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49화 (149/257)

149화.

― 열.

그는 침착하게 자신의 시야를 가리는 괴물들을 명중시키며 원하는 대로 탄환이 지나갈 길을 만들었다.

― 열하나.

미레아가 10마리만 잡으라고 했던 수가 지나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미레아 제인스터, 요 녀석아. 내게 그딴 헛소리를 또 지껄이면 혼내 줄 테다.

그리고, 열둘.

그 순간 시오의 시야가 환해졌다. 라케드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마니샤가 있는 방향으로 길이 훤히 트였다. 시오는 일순간 숨을 멈추고 신중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는 눈을 깜박이지 않고 조준경을 노려보았다.

온몸의 감각을 동원하여 바람의 방향을 읽고 주변 변수들을 계산하며 탄환이 지나갈 궤적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모든 신경이 손가락 끝으로 모여들었고 마침내 모든 조건이 완벽해졌다.

시오는 기계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마탄은 정확하게 날아가 마니샤의 정수리에 박혔다. 그리고 약한 폭발음이 들렸다.

됐다.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까지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시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 같았다. 하지만 조준경을 보고 다시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뭐야?”

마니샤가 정수리에서 흐르는 실혈을 혀로 핥으며 명백하게 불쾌한 얼굴로 시오가 있는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니샤의 전신 부근에 얇게 두르고 있던 방어막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 덕분에 지금까지 여러 번 건물에 처박히고 땅을 굴러도 멀쩡할 수 있었다.

마니샤가 또렷한 정신으로 탄환이 날아온 방향을 읽어 낸 바람에 시오의 위치가 노출되었다. 소총의 조준경을 통해 시오는 마니샤와 눈이 마주쳤다. 저격수에게 한 번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위치가 노출될뿐더러 다시 방아쇠를 당길 기회조차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상당히…… 귀찮은 놈이 있었잖아?”

그렇게 중얼거린 마니샤는 자신에게 덤벼드는 라케드를 발로 걷어찼다. 라케드가 타격을 입을 것이란 기대조차 없었지만, 그 반동으로 라케드에게서 떨어질 수는 있었다. 접근전을 벌이고 있는 미레아와 라케드보다 원거리에서 저격하는 시오가 그녀에게는 훨씬 더 귀찮은 존재였다.

마니샤의 표정을 읽은 시오는 직감적으로 위기를 느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체념뿐이었다. 그녀의 공격을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마니샤는 엄지와 검지를 펴서 손가락 총을 만들어 시오가 있는 방향을 겨누었다. 그리고는 장난치는 것처럼 천진한 목소리로 총소리를 흉내 냈다.

“빵!”

시오가 은닉하고 있던 장소에서 푸른 불기둥이 치솟았다. 새파란 하늘 위로 그만큼 눈이 뜨거워질 만큼 푸른 불꽃이…… 마치 태양이 두 개가 뜨기라도 한 듯 무더운 초여름 공기를 뜨겁게 불태웠다. 그 열기는 미레아가 있는 곳까지 미쳤다.

“시오 선배!”

그 광경을 본 미레아가 시오의 이름을 비명처럼 내질렀다. 불기둥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한 생명체를 태우기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미레아는 연신 통신기를 작동시키며 상대방의 대답을 다그쳤다.

“선배! 시오 선배! 시오 미도르!”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기계음만 들리는 잡신호뿐이었다. 주변으로 옮겨붙은 잔 불씨는 이내 큰불이 되어 활활 타올랐다. 괴물들을 상대하면서도 초조해하지 않던 미레아는 손끝이 차가워졌고 심장의 혈액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은 뜨거웠지만, 몸은 추웠다. 미레아의 몸이 덜덜 떨리고 눈에서는 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처절하게 외쳤다.

“선배! 대답해!”

미레아는 흐려지는 시야에 눈물을 훔치며 연신 시오를 불러 댔다.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미레아는 머리가 굳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것이 거짓이라고, 희망은 있기 마련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 희망은 있다.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었을 시오를 구하러 가자. 아직 살아 있을 것이다.

괴물들은 남아 있었고, 라케드는 마니샤와 대치 중이었던지라 원군은 없었다. 미레아는 스무 정도 남은 괴물들을 바라보았다. 남은 것은 열 명 남짓. 할 만한 숫자라 생각했다. 미레아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괴물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며 무리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탓에 판단력이 흐려졌고 움직임은 단순해졌다.

여기저기 허점이 그대로 노출됐다. 괴물이 방출한 마력에 몸이 붕 떠서 날아간다 싶더니 격렬한 통증이 미레아를 덮쳤다. 하지만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미레아는 무언가에 허벅지를 찔렸고 어깨에는 관통상을 입었다. 자신의 신체를 뾰족한 무기로 변형한 괴물이 미레아를 찌른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부상인데 여기저기 얻어맞고 뒹굴다 보니 다른 곳 역시 성한 데 없이 너덜너덜한 상태가 되었다.

“미레아!”

어딘가에서 라케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시오가 공격받은 것을 보았지만 시오가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던 탓에 막을 수 없었다. 술식이 발동하는 좌표를 알 수 없으니 마법을 파훼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무력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레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라케드가 공간 전이를 하여 그녀의 근처로 와서 기운이 빠진 미레아를 보호해 주었다. 하지만 마니샤 역시 라케드를 뒤쫓아온 것은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고통으로 떨려 오자 미레아는 뒤늦게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다. 이 상태로라면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몸도 마음도 평소와 달랐다. 최소한 라케드가 자신을 보호하느라고 신경을 분산하는 것은 피해야 했다. 라케드가 시간을 벌어 준 사이 미레아는 간신히 괴물을 따돌리고 땅을 뒹굴며 적들의 눈을 피해 건물 잔해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하하…….”

몸을 한껏 웅크리며 미레아는 힘없이 웃었다. 뒤늦게 자신의 몸을 살피니 어깨와 쇄골 사이의 관통상에서 출혈이 너무 심했다. 아무래도 큰 혈관을 당한 것 같았다. 겉옷을 벗어 출혈 부위를 꾹 눌러 지혈하는데도 불구하고 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즉사하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미레아는 오른팔에 들고 있던 아리스의 검을 놓지 않았다.

얼른 시오를 구하러 가야 하는데 기운이 점점 빠져 지혈하고 있던 팔에도 힘이 빠졌다. 잔해에 기대어 앉아 있던 미레아가 옆으로 쓰러졌다. 그 바람에 지혈하고 있던 팔에도 힘이 풀려 겉옷이 손 사이로 미끄러져 내렸다. 틀어막고 있던 것이 없어지자 피는 콸콸 흘러서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라케…… 드, 님…….”

미레아는 수적으로 열세에 몰린 라케드를 안타깝게 불렀다. 라케드는 미레아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포함하면 동료가 셋이나 있었지만, 그 셋 모두 제각각 떨어져서 고독한 싸움을 한 통에 라케드는 혼자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 역시 체력이 많이 깎였을 터였다. 라케드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으니 미레아는 이 일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시오를 구하러 가야 하는데…… 그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미레아는 팔로 바닥을 짚어 일어나려 했지만, 피에 미끄러져 다시 쓰러졌다. 몸뚱이도, 이 주변의 땅도 미레아의 피를 흠뻑 머금고 있었다. 미레아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끼며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은 이대로 죽는 것인가. 그럴 순 없었다. 시오도 구하고 황제에게 끌려간 아리스도 구해야 했다. 둘 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이대로 쓰러질 수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저 밖은 적들투성이였다.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검을 떨어트리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더 싸울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바스타드 소드를 끝까지 놓지 않을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적은…… 일어날 거야.”

미레아는 몸을 웅크렸다가 힘없이 옆으로 굴러 정자세로 누웠다.

“희망은, 만드는…… 것이라고.”

하늘이 파랬다. 미레아는 그것을 보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리스가 그리웠다. 떨어진 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가 보고 싶었다. 저 하늘 같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고 싶었다. 입으로는 얄미운 소리를 내뱉어도 사실은 그 누구보다 상냥하고, 그 누구보다 어깨에 진 짐이 많았고, 그렇기 때문에 웃는 것조차 어딘가 아파 보였던 그. 아리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했다.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파울로와 율비네가 있으니 괜찮을까. 이러저러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시오도 걱정스러웠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아리스에 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너를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아리스.

젠장, 희망.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해도 희망은 있을 것이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적은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5년 전에는 모든 것을 너무 빨리 포기해서 전부 잃은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지금도 희망을…….

하지만 이제는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미레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닦을 힘 따윈 없어서 흘러내리는 대로 내버려 두니 얼굴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또 자신이 모든 것을 망친 것 같았다. 시오를 구하지도 못했고, 이성을 잃어서 자신 역시 돌이킬 수 없는 큰 부상을 입어 버렸다. 이래서야 5년 전과 변함이 없었다. 결국, 이번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고 말뿐인 희망이 되어 버렸다.

저 너머에서 라케드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미레아는 잔해의 틈바구니로 라케드와 마니샤를 훔쳐보았다. 그리고 안도감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라케드 님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

그렇게 판단한 미레아가 힘없이 눈을 감으려고 할 때였다.

― 죽지 마!

누군가가 미레아에게 빽빽 소리를 질렀다.

“……뭐야?”

미레아는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미레아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자신을 부를 만한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헛소리라도 들었다고 판단해 다시 고개를 떨궜다. 그때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 일어나!

“깜짝이야!”

미레아가 간신히 정신 줄을 잡자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들어왔다.

― 죽지 마! 죽지 말란 말이야! 나를 쓰는데 죽으면 내가 뭐가 돼? 빨리 일어나서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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