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메르티어스가 손짓하자 아리스를 구속한 쇠사슬을 쥐고 있던 교도관이 쇠사슬을 거칠게 끌어당겨 아리스를 엎어트렸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아리스는 그대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수치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메르티어스를 노려보기 바빴다. 그 매서운 눈빛에 메르티어스는 질린 기색을 내비쳤다.
“역시 바로 죽였어야 했어…….”
메르티어스의 말에 누군가가 대답하며 등장했다.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폐하.”
상당히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아리스는 그 가식적인 어투에 환멸을 느꼈다. 정장을 갖춰 입은 라우노가 고수머리를 깔끔하게 하나로 묶고 방에 들어왔다. 그는 부식 지역 안에서 보았을 때와는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라우노는 그때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아리스는 사람을 깔보는 기색이 내면에 깔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잘 구슬려 보셨어야지요.”
라우노가 감히 메르티어스에게 혀를 쯧쯧 찼다.
“대체 무엇을 구슬리란 소리인가? 저것은 불길한 것이다! 저것이 내 말을 들을 리 없잖은가. 하루빨리 없애 버리고자 했지만 반대한 것은 그대 아니던가!”
“그런 식으로 나오시면 저는 힘을 빌려드릴 수 없습니다.”
라우노가 메르티어스를 달래 주자 그는 마지못해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 꼴을 본 아리스가 또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것? 나보고 저거엇? 이젠 인간 취급도 안 해 주네. 아, 생각해 보니까 받은 적이 별로 없었구나? 그러면서 라우노의 말은 또 고분고분 들어 주네. 저 사람 정체를 알기나 해?”
메르티어스가 그 말에 반응을 보이기 전에 라우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 루데키아스.”
라우노가 그를 다정하게 부르자 아리스는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안 해.”
“저 아직 아무 소리도 안 했는데요?”
“어차피 네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거절할 생각인데, 들을 가치가 없지.”
“흠…….”
그 말에도 라우노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아리스는 라우노를 내버려 두고 메르티어스에게 물었다.
“이봐, 황제 폐하. 라우노를 왜 옆에 둔 거지? 둘 사이의 거래 조건이 대체 뭐야?”
“네가 알 바 아니다.”
“라우노의 계획이 뭔지는 알고 있어?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슨 생각인지나 알고 있냐고!”
아리스의 말에 메르티어스는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그가 연신 눈동자를 굴려 대는 통에 아리스와 시선을 마주치는 시간이 짧았다. 아리스는 어떤 위화감을 깨달았다.
지금 메르티어스는 약한 정신 속박에 걸려 있었다. 일종의 최면술과 같은 것이다. 아리스는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메르티어스가 왜 갑자기 자신과 아버지를 죽이려 그랬는지, 옆에서 속살거리는 라우노의 말에 넘어간 건지 말이다.
이미 5년 전, 메르티어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이란 감정은 빈틈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라우노는 그 빈틈을 노렸다. 그것을 크게 만드는 것은 라우노에겐 일도 아니었다. 마력을 조금 불어넣어 마음속 감정을 증폭시켜 주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감정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었다.
아리스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라우노는 엎어져 있는 아리스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였다.
“당신에게도 썩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싫어하지 않나요?”
“…….”
아리스는 침묵으로 답했다. 라우노는 아리스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세상이 밉지 않던가요? 증오스럽지 않던가요? 당신의 모든 것을 앗아 갔는데?”
아리스의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것을 본 라우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둘의 대화가 길어지자 메르티어스가 뒤에서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데키아스를 죽이기로 했으면서 왜 어서 실행하지 않는 건가?”
“벌써 죽이기는 아까우니까요. 그의 이용 가치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라우노는 고개를 저었다.
“감히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말을 듣지 않는 속국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훌륭한 병기니까요. 아시지 않습니까?”
“나를 병기 취급하지 마.”
아리스가 으르렁거리는 것을 가볍게 무시한 라우노가 말을 이었다.
“페니드란을 다룰 수 있는 건 루데키아스밖에 없습니다.”
아리스는 그 말을 듣고 라우노가 페니드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감금된 이후 페니드란은 압수당해서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혹여나 메르티어스의 수중에 떨어져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페니드란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라우노의 마력은 아리스의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가 반강제적으로 페니드란을 다루게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페니드란으로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야?”
라우노는 아리스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메르티어스에게 몸을 돌렸다.
“제가 루데키아스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는 이상 폐하께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라우노의 말에 메르티어스는 흔들리는 눈으로 아리스와 라우노를 번갈아 가며 보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우노에게 고분고분한 메르티어스를 보고 있자니 아리스는 기분이 이상했다. 메르티어스는 권력욕이 있기는 했지만 원래 저 정도까지 생각 없는 사람이 아니었고 제법 총명한 사람이었다. 저런 썩은 생선 눈깔을 가진 메르티어스는 낯설었다.
메르티어스가 알현실을 나가자 라우노는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물렸다. 병사까지 말이다. 둘만 남자 라우노가 더 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과 당신 동료들이 석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정말 많은 일을 벌였지만, 결국을 다 제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혹시 궁금한 점이라도 있나요? 뭐든지 물어보세요. 당신에게는 숨기지 않습니다.”
“왜?”
“저는 당신이 저와 손을 잡아 주었으면 하거든요.”
“어이가 없군.”
“진심입니다.”
“이유가 뭐지?”
“루데키아스 당신이라면 저와 함께 이 세상을 이상적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는 그만하고. 말이 나온 김에 묻겠는데 티몬에서 살아 있는 용의 용주를 그곳의 사제에게 준 것도 당신이지?”
“네.”
라우노는 선선히 시인했다.
“살아 있는 용에게서 분리한 용주의 힘을 시험해 볼 만한 기회가 필요했거든요. 다소 불안정한 면이 있긴 했지만 5년간 잘 이용했지요. 다만, 용의 잔류 사념이 너무 강한 마석은 쓰기 곤란하단 결론이 났지만 그건 그것대로 수확이 있었습니다.”
“왼쪽 눈이 있던 자리의 마석과 연결된 하얀 괴물을 만든 건?”
“티몬에서 시행한 일들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제 수족입니다. 뭐라 불러도 좋지만 저는 인형 군단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혼자 움직이는지라 한계가 있거든요. 인간은 시각 정보에 많이 의지하는 동물이라 가장 신경이 예민한 안구에 마석을 이식하면 효율이 올라가 그런 인형이 만들어집니다. 원래는 살아 있는 용의 용주를 이용해 새로운 용을 만들고 싶었는데 인간의 몸으로는 그게 한계더군요. 부식 지역 안에서 보셨겠지만 제가 얼추 용을 흉내 낸 것을 만든 일은 가능했지만 인간들은 불가능했습니다. 먼 옛날, 인간을 바탕으로 용을 만들어 낸 건 가능했는데 저는 왜 잘 안 되는지 아직 모르겠더군요. 옛 인류의 잃어버린 기술은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미친놈.
라우노의 말을 들은 아리스가 뇌까렸다. 용의 성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는 아리스는 라우노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실험을 한 것이 아니란 것은 잘 알 것 같았다.
“당신이 무슨 말로 황제를 꼬여 냈는지 알 것 같아. 그 인형 군단인가 뭔가로 힘을 주겠다 했겠지.”
아리스의 말이 정답이었는지 라우노가 손뼉을 쳐 주었다.
“당신은 황제를 잘 아는군요. 막강한 전력을 탐내기에 인형 군단을 주겠다 했지요.”
“물론 거짓말이었겠지.”
라우노가 의뭉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은 마수를 부릴 수 있지 않아?”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을까요?”
“내가 마수를 불러온 것이 가능했다면 당신은 마수를 부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추측한 거야.”
“제법 똑똑하군요. 네, 마수를 어느 정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인형 군단이 필요한 거지?”
“마수는 식량이 되는 영소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어요. 행동에 제약이 있지요. 하지만 인형 군단은 달라요. 물론 식욕은 있습니다만 그건 욕구 중 하나일 뿐이지 생명 활동에 필수 불가결한 조건은 아니거든요. 마수와는 달리 영소를 먹지 않아도 부식 지역 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이 인형 군단입니다. 그런 이유로 마수보다는 데르카이드 쪽이 훨씬 이용하기 편하니까요. 신성력 결계에도 반응하지 않고, 여러 제약에서 벗어나지요. 마수와 비교했을 때 데르카이드의 힘은 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가진 의지란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거든요. 물론 인형 군단은 마수에 비하면 자신의 의지는 없지만 제 의지에 반응해서 움직입니다. 무엇보다 마수를 움직이면 텔라인의 감시에 걸렸겠지요.”
“미친놈. 고작 그런 이유로…….”
아리스가 얼굴을 구겼지만, 라우노는 손을 까닥거리며 더 질문해 보라는 듯 아리스를 도발했다.
“그럼 일전에 우리가 만났을 때 마석을 요구한 건?”
“아, 그때 마석이 필요했다고 한 건 진심입니다. 요즘 마석을 공급하는 게 어려워졌거든요. 마석이 하나라도 아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용들의 성지를 발견했을 때는 기뻤는데…… 당신의 동료들 덕분에 그것도 물거품 되었지요. 여러모로 피해가 컸답니다. 인형 군단도 다수 잃고 당신의 동료들이 제 충직한 부하를 죽였어요.”
하지만 라우노의 표정에서 슬픔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가식적인 얼굴에 아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잘됐군.”
“어차피 쓰다 버릴 패였긴 하나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저를 이해해 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아리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려 그랬지만 라우노가 덧붙인 말에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제 부하가 당신의 동료 한 명을 저승길 동무로 삼는 것에는 성공한 모양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