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53화 (153/257)

153화.

“이건…….”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흐름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린 리비엘로는 지금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흐름의 주인은 시오 미도르였으며 그가 죽었기 때문에 영소의 흐름이 사라져 인과율이 끊어진 것이었다.

의지와 영소의 흐름이란 것은 중간 과정을 알 수 있지만 완전한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리비엘로는 죽음을 예지할 수 없었다. 그러니 막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축축이 젖어 오는 눈가를 훔치면서 시오를 떠올렸다. 시오와는 미레아를 통해 친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가까운 사이였다. 슬프지 않을 리 없었다. 예지의 힘을 써 어떻게 된 것인지 역산을 해 보니 미레아와 라케드, 그리고 마니샤의 흐름이 서로 얽혀 있었다. 마니샤의 흐름 역시 끊겨 있었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는 이 이상 힘을 쓰지 않아도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라일라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리비엘로는 방에서 나와 서리 여신의 제단으로 향했다. 초를 켠 후 허리를 깊게 숙이고 손을 모아 여신께 시오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가슴 앞으로 기다란 백금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지만 그것을 정갈하게 정리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시오 미도르. 항상 쾌활한 미레아의 옆에서 맞장구를 치며 든든한 벽이 되어 준 미레아의 한기수 위 선배. 미레아의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어 함께 있으면 언제나 기분 좋던 시오 미도르. 리비엘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다정하던 그였기에 리비엘로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이 너무나도 슬펐다. 왜 우리는 죽고 죽여야 하는가. 공존의 방법을 거부하는 이들을 어떻게 품으라는 말인가. 당신께서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우리 같은 범인들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리비엘로는 그렇게 끊임없는 질문을 서리 여신에게 던졌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리비엘로는 곧 차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상체를 곧게 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눈물이 흐르는 것까지 멈출 수는 없었다.

- 그대가 없는 시간을 살아가고, 그대의 발자국만 남은 대지를 밟으며, 그대의 숨이 섞이지 않은 공기를 들이마시지만. 우리는 언제나 이 자리에 없는 그대가 그립겠지요.

고운 목소리가 신전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누군가의 축복도, 정화의 힘도 아닌 그저 리비엘로의 슬픈 심정을 담은 노래였다. 이미 흘러가 버린 흐름 속에서 리비엘로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래를 부르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만의 방식으로 시오를 추모했다.

- 흘러가는 운명 속에서 내가 남긴 것이 미련일지라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운명이라 해도, 이 삶을 사는 것은 축복일까요, 형벌일까요. 살아가는 자들은 그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하니. 아아, 내가 앉은 이곳은 태풍의 한가운데. 고요하지만 사방이 비바람으로 가득 찬 새장. 그러니 눈을 감겠어요. 나의 몸은 그대로 쓸려 갈지니.

눈물로 양 볼이 흠뻑 젖었어도 리비엘로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고,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노래로 내려앉은 신성력으로부터 이 세상에 남은 시오의 기록이 리비엘로에게 흘러들어 왔다. 그의 마지막 기록을 머릿속에서 읽으며 리비엘로가 쓴웃음을 지었다.

시오, 노력했구나. 훌륭해. 과연 이 대륙에서 한 손가락에 꼽히는 저격수야.

그러나 리비엘로가 본 것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바로 지근에 있는 자신의 미래까지 보았다. 그리고 미레아의 미래, 아리스의 미래, 다른 이들의 미래까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신성력은 리비엘로의 예지 능력을 강화했다. 설령 부질없는 짓이라 해도 미래를 엿보는 것은 리비엘로의 특권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이들의 흐름을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특권이 주어진 자의 의무였다.

그러니 자신이 알고 있는 이 정보를…… 적어도 미레아만큼은…… 미레아가 안 된다면 적어도 아리스 너에게 닿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늦은 밤이 되어서야 리비엘로가 기다리던 사람이 신전을 찾아왔다. 인기척을 느낀 리비엘로는 노래를 멈추었다. 무거운 신전 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하얀 코트를 입고 커다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리비엘로는 후드의 그늘에 가려진 그의 얼굴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왜 록산에 와서도 그런 차림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 말에 상대방이 후드를 벗었다. 후드 안에 있던 은사 같은 머리카락은 티 하나 없이 깨끗했으며 어깨 위 길이에서 살랑거렸다. 영롱하게 빛나는 이마의 용주와 같은 빛을 한 짙은 호박색 눈동자가 리비엘로를 응시했다.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

세피로스의 말에 리비엘로가 입매를 굳혔다.

“내 의지를 읽었나?”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본격적인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 어제였겠죠. 그 시점에서 제가 대응하기엔 이미 늦었고요.”

자리에서 일어난 리비엘로는 세피로스에게 걸어가 그와 한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세피로스의 두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세피로스 회장님. 왜 우리를 배신하신 거죠?”

“…….”

그 질문에 세피로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비엘로는 끝까지 대답을 얻겠다는 듯 고요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배신…… 배신이라.”

세피로스는 그 말을 되뇌었다. 그는 배신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세피로스는 처음부터 자신의 부하들을 체스 말처럼 쓰고 버릴 소모품이라 생각했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미레아 제인스터에 대한 부분이었다. 다른 것은 다 버린다 해도 미레아만큼은 처음부터 다르게 대했다.

그렇게 여긴 까닭에는 미레아가 단순히 케이드의 딸이었다는 이유 이외에도 미레아가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미레아도 리비엘로처럼 세피로스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을 예상한 세피로스는 결국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이 모든 일을 준비해야 했다.

“너라면 이유를 알지 않나.”

리비엘로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로 그녀가 기뻐하리라 생각하시나요?”

리비엘로의 협박 같은 말에 세피로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기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어차피 지금 그녀의 삶은 충분히 고통이다. 속박된 상태도 고통이고, 자유로운 상태도 똑같이 고통이라면 나는 그녀에게 자유를 주기로 마음먹었지. 그러니 어느 쪽이 되었든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말하는 그녀는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었다. 윤설. 지금은 서리 여신이라 불리는 이 세계의 조율자. 리비엘로는 지금까지 세피로스가 라우노에게서 서리 여신을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세피로스는 그의 가족이나 다름없던 윤설을 이 세계의 조율자라는 자리에서 해방하고자 했다. 설은 지금까지 기나긴 세월 동안 조율자의 자리에서 필요 이상의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싸워 왔고, 세피로스는 그것을 이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조율자가 없는 세계는 붕괴되기 마련이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세피로스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기 때문에 리비엘로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세피로스는 윤설을 대신할 새로운 차기 조율자를 내세울 계획이었다.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다줄 것이란 신탁을 받은 ‘루데키아스 레민나 류 파니드라우’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를 대체품으로 내세워야 하니 세피로스는 라우노가 하는 짓거리를 막아야만 했다. 겸사겸사 눈에 거슬리던 것들을 처리하고 말이다. 그것이 이 클라인 원정대를 꾸린 세피로스의 진짜 목적이었다.

“‘이 세계의 종말’이 어떤 뜻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확실히 서리 여신의 세계는 종말을 맞이하겠군요.”

리비엘로는 한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치떴다.

“루데키아스…… 아리스를 조율자로 만든 이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아시나요? 아니, 아니군요. 당신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겠군요.”

새로운 조율자를 내세운 세상은 지금과 다른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리비엘로는 그것이 어떤 세상일지 읽을 수 없었다. 현재로서는 선택지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미래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으며 앞으로 있을 아리스의 선택에 따라 세계는 변모할 것이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은 서리 여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세계를 말이지요.”

“우리의 세계?”

리비엘로의 표현에 세피로스가 조소했다.

“무엇을 말하는 건가? 우리는 설의 희생 아래 세워진 이 세계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그런 불완전한 세계의 대체품을 내세우는 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리고 설령 그 대체품이 될 세계의 모습이 지금보다 못하다 해도, 이 세계의 것들이 그것을 불평할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하나.”

세피로스는 허리를 살짝 굽혀 위압적으로 리비엘로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난 설만 빼내 올 수 있다면 이 세계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리비엘로는 이러한 것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세피로스가 자신의 의지를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었다.

“대단하시군요. 그런 생각을 지금까지 숨기고 계셨던 것이. 저조차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이 정말로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을 찾는 줄 알았거든요! 예지로는 그런 흐름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너무 많은 말을 하는군.”

세피로스가 불쾌감을 내비쳤어도 리비엘로는 평소의 어투대로 담담하게 말했다.

“인제 와서 숨길 것은 저에게도 세피로스 님에게도 없으니까요.”

“어디까지 읽었나.”

“제가 얽힌 일과 그 둘이 달려가는 길까지요.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읽지 못했지만.”

“이 세계의 진실까지?”

“예, 이 세계의 진실까지. 아마도 당신이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의 대부분을.”

“그렇군.”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듯 세피로스는 고요한 눈으로 리비엘로를 보았다.

“너라면 언젠가는 이 세계의 가장 깊은 곳까지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하긴 했다. 그래서 너를 속이기 위해 진심으로 루데키아스를 도와 라우노를 막는 시늉은 해야 했거든.”

그 말에 큰 배신감을 느낀 리비엘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눈을 치켜뜨고 세피로스를 올려다보았다.

“시오 미도르가 죽었어요.”

그 말에도 세피로스의 눈에는 동요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리비엘로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울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고 금일 낮 즈음에…… 그는 당신을 위해서 목숨을 잃었는데……!”

“나 때문이 아니야. 하지만 필시 명예로운 죽음이었을 테지.”

“예! 모두를 지키다가 죽었죠! 당신이 버리려고 했던 이 세계의 그 모든 것을 지키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여신의 조각이 무엇인지는 이제 알 것 같나?”

그 말에 리비엘로가 이를 으득 갈았다. 평소 동요라는 것을 잘 보이지 않는 그녀로서는 엄청난 항의 표시였다.

“당신은 이것까지 다 계산했지요. 이렇게 될 줄 알았을 테니.”

“그래서, 미레아나 루데키아스에게 알릴 생각인가?”

“…….”

리비엘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에 세피로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너라면 말하지 않을 줄 알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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