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선배, 진심이야?”
“어쩔 수 없잖아. 아리스를 어떻게 내버려 둬? 만사 제쳐 두고 가는 수밖에.”
그게 정말로 진심인 것 같아 시오의 의리에 미레아는 조금 감동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문제점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의 전력으로는 능력 밖의 일이야. 대책이 필요하다고.”
시오는 복잡한 건 싫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고민은 일단 접어 두고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리스를 구하러 가는 거지?”
“겸사겸사 라우노에게서 세계도 구하고.”
미레아의 말에 시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우와,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가 무슨 전설의 용사나 정의의 사도쯤 되는 것 같다.”
덕분에 무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화기애애하게 풀렸다. 은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류가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예요. 전력이 부족하다면 류가의 사병들을 동원하는 것도 고려해 보지요.”
“하지만, 고모님. 아이나 대륙에서 여기까지 움직이려면 시일도 걸리고 무엇보다 황제의 눈에 띄어요.”
진의 지적에 은현이 어쩔 수 없다며 말했다.
“지금 전력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맞으니까.”
그들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이러저러한 의견을 주고받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이가 들어와 허리를 숙이더니 시오와 미레아에게 말했다.
“장로님께서 부르십니다.”
그 말에 넷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가 앞장섰고 그 뒤를 따라 진이 탄 휠체어를 밀며 미레아는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시오가 말을 걸어오자 미레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냥. 서리 여신의 조각이 대체 무엇일지 생각하던 중이었어.”
“라케드 님 말로는 그건 다 지나간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 그러잖아. 그게 너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단 말이야. 알툰은 그게 제법 중요한 것처럼 말했거든. 내게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 있는 것이 이번 일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어. 역시 나중에 리비엘로에게 물어보거나 자료를 뒤져 봐야겠어.”
그들은 라케드의 집무실로 추정되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라케드는 집무용 책상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작게 한숨 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지 않아도 생각이 뻔히 보이는군. 보나 마나 아리스 녀석을 구하러 가겠다고 우길 거지?”
“그래야 하니까요.”
미레아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피로스도 없고, 다른 일행들과는 합류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어떤 방법을 쓸 건가?”
“지금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말린다 해도?”
라케드의 말에 미레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는 원래부터 세피로스의 번견이자 검이었고, 그의 검으로서 언제든지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의 일에 목숨을 잃을까 두렵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모두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찾겠습니다. 만약 라슈발렌의 일원으로 제가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불만이시라면 저는 라슈발렌을 그만두겠습니다. 제 행동에 제약이 있던 것은 세피로스의 밑에 있을 때고, 지금은 그가 없으니 라케드 님 말대로 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겠습니다.”
라케드가 그 특유의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비죽 웃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주눅 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의 파급은 알고 있냐?”
“네.”
“그런데도 하겠다고. 라슈발렌이란 뒷배도 없이 혼자 아리스를 구하고 라우노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혼자라 해도 방법을 찾겠습니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잠시만요, 라케드 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은현이 나섰다.
“미레아 제인스터 양은 혼자가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저희 가문에서 지원을 할 것입니다.”
“류은현 님…….”
미레아가 감동한 얼굴로 은현을 바라보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바라보지 마세요. 제 아들 일이니 제가 나서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오는 머리통 뒤로 손을 받쳐 들고 조금 건들거리는 자세로 말했다.
“저도 이번 일을 그냥 넘기자니 참 찝찝해서요. 라슈발렌 나간다고 제가 갈 곳 없는 건 아니거든요.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저격수를 스카우트하고 싶어 하는 곳이 한둘이어야 말이지요.”
그 말에 라케드는 못마땅한 얼굴로 미간을 찡그렸다.
“세피로스가 없는 동안은 벨로아 부회장과 내가 그의 대리다. 세피로스와 연락 두절인 지금 네 녀석들 처분에 대한 사항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소리지.”
미레아와 시오는 라케드의 해고 통보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일이었다.
“휴가를 낼 기회를 주지. 기간은 한 달. 괜찮겠나?”
라케드의 말에 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케드는 검지를 까닥거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단, 무급이다.”
“감사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라슈발렌에게 지원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용들을 움직일 수는 없을까요? 이건 마수에 관련된 일이잖아요. 그러면 원래 마수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던 용들이니 이 일에 개입하기는 명분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은현이 의견을 내었지만, 라케드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마수가 문제가 된다면 그때는 용들이 나서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루아드 제국 황실의 일이고 그 일에 용들이 개입할 구실이 없어.”
“그럼 역시 저희 가문의 사병들을 움직여서…….”
진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사병들이 마이련에서 루아드까지 가장 빠른 루트로 이동한다면 얼마나 걸릴까요?”
미레아의 질문에 은현이 대답했다.
“적어도 4일…… 연락을 넣고 준비해서 출발하는데 하루, 여기까지 이동하는 기간이 하루, 그리고 루아드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이틀. 그 정도 되는 인원들이 워프 게이트로 이동할 수 없으니 비공정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황제의 눈을 피해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생각보다 빠르긴 한데 그래도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황제에게 시간을 줘 봤자 좋을 건 없어 보이거든요.”
초조하게 말하는 미레아에게 시오가 어깨를 지그시 누르면서 진정시켰다.
“그래 봤자 4일이라고, 미레아.”
“내가 잠들어 있던 시간까지 합하면 5일이지. 무슨 일이 일어나기엔 충분한 시간이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 바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가 바뀌었다. 잠시 대화가 멈춘 사이 미레아는 창밖의 하늘이 지나치게 새파란 것을 보며 이보다 더 평화로울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복도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소란스러운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라케드가 감히 누가 이 성지에서 뛰어 다니냐며 한 소리 해 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라케드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용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장로님! 밖으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한 라케드는 그 용을 앞세워서 달려 나갔다. 남은 사람들 역시 라케드를 따라나섰다.
“저게 뭐지……?”
은현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얀 날개를 가진 괴물들이 마치 시체를 노리는 까마귀 떼처럼 성지 위의 하늘을 뱅뱅 맴돌고 있었다.
“저게 너희가 말한 인조 데르카이드냐?”
라케드의 질문에 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틀 전에 우리를 덮친 수보다는 적어 보이네요.”
미레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무기를 가져올게.”
시오가 자신의 소총을 찾아오기 위해 달렸고 미레아 역시 자신이 자고 있던 방에 둔 검을 가져오기 위해 그 뒤를 따랐다.
“젠장, 여기는 대부분 10대밖에 안 된 어린 용들이 지내는지라 용의 전력을 기대할 수 없어!”
용이 제 실력을 발휘하려면 적어도 20살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성체 용은 라케드를 제외하면 없다고 봐야 했다. 독립한 성체 용들이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체가 되면 이 성지를 나가기 때문이었다. 실질적인 전력은 라케드를 포함해 봤자 시오와 미레아가 전부였고 진은 부상 때문에 싸울 만한 몸이 아니었다. 잘 봐 줘서 은현을 전력에 포함해 봤자 전투력이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시오와 미레아는 승강기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러 대며 하늘을 보았다. 인조 데르카이드들은 아까보다 더 늘어나 있었다.
“망할, 여기는 대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승강기 문이 열리고 둘이 들어가 위로 올라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폭발음이 들리며 승강기가 흔들렸다. 밖을 볼 수 없으니 둘은 욕설을 퍼부으며 승강기 숫자가 변하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다행히도 추가적인 이상 없이 해당 층에 승강기가 멈추며 문이 열렸다. 둘이 갈라서기 전에 시오가 말했다.
“나는 저격 포인트에서 너희를 엄호할게!”
그렇게 되면 시오는 홀로 떨어진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저격수의 역할이 그것이었다. 외떨어져서 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숨기고 총알을 박아 주는 것. 저격수의 싸움은 외롭고, 고독한 전투다. 그것을 아는 미레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선배, 괜찮겠어?”
그 말에 시오는 씩 웃었다. 저격수는 몸을 숨기는 것이 특기다.
“나 이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저격수야. 이 선배가 바로 ‘시오 미도르’라고. 나 못 믿어?”
엄지로 자신을 척 가리키는 시오를 보며 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투가 끝나면 한 손가락 안에 들게 될 거야.”
미레아가 그렇게 말하자 시오가 그녀의 팔을 툭 쳤다.
“죽지 마.”
“선배야말로.”
둘은 가볍게 주먹을 부딪치고 갈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