음에는 거절당할 줄 알았으나 뜻밖에도 새벽 호는 흔쾌히 협조를 약속했다.

텔라인은 철저하게 중립적인 대마수 부대이기 때문에 새벽 호가 대단한 일을 벌일 수는 없었어도 라우노의 일이라면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원 정도는 돕겠다고 진에게 언질을 주었다.

그런 연유로 진이 라우노가 자신들의 존재를 깨달은 것을 알자마자 미리 설치해 둔 신호를 새벽 호로 보내 신성력 기둥을 발사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남의 나라 황궁에 대고 신성력 기둥을 쏴 대는 것의 파장은 클 테지만 새벽 호는 루아드 황실에서 보내는 항의 표시를 무시할 의사가 있었다.

신성력 결계는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 라우노는 밀려오는 불쾌감에 무릎을 꺾었다. 신성력으로 죽거나 치명타를 입지는 않았어도 이 정도의 고농도 신성력에 노출되는 것은 그의 정신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마수가 신성력을 꺼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라우노는 꼴사납게 남들 앞에서 토하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틈을 노리고 넷은 아리스를 질질 끌고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구속구를 완전히 풀 수는 없어도 아리스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쇠사슬은 풀어낼 수 있었기에 아리스는 처음엔 비틀거리긴 했지만 금방 제 발로 달릴 수 있었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라우노는 왜 신성력 결계에 반응하는 거고?”

아리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에게 물었다.

“그건 라우노가 데르카이드 중에서도 마수의 영소가 강한 상태라 그런 걸 거야.”

“나는? 나도 데르카이드인데 난 멀쩡하잖아.”

심지어 아리스는 신성력이 담긴 성수를 생수처럼 벌컥벌컥 마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도 몸에 별다른 이상 징후를 겪지 않았다.

“아마 네게 있는 페이릭의 영소 덕분일 거야. 마수의 기운보다 페이릭의 영소가 더 영향력을 끼치는 상태라면 신성력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페이릭과 서리 여신은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반면, 라우노 듀랜트에게는 이제 페이릭의 영소가 없어. 그에게는 마수의 영소만 남아 있으니 다른 데르카이드보다 마수에 더 근접한 존재라면 신성력은 분명 꺼림칙할 테지. 그래서 시험 삼아 쏴 봤는데, 저게 되네. 크, 나 완전 천재 아니냐?”

“아아, 머리 아파. 아까 라우노도 마수의 영소니, 페이릭의 영소니 하는 소리를 지껄였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네.”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지금은 우선 뛰어.”

류진이 황색 연기가 나는 신호탄을 창밖으로 던졌다. 황궁 곳곳에서 경비대들과 대치 중인 그녀의 아버지와 사병들에게 보내는 퇴각 신호였다. 아리스는 황궁 밖으로 도주하려는 일행들을 붙잡았다.

“페니드란을 가져가야 해! 그냥 두었다가는 라우노가 페니드란으로 무슨 일을 꾸밀지 몰라!”

“어디 있는 줄 알아?”

“대충은요.”

파울로의 질문에 아리스는 앞서 달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들의 뒤로 경비원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들은 경비원들을 제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생각 보다 할 만한데?”

진이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아리스와 율비네가 경비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알고 여러 통로를 꿰고 있으니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아리스는 황궁의 심층부로 향했다. 그리고 황실의 역사적인 유물들을 한데 모아 두는 방을 지나 그 안쪽에 있는 비밀 금고 앞까지 도달했다.

파울로와 율비네, 그리고 아리스가 감옥에서 차고 있던 구속구처럼 마법과 물리적인 장치로 잠겨 있는 그 금고는 평소의 아리스라면 무리 없이 열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리스의 마력이 제한된 상태다 보니 열쇠가 없는 상태에서 열기란 상당히 골치가 아팠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것을 손쉽게 해결했다.

“페니드란!”

아리스의 부름에 금고 안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일행들이 한발 뒤로 물러나자 다시 쿵쿵거리는 소리가 몇 번 연달아 울렸다. 그리고 벽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지나자 페니드란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을 뚫고 나왔다. 벽에서 돌가루가 부스러져 땅에 떨어졌다. 아리스는 페니드란을 재빨리 집어 들고 몸을 돌렸다.

“가자!”

그들은 금고가 있는 곳을 나오자마자 건너편 방에서부터 터져 나온 폭발에 휘말렸다. 그 충격에 다들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데 라우노가 분노한 얼굴로 방 몇 개를 건너 날아오고 있었다.

“쥐새끼들이 별 같잖은 수작을…….”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잃은 그의 손에는 붉은 스파크가 일고 있었다.

“그와 붙지 마! 도망가!”

파울로의 말에 일행들은 몸을 일으켜 열심히 달렸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했다. 라우노가 공간 전이를 통해 그들 앞을 막아섰다. 그는 여전히 신성력 때문에 고통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어도 마법을 사용하는 데는 크게 제약을 받지 않는 듯싶었다. 반면 아리스는 여전히 구속구를 차고 있는 상태였다.

마법을 부리는 라우노를 상대로 일행들이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는데 아리스가 페니드란을 빼 들고 라우노에게 달려들었다.

“아리스! 붙지 말라는 말 못 들었습니까!”

율비네가 혀를 차며 기관총으로 견제 사격에 들어갔다. 그러든 말든 라우노는 기다렸단 듯 마법을 전개했다. 그런데 아리스는 라우노에게 달려들다 말고 그가 만들어 낸 술식에 자신의 손을 쑥 집어넣었다. 라우노의 마력에 반응한 구속구는 아리스가 조금 힘을 주자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저절로 풀렸다.

“고마워!”

아리스가 생긋 웃으면서 자유가 된 오른쪽 손목을 문질렀다. 비록 사지에 매달린 구속구 네 개 중 하나만 풀렸지만, 아리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네 개의 구속구를 이루고 있던 힘에 불균형이 생기자 나머지 구속구들은 아리스의 마력에 절로 풀렸다. 그 광경에 라우노의 표정이 구겨졌다.

자유의 몸이 된 아리스는 페니드란을 들어 땅에 내리꽂았다. 그러자 아리스와 일행들이 밟고 있던 바닥이 훅 꺼졌다. 아리스가 그들의 발 바로 아래에 워프 게이트를 만든 것이었다. 떨어져 내리는 일행들을 확인한 아리스가 라우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이만!”

그리고 자신도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라우노가 그들을 쫓으려 했지만 바로 게이트가 닫혀 버렸다. 게이트가 열리면서 공간에 남긴 마력을 추적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사이 아리스와 일행들은 추적을 피해 멀리 피신해 있을 것이 뻔했다.

라우노는 분노에 차서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신성력을 견디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런 굴욕을 느낀 것은 4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흑익……! 감히……!”

그는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저 쥐새끼들은 다음에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 * *

“아하하하!”

미레아가 반쯤 정신 나간 얼굴로 웃으면서 달리자 진이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드디어 미친 거야?”

“성공했다! 성공했다고! 별다른 준비도 없이 황궁에 침입해서 아리스를 빼 오는 데 성공했어! 솔직히 죽는 줄 알았는데 허세 부리고 있었거든!”

“사실 저도 반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미레아의 환호성에 율비네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가빠 오는 숨에 헐떡거리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백업 인원이 있다 해도 고작 4명이 오면 어떡하냐고! 라우노를 상대하려면 하다못해 다른 전력은 있었어야지!”

아리스의 타박에 진이 고개를 저었다.

“밖에서 우리 아버지가 열심히 시선을 끄는 중일 거야. 그 이상은 움직이기도 힘들고 추적하는 사람들을 상대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어떡하냐.”

“그나저나 어머니와 큰 외숙께서는 여기 왜 오신 거야?”

“왜 오시긴! 너 구하러 오셨지! 원래는 할아버지가 오시겠다고 난리를 피우셨는데…….”

“아…… 할아버지…….”

아리스는 달리면서 이마를 감쌌다.

“외손자 걱정에 밤에 잠을 못 이루셨단다.”

“내 걱정보다는 황제에게 무시당한 게 분하시겠지. 그 성격에…….”

진은 구태여 말을 보태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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