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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154화 (154/257)

154화.

세피로스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듯 리비엘로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세피로스에게 놀아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할 수 없겠지. 지금 와서는 그 둘의 관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왔으니. 어느 쪽이든 상처를 입는 것은 변함없을 거다.”

“처음부터 알려 줬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테니.”

“이래서 숨겼군요.”

리비엘로는 자신을 자책하며 탄식했다. 여신의 조각이 무엇인지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최소한 세피로스를 막을 수 있는 패를 하나 이상은 더 쥐고 있었을 것이다.

아리스는 미레아가 있는 한 세피로스의 뜻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컸다. 왜냐하면, 그 둘의 관계는…….

“너는 지금 그 둘을 위해 내게 화를 내고 있지.”

세피로스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내게는 설이 그런 존재다.”

“그렇다면 당신과 우리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겠네요.”

리비엘로는 조소했다.

“세피로스, 당신이 만들려는 세계는 ‘설’이 원하던 세계일까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피로스는 리비엘로의 목을 움켜쥐었다.

“내 앞에서 마치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말하지 마라. 고작 신녀 주제에.”

그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리비엘로는 이런 세피로스의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세피로스의 이면을 알지 못했단 것에 대한 감정이지 세피로스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예지 능력을 사용했다면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알겠군.”

세피로스가 리비엘로의 목을 쥔 손을 들어 올리자 땅에서 리비엘로의 발끝이 떨어졌다. 그녀는 숨이 막혀 몸이 떨리면서도 말을 이어 갔다.

“그, 그러니, 기, 다리고 있었지요. 제 예지로도 당, 신을 피하, 는 방, 법을 찾을 수, 없었어, 요.”

“영소의 유속 제어 유닛이 있는 장소를 너라면 알고 있겠지?”

“물론, 이지요.”

“말해.”

“아, 알려, 드리면, 저, 저의 목숨을, 살려, 주실 건가요……?”

“지금 목숨을 구걸하는 건가?”

“서, 설마요.”

리비엘로는 어림도 없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

세피로스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리비엘로를 바라보았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알고도 바꿀 수 없는 미래도 있기 마련이다.”

세피로스의 품에서 권총이 나왔다. 하지만 리비엘로는 겁먹기는커녕 형형한 금색 눈으로 세피로스를 쏘아보았다.

“다, 당신은, 실패, 할 거야…….”

“그것도 읽었나?”

리비엘로는 또박또박 말하기 위해 애를 쓰며 세피로스를 노려보았다.

“아니, 아니…… 읽지 못했지. 내가, 읽을, 수 있던 당신의 미래에는, 아, 무것도 없었거든. 그, 래서, 알 수 있, 었어…… 그, 들은, 나도 모르는 미래를, 만들, 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 이지 않을, 거, 거야.”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이었군.”

세피로스가 리볼버의 공이를 엄지로 누르자 딸깍하는 쇳소리를 내며 총알이 장전됐다.

“그렇다 해도 예지 능력을 가진 너를 그냥 둘 수는 없지. 그것이 네가 원해서 얻은 것은 아니지만, 성녀 후보에서도 박탈당하게 만들고 여러모로 고생하게 만든 능력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된 것이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말대로 리비엘로는 이 예지 능력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슬픈 광경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무력감만 실감할 수 있었기에.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앞으로는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겠지.”

리비엘로가 서글프게 웃었다. 그녀는 클라인으로 향하기 전에 미리 적어 둔 유서를 떠올렸다. 그것은 아마 그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리비엘로는 세피로스의 앞에서 양손을 벌리고 눈을 감았다.

한 발의 총소리가 텅 빈 거리에 울렸다.

신녀 리비엘로 람은 이튿날, 아침 기도를 올리러 온 사제들에게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심장에 박힌 총알로 인한 총상이었다.

* * *

라케드의 도움으로 시오의 시신을 수습한 미레아는 수로를 지키고 있던 류은현과 합류해 라슈발렌 아이나 지부로 몸을 옮겼다. 라케드는 황제 쪽에서 마니샤라는 큰 전력을 잃었으니 라우노가 아이나 대륙까지 힘을 끼치기엔 당분간은 힘들지 않을까 추측했다. 그러니 이동하는 동안 무방비하게 습격받는 일은 없으리라 판단했다.

게다가 성지의 위치가 노출되었으니 그것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야 했다. 그런데 그 대비책이란 것이 굉장히 뜻밖의 것이었다.

“성지는 하나의 거대한 비공정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 주기 위해 미레아를 데리고 어떤 동력실로 내려간 라케드가 콘솔을 조작하며 알려 주었다. 성지는 파손된 여러 블록을 분리하고 배아의 방과 최소한의 동력만 남겨 두면 비공정으로 기능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는 인류가 이 땅에 내려올 때 용들의 배아가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미레아는 아마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순수하게 감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실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라케드는 여기저기 피해를 본 곳들을 수습하고 성지를 비공정으로 만들어 배아의 방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야 했기 때문에 성지에 남아야 했다.

미레아와 류은현은 라케드가 손을 써 준 덕분에 본래라면 이동까지 하루는 꼬박 걸릴 거리를 장거리 워프 게이트를 여러 번 거쳐 몇 시간 만에 아이나 지부까지는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진은 탈출한 경로를 타고 그대로 마이련으로 몸을 옮긴 차였다.

미레아와 은현은 아이나 지부에서 필요한 것을 보급하고 안정이 될 때까지 쉴 수 있도록 숙소까지 지급받았다. 원래라면 류가에 연락을 넣어 사병을 꾸린 후 합류할 준비를 해야 했지만 그런 계획이 뒤로 미뤄졌다. 당장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레아의 부상은 제법 컸지만, 세렌트의 힘으로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기 때문에 응급처치를 받을 만큼의 위독한 상태는 지난 상황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을 정도로 제법 심각한 부상이었기에 미레아는 병원 신세를 져야 하긴 했다.

미레아는 울진 않았지만 마음이 공허해 모든 게 허무할 정도였다. 로아메나 지부 소식이 궁금했어도 정보부에서는 정보 접근 권한이 없다며 해당 사건에 대한 정보를 열람하는 것을 반려 당했다.

할 수 있는 일들이 몇 없던 미레아는 붕대를 둘둘 감은 채 시오의 시신을 인도하러 온 그의 부모님을 맞이했다. 시오의 출신지인 히루카 공화국은 아이나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로아메나 대륙을 거치지 않고 바로 인계 절차에 들어간 것이었다. 단, 그가 미리 작성해 둔 유서는 로아메나 지부에서 보관 중이었기 때문에 추후 우편으로 식구들에게 보내기로 했다.

시오의 부모님은 소식을 듣고 비통에 잠긴 얼굴로 아이나 지부에 다음날 도착했다. 시오만큼이나 좋은 분들이었다. 그의 유들유들한 성격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시오의 부모님은 미레아에게 질타를 하기는커녕 고맙다며 인사했다.

반창고와 붕대투성이인 미레아를 먼저 걱정하며 시오를 통해 그녀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친한 후배라며, 미레아가 여러모로 신경을 써 준 덕분에 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고,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마다 꼭 한두 마디 이상은 미레아의 근황까지 함께 적어 두었다고 했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요원들의 구체적인 정황을 적는 것은 금기였으나 두루뭉술하게나마 다른 동료들의 근황도 한두 줄씩 추가하여 시오의 부모님은 미레아의 일행 중 모르는 이름이 없었다.

비록 아들의 편지로 이름만 전해 들은 사이지만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줘서 다행이라고 오히려 미레아를 위로했다. 그 말에 미레아는 또 눈물이 차올랐다. 시오 덕분에 살아난 주제에, 과한 감사 인사를 받았다. 그것이 미레아의 심정을 더 참담하게 만들었다. 5년 전 과거의 일이 겹쳐 보였다.

미레아는 시오의 관을 붙들고 오열하는 그의 부모님을 보며 라일라를 생각했다.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다른 일행들은 시오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 하고 보내야 했다. 심지어 시오의 부고가 그들에게 닿지도 않았다.

그러다 퍼뜩 든 생각이 리비엘로는 그의 죽음을 예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리비엘로는 라슈발렌 소속이 아니었고, 이 임무가 끝나면 신녀 본연의 일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일라에게는 몰라도 리비엘로에게는 개인적인 연락을 넣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리비엘로가 라일라와 쿤둘렌에게 말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미레아는 자신의 병실에 있는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다 다시 내려놓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오가 죽었다는 말을 그의 부모님께 전한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졌다. 다른 일행들에게 또 전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그러나 미레아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리비엘로의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한참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수화기에 귀를 대고 있는데 리비엘로가 좀처럼 받지 않았다. 미레아는 그것이 록산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 여겼다. 수 분이 흐르고 미레아는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세 번 정도 더 시도했지만, 번번이 연결되지 않았다. 미레아는 시계를 보면서 시차를 계산했다. 분명히 지금쯤이라면 록산에서는 아침 기도를 마치고 개인 일정을 보내고 있을 시간이었다.

리비엘로는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 시간 즈음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레아가 불러낼 때를 제외하면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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