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내 머리 위에 군림한 것처럼 굴었던 기분은 잘 알겠어. 뭐, 나쁘진 않네.”
미레아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녀는 광포하게 날뛰며 라케드를 공격하고 있는 거인을 검 끝으로 가리켰다.
“모두 상대해 주마.”
미레아가 허공에서 다시 한번 도약했다. 순식간에 거인의 머리까지 올라 검으로 머리를 찔렀다. 하지만 겉가죽이 단단한지 검기를 덧씌운 세렌트조차 한 번에 뚫지는 못했다. 미레아가 혀를 찼다. 라케드가 달려들어 거인을 쓰러트렸다. 덩치가 큰 두 괴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멍청한 놈! 체급이 맞는 녀석을 골라잡아야지!”
라케드의 타박에 미레아는 뒤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도와주려 그랬는데…….”
미레아는 그렇게 말하며 뒤에서 날아온 공격을 몸을 비틀며 쳐 냈다. 마니샤가 씩씩거리며 미레아를 향해 공격해 댔다. 이미 늑골이 부러지고 마력을 상당히 소진한 마니샤는 여유가 없어 보였다.
“네 마법은……! 효과 없어!”
아리스의 마력을 먹고 큰 마검이었다. 보유하고 있는 마력의 양은 아리스만큼은 아니라 해도 충분히 흘러넘쳤다. 아리스가 자신의 순수한 마력 양만으로 다른 마법들을 파훼시키고 다닌 짓거리를 미레아가 똑같이 흉내를 냈다.
애초에 미레아는 마법사도 아니고 마법은 이론적인 기본 상식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복잡한 술식을 세우거나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의지를 구체화해 마력을 방출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검에 깃든 것은 아리스의 마력이었다. 마석이 없어도, 증폭기와 매개체가 없어도, 술자의 의지가 실현될 정도의 방대한 힘. 미레아는 마니샤의 술식을 세렌트로 족족 베어 내며 그녀를 몰아붙였다. 상황이 뒤바뀌자 미레아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가 사나운 얼굴을 했다.
“좋아, 빨리 네 녀석을 해치워 주고 시오 선배를 구하러 가겠어.”
미레아가 마니샤를 향해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었다. 마니샤는 자신의 온 힘을 다한 마법으로 공격했지만, 미레아는 그마저도 세렌트로 베어 내었다.
“이익!”
미레아는 마니샤의 코앞까지 접근해 세렌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 공격은 마니샤의 방어막에 막혀 무산되었다. 시오의 마탄도 막은 그 방어막은 그 어떤 마법보다 견고했다. 세렌트로 어느 정도 흠집은 내었지만 금방 복구되었다. 그렇다 해도 시간 싸움이었다. 미레아는 세렌트가 있는 한 마니샤의 방어막을 뚫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불리하게 상황이 돌아가자 마니샤는 자신의 마력을 쥐어짜 대형 마법을 준비했다. 이 방법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은 라케드가 먼저였다.
“설마 저 개자식이 핵분열……!”
아군인 거인도 함께 한 번에 녹여 없앨 수 있는 마법이었지만 마니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곳에 핵분열 에너지를 쏟아 낼 준비를 한 다음 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공간 전이를 통해 도망칠 계획이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은 데르카이드 정도 되는 마력이면 어렵지는 않았어도 문제는 저것을 막는 마법은 아직은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후폭풍으로 이 일대가 방사선으로 오염당하기라도 하면…….
그 끔찍한 가정에 라케드는 이를 악물었다. 공간 전이를 해서 피할 수 없었다. 초장거리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미레아를 피신시키는 것은 가능했지만 용들의 배아를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은 여기서 죽어야 했다.
“미레아! 무슨 일이 있어도 마니샤를 막아! 이대로라면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죽는다!”
라케드는 거인이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어서 여유롭게 마법을 사용하여 공간 전이를 할 수 없었다. 공간 전이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반작용이 높은 마법인지라 아무리 라케드라 해도 지속해서 공격받는 와중에 단시간에 술식을 완성할 순 없었다.
대신 물리적인 타격을 입히며 거인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미레아는 마니샤가 마법을 완성하기 전에 그녀를 향해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약이 바싹 오른 마니샤 역시 필사적이었다.
“죽어!”
광기에 찬 목소리로 마니샤가 미레아에게 일갈하자 미레아의 몸이 날아가 건물에 처박혔다. 세렌트가 보호막을 덧씌워 충격을 흡수해 주지 않았다면 어디 하나쯤은 부러졌을 것이다. 미레아를 날려 버린 후 마니샤는 몸 주변으로 방어막을 치고 기어이 마법의 완성을 목전에 두었다.
미레아와 라케드는 몰골이 송연해져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마법을 폭발시키기 직전 마니샤는 공간 전이를 하기 위해 마법을 시전 했다. 그녀의 몸이 사라지려는 그 순간이었다.
챙!
무언가가 날아와 마니샤의 방어막에 박혔다. 마탄이었다. 마탄은 마력으로 된 보호막에 미세한 틈을 남겼다.
“뭐?”
마니샤는 갑작스러운 저격에 놀랐지만,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마법으로 보호받은 덕분에 상처는 없었다. 그녀는 차갑게 비웃었다.
“하하, 그 저격수 아직 살아 있었나 봐? 그런데 이미 한 번 통하지 않은 공격은 두 번째에도 통하지 않아!”
그런 말을 내뱉고 있는데 다시 한번 마탄이 보호막을 치고 갔다. 이번에도 아까와 같은 자리에 정확하게 내리꽂혔다. 그것은 첫 번째 마탄이 미세하게 남긴 틈을 더 크게 만들었다. 마니샤는 이번에야말로 크게 당황하여 마법으로 된 보호막을 복구하려 했다. 하지만 시오는 그럴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총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마니샤의 관자놀이가 꿰뚫리며 피와 뇌 조직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탄은 마니샤의 관자놀이로 들어가 반대편에 큰 폭발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두개골이 날아간 마니샤는 ‘어떻게, 그 거리에서……?’라는 눈빛을 했지만, 그 눈은 이내 맑은 빛을 잃고 동공이 풀렸다. 그녀의 금색 깃털이 부스스 흩어지더니 작은 몸이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술자가 사라지자 핵분열 마법 역시 완성되지 않고 사라졌다. 미레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라케드가 거인의 목을 물어뜯어 행동 불능 상태로 만든 후 왼쪽 눈의 마석을 이빨로 물어 깨트린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시오…… 선배?”
미레아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가 이내 통신기에 대고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선배, 살아 있었구나!”
통신기의 기계음과 함께 시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아직은…….
“지금 어디야? 바로 갈게!”
그 말에 시오가 힘없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 늦었어. 사방이 불이야.
미레아가 화를 내며 대꾸했다.
“늦긴 뭐가 늦었어?! 거기서 빨리 이탈해. 이쪽 상황은 정리되었으니 내가 데리러 갈게.”
― 그러니까…… 늦었다니까. 이 자리에서 이탈할 수 없어.
“왜?!”
― 절벽 위에 매복하고 있었는데 폭발을 피한답시고 아래로 뛰어내렸거든. 반쯤 도박이었는데 잘 먹혀서 폭발에는 휘말리진 않았지만……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어. 지금 보니까 다리도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고, 젠장…… 뇌진탕도 심해. 하필이면 바람 방향이 이쪽으로 불고 있어서 폭발할 때 옮겨붙은 불들이 내 코앞까지 왔다고.
대충 들어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기껏 적들을 해치웠는데도 시오는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것도 가장 끔찍하다는 작열통을 느끼면서 말이다. 미레아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오 선배! 그러니까 내가 데리러 가겠다고!”
미레아는 일단 시오가 있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 타 죽는 건 싫어서 권총으로 자살할까 봐.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어디 있는지나 빨리 말해! 주변에 보이는 지형이 뭐야? 젠장, 세렌트 너 공간 전이는 못 해?”
― 미, 미안해. 내 주특기는 검으로 발현될 수 있는 마법뿐이라 공간 전이처럼 복잡한 술식을 사용해야 하는 마법은 미리 술식을 새겨 놓은 것이 아닌 이상 바로 쓸 수 없어.
세렌트가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빌어먹을! 선배 빨리 어디 있는지 말해! 시오 미도르!”
초조한 마음에 사로잡힌 미레아가 저도 모르게 화를 버럭 내었지만 시오는 자기 할 말만 주절주절거렸다.
― 아…… 라일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괜히 부채감 같은 걸 줄 뻔했어.
“선배, 그런 말 하지 말고 돌아가서 고백하면 되잖아! 난 원래 이 커플 반댈세, 하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야! 고백해! 고백하자! 내가 잘되게 도와줄게.”
미레아는 애써 웃으며 시오를 독려했다. 하지만 시오는 자꾸 부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 너 라일라에게 아무 말 하지 마. 알았어?
“모르겠으니까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마!”
하지만 시오는 가물거리는 눈을 깜박거리며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런 끝이 오지 않을까 가슴 한편으로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하는 일이 워낙 위험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동료의 부고를 듣는 처지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매달 유서도 열심히 갱신하고 있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유서…… 반쯤은 장난스럽게 쓴 말도 있는데 그래도 다 진심이고 제법 깊게 생각해서 썼으니까 다들 잘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할 말은 그곳에 다 적혀져 있으니 유언을 남기지 않아도 아쉬움은 없었다.
라일라…… 내가 죽으면 울어 주려나. 라일라는 상냥하고 정이 많으니까 분명 울겠지. 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막상 울지 않으면 조금 서운할 것 같았다. 그러니 아주 조금만 울어 줘. 그리고 사르파니 축제 때 빌려준 돈 안 갚아도 돼.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혼자라서 다행이야. 꼴사납게 죽어 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 아, 맞다. 부모님. 좋아하는 여자 생각한답시고 두 번째로 떠올리는 데다 먼저 가는 불효자를 용서하세요. 그래도 다들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어.
불이 자신의 다리에 옮겨붙기 직전인 것을 본 시오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들었다.
아…… 정말로 죽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