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45화 (145/257)

145화.

“네 말이 오답은 아니지.”

시오의 대답에 라케드는 잠시 걸음을 늦추었다. 시오가 기운 빠진 얼굴로 물었다.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세피로스 회장님하고는 연락할 수 없고, 다른 일행들 생사는 모르겠고…… 임무는 실패한 채로 이렇게 마무리되는 건가요?”

“네 말대로 지금 이 상태라면 이번 임무는 실패한 채로 끝이지만 할 일은 아직 남아 있다.”

라케드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쳤다.

“인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너희에게 하는 이유는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하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 어떤 연유로 이런 일들을 저지르는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 대응하기 쉽지. 나중에 내가 못 한다면 너희가 아리스에게 이러한 이야기들을 전해다오. 그 녀석도 알고 있어야 하는 이야기다. 다만, 지금은 전력이 분산되어 버렸으니 앞으로는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여. 세피로스 회장은 지금 명령을 전달할 처지가 못 돼.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너희들이 결정해라. 하지만 조심해. 라우노는 너희, 특히 미레아 제인스터 네 목숨을 노리고 있으니까.”

“그런데 라우노는 제 목숨을 한번 구해 준 적이 있잖아요. 왜 인제 와서 제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말했잖아. 지금은 상황이 이전과 달라. 네가 부식 지역 안에서 라우노를 만났던 시기에는 그가 너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가 사라졌지. 아니, 오히려 너를 죽이기 적당한 시기라고 생각할 거다.”

“대체 왜…….”

“서리 여신의 조각은 이제 쓰임이 다했거든.”

“저요? 제 쓰임이 다 했다고요?”

라케드는 미레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가 평범한 인간이라고 한 거야. 서리 여신의 조각이란 것은, 그러니까 너는 네가 모르는 사이 쓰임이 다했고 그 당시에 네가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지금도 여신의 조각이란 것은 네게 아무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쓰임이 다 했으면 그냥 두어도 상관없다는 소리 아닌가요? 왜 굳이 죽이려고 하는지…….”

“쓰임이 다했을 때 쓰이는 방법이 또 있거든.”

이상한 선문답에 미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 이후 라케드는 입을 꾹 다물고 걷기만 했다. 미레아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라케드와 두 사람이 걷는 동안 어린 용들이 그 곁을 지나면서 장로에게 인사를 했다.

“류진이 자네들 걱정을 하더군. 얼굴 정도는 내비쳐 줘라. 그 이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주마.”

라케드는 두 사람을 승강기까지 데려다주었다. 병동은 5층이라고 알려 준 그는 잠시 알아볼 것이 있다며 두 사람만 보냈다. 귀찮은 것을 떠미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병실에는 진이 배에 붕대를 둘둘 감고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고작 하루 이틀 만에 얼굴이 수척해지고 입술이 파리했지만 위독한 상황은 아니었다. 둘은 진을 보고 반가움과 서러움이 밀려와 징징거리면서 다가갔다. 진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주고 등에는 푹신한 쿠션을 받쳐 주자 그녀는 활력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야, 남이 보면 내가 죽은 줄 알겠다. 다행히도 비장을 비껴가서 살았지 뭐야. 1cm만 옆으로 찔렸어도 과다 출혈로 죽었을 거야.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라 죽을 정도로 아프긴 하지만.”

진은 하하 웃더니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아리스는 황제에게 끌려갔다지.”

그 말에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마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진의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미레아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진은 알고 있었어? 이 세상의 비밀이란 것.”

시오의 말에 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둘은 진에게 조금 전 라케드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진은 중간중간 놀란 얼굴을 하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음, 믿기 힘들긴 하지만 일단 알았어. 사실 그나마도 간단하게 줄인 부분만 알아들었지만.”

“그러니까 아리스에게 내린 신탁이 실현되는 것을 막으려면 라우노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 건데…….”

“이럴 때 움직이지 못하는 게 분해 죽겠네.”

진이 배에 두른 붕대 위로 손을 올리고 혀를 찼다. 시오는 손깍지를 끼고 턱을 괴었다.

“세피로스 회장은 행방을 알 수 없고, 파울로와 율비네는 붙잡혀 있고…… 그나마 위안인 건 본부로 이동한 리비엘로와 라일라, 쿤둘렌의 안위는 괜찮다는 것 정도인가…….”

“선배, 어떻게 할까?”

“몸을 사리고 싶으면 이곳에서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꼼짝하지 않는 게 정답이야.”

“하지만.”

“그래, 너는 그러고 싶지 않겠지.”

시오가 씩 웃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이대로 당하고 있기 자존심 상하고 분하잖아? 무엇보다 아리스가 걱정인 걸.”

시오는 팔짱을 끼고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우선 라케드 님을 통해 본부에 연락을 넣자. 라일라와 리비엘로가 필요해. 리비엘로의 예지 능력을 쓴다면 무엇인가 나올 수도 있어. 그리고 파울로와 다른 사람들이 무사하다면 그들도 라슈발렌 본부로 연락을 넣으려 할 거야. 적어도 그들의 행방을 알 수는 있겠지.”

진과 미레아는 그 말에 수긍했다.

“문제는 세피로스 회장인데…… 나 참, 어디로 사라진 건지.”

“그 도마뱀은 우리 중 가장 멀쩡할 것 같은 사람이니 걱정하지 말자.”

미레아가 살짝 떨리는 손가락을 감추며 중얼거렸다.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류은현이 부드러운 쌀죽이 담긴 쟁반을 들고 찾아왔다.

“아, 고모님. 일부러 찾아오신 거예요?”

진이 반갑게 맞이했다. 은현은 간이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침대 옆에 앉았다.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방해를 한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네요. 하지만 저 역시 가만히 있자니 여러모로 걱정되어서…….”

“아니에요, 아리스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일에 대해서 말인데, 역시 제가 나설까 봐요.”

은현의 말에 미레아와 시오가 손을 내저었다.

“은현 님을 협상 카드로 쓸 수 없어요! 그건 아리스도 원하지 않을 것이고 일부러 이런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데 지금 나서면 말짱 헛된 일이 될 수도 있고…….”

미레아가 만류하자 은현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어머, 제가 나서겠다고 한 뜻은 전력에 보태겠다는 소리였어요.”

미레아와 시오가 말을 이해한 것 같지 않자 은현은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스의 검술은 제가 가르쳤답니다. 검술로라면 웬만한 기사에게도 뒤지지 않아요.”

“우리 류가 집안은 무인 가문이니까.”

진이 자랑스럽게 말하는 동안 은현은 죽을 떠 후후 불어 먹기 좋게 식힌 다음 진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죽을 삼키고 말했다.

“그래도 고모님이 전력에 추가된다 해도 우리끼리는 아리스를 빼 올 수 없어. 황실을 침입하는 것까지는 어찌어찌한다 해도 그쪽에는 라우노가 있잖아. 거기에 그 하얀 괴물 놈들까지 있다면 무리야. 이미 한번 참패해 봤으니 알잖아.”

“그래도 한 번 겪어 봤으니 작전을 새로 세울 수는 있겠지.”

시오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가늘게 뜨며 진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설마 끼어들 생각이야? 진은 그냥 이번 일에서 빠지는 게 좋지 않을까? 그 상처, 무리 없이 회복하려면 한 달은 걸릴 텐데.”

하지만 진은 죽을 꿀떡 삼키더니 결의에 가득 찬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 동생 일이야. 그 녀석이 잘못되는 걸 손 놓고 볼 바에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미레아가 작게 웃었다.

“아리스는 진과 다른 가족들에겐 자신이 없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다들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바보 녀석이지. 다시 만나면 한 대 때려 줘야겠어. 그때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류가를 못 떠나게 해야 했어.”

진은 손가락 관절을 뚝뚝 꺾다가 은현의 눈치를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양손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아리스는 예나 지금이나 짊어질 것이 많은 자리였지만, 그렇다 해도 그걸 혼자서 해결하라는 의미가 아닌데…… 누굴 닮았는지 고집이 쎄다니까요.”

은현의 말에 미레아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피로스 회장이 있다면 라슈발렌에 추가 전력을 요청할 수 있을 텐데.”

“그건 무리일 거야.”

시오가 고개를 저었다.

“첫째, 우리 라슈발렌에는 아리스의 처분권이 없어. 아리스가 황제에게 끌려간 이상 그 일에 관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거든. 라슈발렌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분쟁을 해결하긴 하지만 내정간섭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둘째, 애초에 이번 임무는 극비였어. 라우노의 존재도 알려져 봤자 좋을 건 없고. 무엇보다 셋째가 가장 문제인데, 세계의 비밀? 용들이 사실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인조 생명체라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져 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그리고 인간들이 이 땅에 이주해 오면서 마수들을 끌어들여 오빈들이 휘말리게 했다는 것을 오빈들이 알면? 그거야말로 종족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일일 수밖에 없어. 물론 우리에게는 비밀 유지 조항이 있어. 하지만 입이 많으면 이야기가 밖으로 새는 것은 시간문제고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있는 이상 그것들이 순식간에 퍼지는 것은 일도 아니야.”

“시오 선배의 말대로라면 라슈발렌의 일이 아니고 우리 개인의 일로써 처리를 해야 해. 우리가 라슈발렌 소속이 아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이라고.”

미레아는 퍽 난감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오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라슈발렌을 나가야 한다면 그렇게 하는 쪽도 생각해 봐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