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47화 (147/257)

147화.

제15장 마탄의 사수와 예지의 신녀

시오와 헤어진 미레아는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무기를 챙겨 일단 라케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라케드가 있는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줄을 지어 대피하는 어린 용들을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미레아는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검과 아리스에게 받은 검을 손에 하나씩 들었다. 아리스가 준 검은 바스타드 소드였던 탓에 미레아가 원래 사용하던 검보다 검신이 길었고 무거웠다. 하지만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레아는 종류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검을 잘 다루었으며 쌍검의 모양이 꼭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길이가 서로 다르면 다른 대로 그것을 활용해 공격하는 방법이 따로 있었다.

미레아는 아리스의 검을 든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아리스의 말로는 미레아의 검기가 자신의 기운과 비슷하다 그랬다. 그럴 확률이 극히 적은 탓에 미레아도 말로만 듣고 실제로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어서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검 손잡이에 두른 가죽이 아리스의 손에 맞게 자리 잡아 다소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라케드 님!”

라케드는 발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겉옷을 벗고 속에 입고 있던 옷만 걸친 단출한 옷차림이었다. 은현은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환도를 쥐고 진을 부축하고 있었다. 진 역시 자신의 도낏자루를 쥐고 있었지만, 그것을 휘두를 만한 기력은 없어 보였다.

넷은 방에서 나와 아직 공격하지 않고 하늘을 활강 중인 괴물들을 올려다보았다.

“왜 아직 공격하지 않는 거지?”

“저것들은 지능 같은 건 없어 보이긴 해도 라우노의 명령에 따르는 것 같았어요. 아마 명령이라도 기다리는 중인가 봐요.”

라케드는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 목표는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이야. 저것들을 전부 상대하겠단 생각은 버려라.”

“라케드 님은요?”

“나는 이 성소를 지켜야 해. 용들의 배아가 저들의 손에 넘어가면 그것이야말로 큰일이거든.”

“혼자서는 무리예요!”

미레아의 만류에도 라케드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장로다. 혼자는 무리라 해도 이곳을 지키는 것은 내 사명이야.”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요.”

“내가 포기하면 용들은 이번 세대로 끝이야!”

라케드의 표정에는 평소 그답지 않은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미레아가 검을 꽉 쥐며 말했다.

“저는 남겠습니다.”

“제정신이야? 너희는 아리스에게 가야 한다는 걸 잊었어?”

“용들도 이 세계의 일부예요. 구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라케드는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인간이 용을 만든 이유가 뭔지 잊었나? 용은 인간을 지키기 위해, 이 세계를 마수로부터 지키기 위해 태어났다. 이 세계와 인간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야. 네가 끼어들게 되면 주객전도란 말이다.”

그렇게 투덜거린 라케드는 귀찮다는 듯 미레아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정 돕고 싶으면 다른 어린 용들이 피난하는 것이나 도와. 그들과 함께 탈출해.”

그때 미레아의 주머니에서 기계음이 들리더니 시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죄송합니다만, 라케드 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미레아가 검과 함께 챙긴 통신기 채널이 열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레아와 라케드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오가 조금 긴장한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주객전도라고 하셨는데 라슈발렌은 이 라슈온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지키는 것을 제1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용들도 거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저희가 할 수 있을 만큼은 지원하게 해 주세요.

“멍청한 놈들.”

― 그리고 라케드 님은 저것들을 처음 보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한 번 붙어 본 경험도 있으니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라케드는 잠시 고민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놈들 마음대로 해라. 원래도 말 듣지 않던 놈들이 인제 와서 고분고분할 리 없지.”

라케드는 재빠르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미레아는 배아의 방으로 가는 길목에서 괴물들을 막아. 시오는 지금 있는 곳에서 우리의 사각지대를 엄호하도록. 나는 대피 중인 녀석들을 지키겠어. 은현과 진은 용들을 엄호하면서 탈출해. 진은 그 몸으로 싸우는 것은 무리다. 미레아와 시오가 날뛰는 것은 봐주겠다만 네놈은 토 달지 말고 말 들어. 탈출 경로로는 다른 숨겨진 성소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가 있다. 하지만 가동 시간에 제한이 있어. 워프 게이트는 총 5개고, 각 워프 게이트의 유지 시간은 30초다.”

라케드가 주변 상황을 파악하며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어림잡아서 100여 명이니 한 게이트 당 20명씩 나눠서 이동해. 이 이상 게이트 유지 시간을 벌려면 지속해서 마력을 공급해야 하는데 지금 여기 있는 사람 중 그만한 마력을 공급할 만한 사람이 없다. 여기 있는 녀석들은 아직 어린 녀석들이라 마력을 다루는 것이 미숙해. 그러니 어린 순으로 대피시키고 만약 시간 안에 게이트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이 성소 밑으로 지나는 지하 수로가 있다. 그것을 따라 대피하는 게 좋을 것이야.”

그러더니 무서운 얼굴로 은현에게 덧붙였다.

“대피하는 어린 용들이 잘못되지 않도록 꼭 지켜. 알겠나?”

은현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들 무운을.”

은현도 한마디 보탰다.

“이쪽 일이 정리되는 대로 다시 만나도록 하죠.”

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함께 아리스를 구하러 가요. 약속입니다.”

그 말에 은현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이 이제 막 용들의 대피를 돕고 있는데 하늘에서 누군가가 확성기로 커진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아, 아. 안녀엉~ 다들 내 목소리 잘 들려?”

익숙한 그 목소리에 미레아가 이를 꽉 물었다. 세피로스를 상대하던 금색 날개를 가진 데르카이드, 마니샤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녀는 선회하고 있는 괴물들의 정중앙에서 날갯짓을 하며 떠 있었다. 마니샤는 땅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기 있는 몇은 나와는 구면이지? 다시 만나서 반가워. 먼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너희 쥐새끼들이 도망간 워프 게이트의 좌표를 역추적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겠어. 아,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봤으니 이미 알려나?”

라케드가 혀를 찼다. 세피로스가 제대로 일 처리를 했다면 공간을 접은 자리에는 미약한 흔적만 남았을 텐데 데르카이드는 데르카이드였다. 설령 역추적한다 해도 시일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이틀도 안 걸려서 따라잡다니 예상보다 빨랐다.

“그래서 너희를 잡을 생각에 신이 났는데, 어머나! 너희들이 도망친 이곳이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용들의 성지가 아니겠어?”

그리고 깔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마석이 부족했는데 용주를 다량으로 얻을 기회가 생겼네. 이걸 마다할 리 없잖아.”

그 말에 라케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이내 사나운 눈으로 마니샤를 노려보았다.

“단순히 우리를 노리고 온 것이 아니군.”

이렇게 되면 지금 피난 중인 용들이 위험했다. 마니샤에게 산 채로 용주를 뽑혀 죽게 생겼다. 티몬에서 본 그 용골의 주인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곳은 이미 부화한 용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배아 상태의 용들이 가진 용주는 미숙하기는 하나 배아만 키워 낼 수 있다면 완전한 용주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 어느 것 하나 빼앗겨서는 안 되었다.

마니샤는 탐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뭐, 너희에게 유감은 없다는 것만 알아 둬.”

그 말을 끝으로 괴물들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내 말 알아들었으면 빨리 피해!”

라케드의 말에 은현과 진은 어린 용들을 데리고 뛰기 시작했다. 라케드가 그들의 뒤를 지키며 이 성지 전체에 거대한 결계를 만들어 내었다. 저쪽에 마니샤가 있는 한 오래 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일단 시간을 버는 것이 중요했다. 괴물들은 용들을 쫓다가 허공에서 결계에 막혀 그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미레아는 검을 고쳐 잡으며 눈으로 그것들의 움직임을 좇았다.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야. 저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 젠장! 암만 그렇다 해도 저걸 베는 게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

자신에게 세뇌를 걸던 미레아는 한동안 욕설을 내뱉었다. 손바닥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들었다.

“좋아, 어차피 내가 하지 않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야. 미룰 수 없지.”

미레아는 땀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오에게 무전을 걸었다.

“선배, 그쪽에서 볼 때는 저 괴물들이 몇이나 되는 것 같아?”

― 어림잡아 50은 되지 않을까.

시오가 다소 딱딱한 어투로 대답했다.

“뭐야, 생각보다 적은걸? 우리 셋이 17명씩 잡으면 되겠네. 어제와 비슷한걸?”

― ……너의 그 대책 없는 긍정은 어디서 나오는지 가끔 궁금해.

“왜? 자신 없어? 그럼 내가 25명 잡을게, 선배는 10명만 잡아. 나머지 15명은 라케드 님이 잡아 주시겠지.”

시오는 피식 웃었다. 앞서 공격받았을 때보다 수는 적었어도 이쪽 역시 은현을 제외하면 셋밖에 되지 않았다. 불리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허세 부리는 것은 미레아 나름대로 긴장을 풀어 주는 방식이었다.

미레아는 라케드가 지시 내렸던 대로 배아의 방문 앞으로 향했다. 복도를 달리면서 틈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상황을 살폈다. 밖의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마니샤의 지시를 따라 괴물들이 마력을 방출해 내자 결계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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