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미레아가 고개를 들어 라일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가벼운 목소리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날은 혼자 있으면 기분이 안 좋으니까.”
라일라는 그제야 쓴웃음 같은 것을 지었다.
“……그래.”
“아, 그럼 나도.”
진이 끼어들었다. 셋이라면 바이크의 정원 초과였던 탓에 그들은 협회 지급용 지프를 타고 해안 도로를 달렸다. 어느 봄날 아리스와 함께 달렸던 그 길이었다.
미레아의 집에 도착한 셋은 대충 짐을 풀어 두고 어색하게 해안을 바라보며 앉았다. 날이 늦었지만 셋은 마음이 뒤숭숭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는 내일 루아드 제국으로 출발할 거야. 대답이 어떻게 나오든 인근에서 대기하는 쪽이 빨리 손을 쓰기 쉬우니까.”
진이 라일라에게 계획을 알려 주었다. 자신과 미레아는 일찍 일어나야 하니 괜찮으면 신경 쓰지 말고 늦잠을 자다 가란 소리였다. 하지만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으로 마도 기구 조율 정도는 내가 해 줄게요.”
그러더니 셋은 또 한동안 대화 없이 멀거니 앉아 있었다. 조용한 밤공기를 타고 바다에서 파도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이번에도 침묵을 깬 것은 라일라였다.
“혹시…… 시오가…… 유언이라도 남겼어?”
그 말에 미레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미레아는 한참을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라일라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그랬어.”
“뭐야, 그게.”
라일라가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돈 갚아야 하는데…….”
그 말에 진과 미레아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미레아는 주저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그 말에 미레아가 대답하려 했지만, 라일라가 먼저 선수 쳤다.
“나랑 걔랑 무슨 사이라고.”
어쩐지 그 말에 라일라 대신 미레아가 상처받는 느낌이었다. 라일라는 한 번 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걔랑 무슨 사이라고…….”
그저 함께 어울리던 친한 친구였을 뿐 그 이상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서로의 속마음을 이야기한 적도 없었고, 미레아를 끼고 셋이서 놀러 다니던 것이 다였다. 딱 그 정도의 관계였으니 딱 그 정도의 슬픔이면 충분했다. 충분했어야 했다. 하지만 라일라의 가슴에는 메울 수 없는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얼굴에서 손을 뗀 라일라는 어딘가 공허한 눈으로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내 심장에서 많은 것들을 가져갈 거면 돈을 꾸어 주지 말던가.”
라일라는 울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시오의 바람대로 손에 얼굴을 묻고 있을 때 아주 조금만 눈물을 흘렸다. 손바닥에 흔적이 간신히 남을 정도의 양이었다. 눈물이 묻은 손바닥은 주먹을 쥐어 다른 이들에게 숨겼다.
시오를 좋아하지 말 걸 그랬다. 아니다. 지금보다 더 좋아해 줄 걸 그랬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가 아니라 시오에게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전달했으면 그도 기뻐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가정들은 이제 부질없었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었다. 모든 가정을 부질없게 만드는 절대 불멸의 과정.
이후 셋은 한 침대에 모여 어미를 잃은 새끼 짐승처럼 서로에게 기대고 나서야 겨우 잠들었다.
* * *
동이 트기도 전에 일찍 일어난 미레아는 정원에서 꽃을 꺾었다. 리비엘로의 관을 묻을 때 함께 넣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 계절의 정원에는 수국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그것을 중심으로 여름이 제철인 꽃들이 정원 가득 소담하게 피웠다.
뚝, 뚝. 가위로 꽃줄기를 꺾으며 생각에 잠긴 미레아의 품에는 이미 묵직하게 꽃다발이 만들어져 있었다.
시오가 죽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키다가.
리비엘로도 죽었다. 살해 동기도 범인의 얼굴도 모른다.
아리스는 붙잡혀 갔다. 이대로라면 메르티어스 황제와 라우노의 손에 죽을지도 몰랐다.
아무도 죽지 않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을 원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모두를 구하고 싶었다. 미레아는 그것이 항상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열심히 하면 틀림없이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자신은 아무도 구할 수 없는 것일까. 머릿속으로 그려 왔던 행복한 결말은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치기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5년 전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성장했다고 믿고 싶었는데 사실은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레아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과거의 자신은 분명히 실수했고, 어리석었고, 미숙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모두를 구원하겠다고 그랬으면서 그럴 만한 상황은커녕 실력도 없었고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저 덮어 놓고 노력만 하면 잘될 줄 알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미레아의 생각부터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을 외면해선 안 되었다. 그것이 자신의 패착이었다.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을 알면서 노력하느냐 모르고 노력하느냐의 차이점은 상당히 컸다.
자신은 만능이 아니었다.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혼자서는 전부 짊어지겠다는 생각으로 욕심부렸다가는 손에 쥐고 있던 것조차 잃기 십상이었다.
미레아는 또 생각했다.
그렇다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가?
절대 아니다.
기적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나타나고, 희망은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끝이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끝이란 게 없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리비엘로가 알려 준 것이었다.
5년 전 마수 대습격 사건으로 시작된 미레아의 길은 지금까지 이어져 그녀가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만약 그때의 일이 없었더라면, 미레아에겐 지금과 같은 힘이 없었을 것이다. 한때는 끝이라 여겼던 것은 사실은 시작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시작.
시오의 죽음도 끝이 아니었다. 그것을 끝으로 만들 수 없었다. 반드시 그의 죽음이란 것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미래로 이어야만 했다. 그래,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어떤 이야기는 죽음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시오의 죽음은 복수로 갚아 주자. 리비엘로의 죽음은 진실을 알아내자. 아직은 방법이 있을 터였다. 라우노 듀랜트. 우선 영웅이라 칭송받던 백익 니콜라우스의 이름을 스스로 버린 그를 막아야 했다.
한창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라일라가 불렀다.
“미레아! 손님이 있어.”
미레아가 손에 묻은 흙을 털며 대문 쪽을 돌아보자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미레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미레아는 또 울컥했다. 짙은 푸른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카스카디아가 양 눈을 전부 가리는 눈가리개를 하고 지팡이로 땅을 더듬으며 걸어왔다.
“카디 언니…….”
미레아가 부르자 카스카디아가 살짝 웃었다. 그녀는 눈을 잃었을 때 흉이 짙게 남아 그것을 가리기 위해 눈가리개를 하고 다녔다. 하지만 움직임은 눈가리개를 한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 할 정도로 거침없었다.
원래 전투부 요원이었던 과거 덕분에 오감이 발달한 사람이었기에 사소한 자극만으로도 주변 환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카스카디아는 라일라의 부축을 마다하며 제법 능숙한 동작으로 미레아의 앞까지 걸어왔다. 미레아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미안해, 파울로가…….”
“너 괜찮니?”
카스카디아는 붙잡혀 간 남편보다 눈앞에 있는 미레아를 먼저 걱정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미레아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세상에, 피부가 다 상한 것 봐. 어제 다 전해 들었어. 일단 파울로 걱정은 하지 마. 그 인간은 뭘 해도 살아 돌아올 거야. 라슈발렌 소속이잖아. 파울로의 소속이 어디인지 다 아는 상태에서는 황제도 그이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없거든. 그리고 설령 그의 처우에 대해 끔찍한 명령을 내린다 해도 탈출할 거야. 파울로는 네 생각보다 강해. 그건 내가 보장해.”
카스카디아의 확신에 미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카스카디아가 했던 질문에 답했다.
“나 괜찮아.”
“그래.”
그 말에 카스카디아는 더 묻지 않고 씩씩하게 웃었다.
“나 대신 우리 집 화상 꼭 데려와.”
“응.”
미레아의 대답에 카스카디아가 양팔을 벌렸다. 미레아는 그 품에 들어가 카스카디아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미레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지금까지 잘해 왔어.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마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응. 앞으로도 무사하길 바라.”
그러더니 카스카디아는 미레아의 등을 퍽 때렸다.
“이 말 하러 온 거야. 그럼, 나 간다.”
“응? 이 말만 하고 바로 간다고?”
미레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자 카스카디아는 손을 내저었다.
“바쁜 사람 붙잡고 있으면 안 되지. 빨리 우리 남편이나 구해 와.”
그러더니 정말로 몸을 돌렸다. 멍하니 서 있는 미레아를 뒤로하고 라일라가 카스카디아를 부축하기 위해 옆을 졸졸 따랐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역시나 거침없었다. 미레아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카스카디아를 배웅하기 위해 뒤쫓던 라일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걸로 되겠어요?”
“응.”
카스카디아는 걱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어. 미레아는 괜찮을 거야. 내가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다른 감은 뛰어나거든.”
하지만 라일라는 확신이 없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카스카디아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미레아는 쉽게 꺾이는 아이가 아니야.”
카스카디아가 트램을 타고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라일라가 다시 돌아왔을 때 미레아는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품 안 가득 꺾은 꽃을 모양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날은 맑았지만 바람이 불어 오늘은 파도가 거셌다.
철썩, 쏴아아…….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미레아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자, 나아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