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56화 (156/257)

156화.

‘엄마 같아.’

자신의 보호자를 자처한 세피로스와 파울로에게서는 받을 수 없던 것을 받은 기분이었다. 미레아는 은현의 부축을 받으며 병실로 돌아갔다.

“내일이면 비공정과 함께 마이련에 가 있던 진이 올 거예요. 그때 함께 행동하도록 해요.”

미레아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는 은현의 손길 따라 미레아는 고분고분 침대에 누웠다.

“진도 몸이 말이 아니지만…… 그 애도 말한다고 듣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그러면서 은현은 후후 웃었다.

“제 식구들은 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사람들만 있을까 싶다니까요.”

은현은 미레아의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하였다. 아까보단 떨어지긴 했지만, 아직 미열이 남은 것 같아 간호사를 호출하여 해열제를 달라고 말을 전했다. 사실 내일 비공정으로 록산에 돌아갈 수 있다는 말만 하러 온 것으로 은현의 용무는 다 끝났어도 그녀는 바로 가지 않고 미레아의 옆에 있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야기도 해 주고 반대로 미레아의 이야기도 들어 주었다.

“리비엘로는 제가 12년 동안 알고 지낸 소꿉친구예요.”

미레아는 아직도 열에 들뜬 얼굴로 말했다.

“죽었을 리 없어요. 그렇지요? 뭔가 전달이 잘못된 것이겠죠?”

그렇게 믿고 싶었기에 미레아는 이 이상 우는 것은 뒤로 미뤄 두기로 했다. 대신 은현의 말대로 체력을 비축하기로 했다. 만약 지금 미레아가 혼자였다면 아마 울면서 록산으로 가겠다고 떼를 쓰다 쓰러졌을 것이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옆에서 잡아 주는 은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뭐가 되었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겠어요.”

미레아는 연신 그렇게 되뇌며 식사로 배급받은 닭 다리를 뜯었다. 체력을 회복하는 데엔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 것은 미레아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은현이 포장해 온 음식들을 미레아는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었다. 자꾸 나오려는 눈물 역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그렇게 길게만 느껴진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 *

아이나 지부에 있는 착륙장에 검푸른 색 중형 비공정이 착륙했다. 선두로 폴짝 뛰어내린 것은 혈색이 밝아진 류진이었다.

“고모님!”

그 뒤를 따라 중년의 남성 둘이 비공정에서 내렸다. 류은현은 자신의 오라버니와 남동생인 류견우와 류신우를 소개했다. 류진은 그 둘 중 류견우의 큰딸이었다.

“그런데 두 분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어요. 아이들을 보내시지 않고요.”

은현의 말에 견우가 질린 얼굴로 대꾸했다.

“말도 마라. 아버지가 직접 오시겠다고 한 것을 온 집안 식구들이 나서 뜯어말린 대신 우리가 온 거니까.”

점점 일이 커졌지만 애초에 아리스가 끌려간 시점에서 가문 싸움으로 번질 정도의 큰일이긴 했다. 아리스의 외할아버지인 류광준은 그의 소식을 전해 듣고 메르티어스가 아무리 자신들을 우습게 알아도 정도가 있는 것이라며 펄펄 날뛰었다.

아리스는 루아드 제국의 황족이기도 했지만, 마이련의 세력가이자 무신으로 이름을 날린 류가의 가주인 류광준의 외손주였다. 그런 아리스를 이런 식으로 끌고 간 것은 황제가 자신의 가문을 무시한 결과라 여겼다.

그러니 손수 오고 싶어서 한창 몸이 달아 있었는데 주변 식구들의 만류로 대신 두 아들을 보낸 것이었다. 거기에 사병까지 소대 단위로 보내려 하자 그 역시 집안 식구들이 그쯤 되면 단순한 가문 싸움이 아닌 국가 단위의 전쟁으로 번진다며 뜯어말렸다. 대신 두 아들과 정예 인원 대여섯만 추려 왔다.

만약 아리스의 외가가 루아드 제국에 속한 가문이었다면 황제의 눈치를 봐야 하는 위치였으니 이런 패싸움 같은 분란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당시에는 의도치는 않았어도 마라피네스가 마이련 출신의 류은현과 결혼한 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여러모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류진은 다친 지 고작 4일 사이에 제법 많이 회복했다. 꿰맨 상처가 터지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이라 진단받았지만 문제는 그녀가 상처가 터지지 않게 얌전히 있을 위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건 미레아도 똑같았다. 미레아 역시 상처가 터지지 않게 주의하라는 경고를 받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별명이 사냥개가 아니던가. 한 번 목표한 대상은 끝까지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이 그녀의 특기였다. 거기에 세렌트라는 마검까지 얻었다. 그것 하나 믿고 또 무리한 행동을 할 게 류은현의 눈에 선했다.

은현의 걱정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마침내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얻은 미레아와 진의 눈은 복수심에 반쯤 돌아 있었다. 진은 시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슬퍼하는 것보다 먼저 대노했다. 미레아처럼 친밀한 사이는 아니라 해도 전우애가 있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원래 류가 출신 사람들은 호승심이 강했다. 은현이 진정하고 상황을 냉정히 생각해 보라 말려도 듣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저들끼리 사기를 북돋우며 활활 불타올랐다.

록산행 비공정을 띄우자 미레아는 다시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구름과 하늘, 바다밖에 없는 창밖을 하염없이 보고 있는 것을 은현이 끌어다 자기 옆에 앉혔다. 미레아는 그사이에도 다리를 달달 떨다 허리춤에서 풀어 놓은 세렌트를 쓰다듬었다.

“세렌트.”

미레아의 부름에 그녀의 새 검이 바로 응답했다.

― 왜?

“너 마검이면 전에 말한 것 말고 또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어?”

― 음…… 으음…….

미레아의 말에 세렌트는 난데없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해야 하는 일이야?”

― 하지만 난 이제 깨어난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걸.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나도 자세히는 모른단 말이야.

그 말에 미레아는 이마를 짚었다.

― 그리고…….

세렌트가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 정말 미안해.

“뭐가?”

미레아가 의아하게 되묻자 세렌트가 울먹이는 것 같은 어투로 말했다.

― 내가 제대로 못 해서, 동료가 죽었잖아…….

그 말에 미레아가 세렌트를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것을 어찌 해석했는지 세렌트는 한층 더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미안해. 내가 더 빨리 각성했다면…….

“세렌트. 난 그때 말 그대로 죽을 뻔했는데 네 도움으로 살 수 있었어.”

미레아는 굳은 목소리로 세렌트의 말을 부정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난 이 자리에 없었을 거야.”

미레아는 수십 번도 더 그 당시의 상황을 곱씹고 있었다. 이랬다면, 저랬다면, 시오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것에 세렌트의 잘못이 있었다는 가정은 끼워 넣지 않았다.

그저 ‘내가’ 이렇게 했다면……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을 하며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세렌트도 비슷한 가정을 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으응, 아니야. 네 잘못은 없어.”

하지만 미레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이 없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 정말?

“그래.”

― 그러면 나를 싫어하거나…… 그런 건 아니란 소리야?

“당연하지. 넌 그냥 그러니까…….”

미레아는 세렌트에게 너는 그냥 검이라는 소리를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아가 있는데 거기에 대고 단순한 검이니 하는 것은 무신경한 말인 것 같았다. 그래서 수식어를 조금 바꿔 주었다.

“훌륭한 검이니까.”

― 저기, 주인님. 그럼 나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세렌트가 쑥스러운 목소리로 물어 미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뭔데?”

― 아니…… 별건 아니고…….

무슨 말이기에 저리 뜸을 들이나 싶었는데 세렌트가 물은 질문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 주인님의 이름은 뭐야?

그 말에 미레아는 폭소했다. 아니, 자아를 각성한 이후 만지기만 하면 ‘주인님, 주인님.’ 하며 불러 댔으면서 이름을 몰랐다는 게 너무 웃겼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며칠 만에 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하지만! 주인님이 알려 주지 않았는걸! 그리고 그 이후에 주인님이 계속 기분이 안 좋아서 물어볼 수 없었다고! 나도 분위기 파악이란 걸 한단 말이야!

세렌트는 당황한 듯 황급히 변명을 내뱉었다. 그 말에 미레아는 한바탕 웃어 대고는 대답했다.

“내 이름은 미레아 제인스터.”

― 미레아 제인스터!

세렌트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 이름을 곱씹으며 불렀다.

― 예쁜 이름이야.

“고마워.”

미레아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단순히 이름을 칭찬한 것에 대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며칠 만에 그녀를 웃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세렌트와는 정신이 이어져 있으니 자신의 진심이 검에게도 닿을 것이었다. 그 말에 세렌트는 또 쑥스러워하는 목소리로 헤헤 웃었다.

“저기, 내가 지어 준 이름은 마음에 드니? 만약에 싫다면 다른 이름을 더 고민해 볼게.”

그 말에 세렌트가 바로 대답했다.

― 아니! 완전 마음에 들어!

“그런데 너 말이야…….”

미레아는 줄곧 고민하던 것을 물었다.

“너를 내게 준 그 화상은 네 이름을 지어 주는 사람을 주인으로 섬기라 그랬으면서 왜 지금까지 이름을 직접 지어 주지 않고 있었는지 아니?”

― 몰라. 나를 만든 사람이 내게는 그 말만 남겼고 내 자아는 그전까지 줄곧 깨어나기 전이었거든.

“네 자아라든가 성격 형성이라든가 그런 것은 어떻게 생긴 거야?”

― 마력이 모여 유사 영소가 형성되면 자아도 생기나 봐. 다른 건 나도 몰라. 나를 만든 사람이 자신의 지식 일부를 전해 주었지만 난 모르는 것투성이야.

세렌트의 말을 듣고 있던 미레아는 세렌트가 아까부터 아리스를 ‘나를 만든 사람’이라고만 부르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설마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너 혹시 너를 만든 사람 이름도 모르니?”

― 응, 몰라.

미레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리스 이 녀석은 대체 왜 어떤 언질도 없이 이런 검을 막무가내로 자신에게 떠넘겼는지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애를 하나 떠맡아 기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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