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미레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일전에 알툰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방식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미레아는 다시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경계했다.
“너…… 뭐야…….”
미레아가 조금은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경계하고 있자니 그것도 웃겼다. 다 죽어 가는데 인제 와서 경계심을 품어 봤자…….
하지만 그녀에게 말을 건 존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싶었다.
― 나는, 음…… 나는 나야!
“그게 대체…… 뭔데? 넌 누구야?”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미레아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이 진동했다.
“……검이라고?”
검을 쥔 손을 들어 올리자 알아차린 것이 기쁜지 상대방은, 그러니까 검은 흥분한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 맞아! 나는 검이고…… 그리고, 음……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 주고 싶긴 한데 내가 이제 막 깨어난 참이라 나도 잘 몰라. 네 피가 나를 깨웠어. 피는 생명의 영소가 많으니까 그 피를 뒤집어썼으니 일종의 전기 충격과도 같은 효과라고 해야 하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미레아는 눈동자를 굴려 검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아리스가 쓰던 검이었다. 특징이 없는 것이 특징인 검. 장식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상당히 단순한 외형을 지녔고 실제로 사용한 기간은 고작 3달뿐인지라 그렇게 손때가 많이 타지 않은 평범한 검.
……아니. 이 검은 평범하지 않은 점이 하나 있었다. 마력 감응도가 높아 사용자가 용이 아닌 이상 진가를 발휘할 수 없는 검. 하지만 용은 마법을 주로 사용했고 검을 쓰는 일은 극히 드물어서 지금까지 주인이 나타나지 않다가 아리스의 손으로 넘어간 검이었다.
미레아는 생각이 자꾸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이제는 검을 쥔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입을 움직일 기운은 남아 있었다.
“아리스 이 미친놈이…… 고작 3개월 만에 마검을 새로 만든 거야?”
미레아는 어이가 없어서 쿨럭거리면서 웃다가 검을 놓을 뻔했다.
― 정신 차려! 죽지 마! 나랑 같이 싸워!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자신의 머릿속을 점령한 목소리를 향해 미레아가 웅얼거렸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미레아는 아직 죽지 않았다. 검이 말을 거는 통에 머리가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도 싸워야지…… 아직은 싸울 수 있어. 방법이 있을 거야. 일단 몸을 움직여야…….”
미레아는 혈색 없는 얼굴로 몸을 버둥거렸다. 상처는 어쩔 수 없으니 몸을 쓸 수는 없다 해도 머리는 굴려야 했다. 전략을 세우기 위해 생각에 잠겼지만, 머릿속의 피가 부족했다.
“젠장, 생각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질 않아…….”
― 괜찮아! 앞으로는 괜찮을 거야! 내가 어떻게든 해 줄게! 그러니깐 너는 내게 이름을 지어 줘.
“이름?”
― 나를 만든 사람이 내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는데, 만약 내게 이름을 지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주인으로 삼으라 그랬거든!
“하하, 아리스 그 녀석…….”
미레아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무책임한 녀석이네. 어떤 이상한 놈 수중에 떨어지면 어쩌려고.”
어찌 보면 아리스다웠다. 하지만 아리스는 다 생각이 있었다. 미레아의 검기는 자신의 기운과 비슷하니 이 검의 자아를 제대로 깨울 만한 사람은 자신 아니면 미레아일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미레아는 그런 계획을 하나도 알 수 없으니 난데없는 봉변이나 다름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너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 어떻게 되는 건데?”
― 내 주인님이 되는 거야.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내가 네 주인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어. 나는 사용자의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고 마법을 쓸 수도 있고…… 아! 몸의 신진대사를 촉진해서 상처를 회복하는 것도 훨씬 빠르게 해 줄 수도 있어!
검이 자신의 능력을 하나하나 나열하는 동안 미레아는 혀를 내둘렀다. 대체 이 미친 기능들은 뭐냐는 말이다. 마검이란 게 이렇게 무시무시한 것이었어? 이걸 만든 놈은 정말 미친놈이 아닐까?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이름…… 이름이란 말이지…….”
미레아가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이 둔해져서 떠오르는 것이 얼마 없었다.
“세…… 렌트.”
이거보다 더 좋은 이름이 있을 것 같은데 당장 떠오르는 것은 저게 전부였다.
“네 이름은 세렌트로 하자.”
― 세렌트!
검이 방금 지어 준 자신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기분 탓인지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신이 난 것처럼 느껴졌다.
― 내 이름은 세렌트!
검이 진동하며 빛을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미레아가 몸 안에서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어 쿨럭거리며 기침을 하자 응어리진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덕분에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
“이게 뭐야…….”
미레아는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손으로 몸을 더듬거려 보자 관통상은 진작에 지혈이 되어 있었고 몸의 상처들에는 새살이 올라오며 어느 정도 아물어 가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게 가능해?”
미레아는 믿을 수 없단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몸의 신진대사를 끌어 올리면 세포 재생 속도를 올릴 수 있어. 하지만 그만큼 영소에 부담이 가다 보니 당분간은 바로 못 써.
“아니 그래도…… 이거, 끝내주는걸?”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해 본 미레아는 몸의 변화에 깜짝 놀랐다. 피로가 가신 전신에는 힘이 넘쳤고 시야는 또렷했으며 한껏 예민하게 끌어 올려진 오감은 이 근방의 상황을 하나하나 해부라도 한 것처럼 미레아에게 정보를 물어다 날랐다.
최상의 상태는 아니라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 정도까지 회복한 것은 기적이었다. 이런 상태라면 승산이 있었다. 미레아는 세렌트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아직 저 밖에서는 라케드가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시오…… 살아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다. 이런 곳에서 멍하니 있을 새가 없었다.
“세렌트, 네 입으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그랬지?”
― 음? 그렇지?
“그럼 네가 가진 힘을 전부 써. 전력을 다하란 소리야.”
― 당연하지!
세렌트가 힘차게 대답했다. 미레아는 다시 자신의 전장을 향해 나아갔다.
* * *
라케드는 마니샤를 거의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늑골이 나간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공중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라케드는 그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마니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인제 그만 포기하고 목숨을 내놓아라.”
하지만 마니샤는 짧게 조소했다.
“생각보다 빨리 안 죽네. 무의미한 반항일 텐데.”
“지금 궁지에 몰린 것은 내가 아니고 너일 텐데?”
하지만 마니샤가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더니 입술로 물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먼 하늘에서 하얀 박쥐 같은 것들이 몰려왔다.
“네놈…… 마수도 부려……?”
그녀는 총과 같이 생긴 것을 빼 들더니 라케드에게 비죽 웃어 주었다.
“이봐, 늙은이. 이게 뭔지 알아?”
라케드가 대답하기도 전에 마니샤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들의 머리 위로 워프 게이트가 열렸다.
“뭐가 오는 거지?”
라케드는 얼굴을 찡그렸다가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워프 게이트가 좁아 보일 정도로 거대한 거인이 공간을 넘어오고 있었다. 거인은 쥬드가 거대화 됐던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그것은 몸집만큼 커다란 날개를 가졌다. 몸이 땅에 내려앉자 육중한 소리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거인은 라케드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라케드가 피하자 그 뒤에 있던 건물의 외벽이 무너지면서 땅으로 잔해들이 떨어졌다. 그런데 잔해가 떨어지는 위치가 하필이면 미레아가 몸을 숨긴 곳이었다. 라케드가 방어막을 펼치려 했지만, 마니샤가 훼방을 놓는 통에 타이밍을 놓쳤다. 그는 혀를 차며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라케드는 떨어져 내리는 잔해를 정확히 두 동강 내며 위로 도약한 작은 인형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마치 불꽃을 쏘아 올린 것처럼 바람에 나풀거리는 붉은 머리에, 양손엔 검을 쥔 사람이 건물 외벽을 딛고 하늘에 있던 괴물들을 썰어 내었다.
“미레아?”
라케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상대방을 불렀다. 분명 반죽음이 되어 날개가 꺾인 나비처럼 꿈질거리는 것 같은 움직임만 할 수 있던 미레아가 펄펄 날아다니고 있었다. 몸은 피투성이였지만 출혈이 심했던 것에 비하면 생기 돋는 얼굴이었다.
미레아는 세렌트에 검기를 두르고 크게 휘둘렀다. 세렌트가 만들어 낸 마법은 파공음을 내며 공기를 갈랐고 그 경로에 있던 마수와 괴물들을 전부 베어 버렸다. 마법으로 베인 자리는 재생하지 못했다. 미레아는 땅으로 추락한 괴물들의 왼쪽 눈에 있는 마석을 하나씩 파괴하며 마수들의 핵을 베었다.
그렇게 마수와 괴물 대부분이 죽었고 남은 것은 네다섯 마리의 괴물과 거인, 그리고 마니샤뿐이었다. 여유가 생긴 미레아는 자신은 괜찮다는 의미로 라케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빠르게 상황 판단을 한 라케드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멀쩡하면 빨리 저 녀석이나 상대해!”
“아이고, 매몰차라.”
미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니샤를 바라보았다. 그녀와는 반대로 마니샤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열세에 몰리던 아까와는 달리 미레아의 분위기가 변했다. 그것이 마니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죽어 가던 게 어딜 감히……!”
마니샤가 미레아를 향해 마법으로 만든 불로 된 공을 내던졌다. 하지만 미레아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검을 휘두르자 세렌트가 내뿜은 차가운 기운에 불들이 소멸하여 사라졌다. 라케드와 마니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미레아는 마법사도 아닌데 마도 기구의 도움도 없이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다. 위로 훌쩍 뛰어오른 미레아는 허공에 발을 디뎠다. 땅처럼 단단한 감촉이 발을 통해 전해졌다. 미레아는 마니샤와 동등한 눈높이에 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기분이었구나.”
미레아는 아래를 굽어보고는 다시 마니샤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인간다운 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기질적인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