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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144화 (144/257)

144화.

세피로스는 그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세피로스가 니콜라우스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하지만 니콜라우스의 분노를 멈출 수는 없었다.

세피로스에게 악을 쓰거나 그를 공격하는 대신 니콜라우스는 하얀 날개를 펼쳤다.

“잘 있어, 세피로스.”

세피로스는 니콜라우스의 부모이자, 스승이자, 친구였다. 그런 그에게 니콜라우스는 작별을 고했다.

“오래 걸렸지만, 이제는 당신에게서 독립할 때지.”

니콜라우스는 서럽게 웃으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어…… 그럼 정리를 하자면…… 데르카이드의 정체는 마수의 영소가 섞인 인간이라는 소리고, 그중에서도 페이릭의 영소를 가장 많이 갖고 태어난 것이 니콜라우스고…… 그 니콜라우스가 지금은 둘로 나뉘어서 우리가 본 쪽은 라우노란 사람이고…….”

시오가 지금까지 들은 내용을 요약하며 머리를 싸맸다.

“그럼 니콜라우스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라케드의 말을 듣던 미레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라케드는 그런 그녀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대답해 주었다.

“니콜라우스에게서 떨어져 나온 아이는 거의 인간이나 다름없었어. 마수의 영소는 대부분 니콜라우스가 가져갔거든. 아이는 인간이 영소…… 정확하게는 페이릭의 영소로 태어난 상태였지. 페이릭이 용이었단 것은 그 아이가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그렇게 문제 되지 않았어. 용은 인간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과 용의 영소는 똑같았거든. 하지만 니콜라우스가 페이릭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 아이를 페이릭이라 부를 수는 없었어.”

그는 세피로스가 동면하고 있었던 인큐베이터를 다시 원래의 상태로 정리하며 설명을 이었다.

“세피로스는…… 니콜라우스의 말대로 그에게서 페이릭을 투영했지. 니콜라우스가 페이릭이 아니라 해도 세피로스는 상관없었다. 니콜라우스는 페이릭의 유산과도 같았으니까. 그런 그에게 페이릭이었던 것을 떼어 내면…… 세피로스는 그를 페이릭의 유산으로 취급하지 않았어. 그저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마수라 여겼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야. 그는 마수에 대항하기 위해 태어났고, 우리 용들은 저마다 본능적으로 마수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거든. 마수나 다름없는 상태인 그를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지.”

라케드는 둘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뭐, 그 애는 세피로스의 손을 떠나 인간의 가정에 맡겨졌어. 무얼 해도 세피로스는 그 아이에게서 페이릭을 볼 수밖에 없었고 니콜라우스 사이에 있었던 일 같은 것이 벌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지. 그렇게 그 앤 평범한 인간으로 자랐어.”

미레아는 머릿속으로 세월을 가늠해 보았다.

“40년 전이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네요? 그래서 세피로스와 라케드 님의 바람대로 그는 인간으로 자랐나요?”

“그래. 인간으로 자라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잘 살았어.”

미레아는 고개를 끄덕이다 라케드가 말하는 시점이 과거형인 것을 깨닫고 또 질문했다.

“왜 과거형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지금은 죽었어.”

그 말에 시오가 쯧쯧 혀를 찼다.

“저런…… 요절했군요. 혹시 그의 태생적인 문제 때문인가요?”

라케드는 적절한 표현을 고르려 그랬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직설적으로 말했다.

“태생적인 문제가 절반,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던 문제가 절반이지만 그게 그렇게 단순한 죽음은 아니었거든.”

라케드는 미레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페이릭이 붉은 머리였고, 니콜라우스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 아이도 붉은 머리라 그랬지? 그걸 듣고 뭔가 떠오르는 것이 없냐?”

미레아는 눈을 깜박이다 자신이 붉은 머리였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겪었던 문제점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어…… 옷 색깔 고르기 힘들었겠다?”

“멍청한 것.”

라케드가 인상을 팍 쓰며 중얼거렸다. 미레아가 움찔거리자 라케드는 한숨을 쉬며 정답을 알려 주었다.

“그 아이가 입양 간 집에서 그의 이름을 새로 지어 줬다. 제인스터 부부는 상당히 인정 넘치는 사람들이었어. 덕분에 케이드는 그렇게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지.”

“……?”

라케드의 뒤를 따르던 미레아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우리 아빠랑 이름이 똑같은데요……?”

“모른 척하는 거냐,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거냐? 멍청한 것.”

미레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 아빠가 그 아이라고요? 니콜라우스에서 떨어져 나와 페이릭의 영소로 태어난…… 그 사람이?!”

시오의 입도 같이 벌어졌다. 라케드는 그런 그들에게 혀를 끌끌 차 주었다.

“아니, 그런 대단한 사건의 장본인이 우리 아빠라니! 제겐 먼 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니까 당연히 의심하기 힘들잖아요!”

그는 충격받은 미레아를 내버려 두고 제 갈 길을 갔다. 미레아와 시오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눈을 끔벅이다 라케드가 저만치 가고 나서야 후다닥 쫓아갔다.

“그럼 아빠는 대체 뭐예요? 지금까지 저에게 숨긴 거예요? 엄마는 이런 걸 다 알고 있었어요?”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 해라. 나는 입이 한 개거든. 가장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자면, 레인은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저에게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은 거죠?”

“케이드의 출생은 평범한 인간과 다르긴 했지만, 그 이외의 것은 전부 평범한 인간이었다.”

“라케드 님의 평범한 인간의 기준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요. 아빠가 평범한 인간이었다고요? 그 괴물 같은 실력이?”

미레아는 검을 잡은 이후 한 번도 케이드에게 이긴 적이 없었다. 케이드의 검술 실력은 출중했고 세피로스라는 뒷배가 영향을 끼치기도 전에 홀로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라슈발렌 전투부 부장의 자리에 올랐다. 미레아는 인간 중에 데르카이드도 아닌데 케이드만큼 강한 사람은 본 역사가 없었다. 하지만 라케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케이드는 니콜라우스와 페이릭의 영소에 남아 있던 기억의 잔재 덕분인지 마수에 대항해 싸우는 실력이 출중하긴 했다. 그래서 텔라인에서 눈독을 들였는데 세피로스가 뺏기기 싫다며 라슈발렌으로 꽂아 넣었지.”

미레아는 어이가 없어서 연신 헛웃음을 들이켰다.

“어쨌든 지금의 니콜라우스는 예전의 니콜라우스가 아니야. 그가 자신을 스스로 라우노 듀랜트라 칭했으니 앞으로는 그 이름으로 불러 주지.”

라케드가 가장 가까운 출입문으로 다가가자 육중한 문이 저절로 열렸다. 한동안 어두웠던 내부에 있다가 해가 밝은 곳으로 라케드를 따라 나온 그들은 잠시 눈을 찌푸려야 했다.

“라우노 듀랜트의 목적은 세피로스에게 들어서 알고 있지?”

“네. 이 세계를 마수의 세계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그렇다. 앞서 말했듯 라우노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마수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면 돼. 마수가 영소를 탐하듯 라우노 역시 이 라슈온의 영소를 독차지하고 싶어 하지.”

둘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라케드의 뒤를 따랐다.

“너희가 맡았던 임무의 목적은 단순히 마검의 회수와 마수 토벌이 아니었어. 라우노가 페니드란을 손에 넣는 것을 방해하기 위함이었지.”

“세피로스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시오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했다.

“라우노는 마검으로 무슨 일을 하려 그런 것일까요?”

“서리 여신을 죽일 생각이겠지. 평범한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으니.”

“여신을…… 죽여요?”

시오의 입매가 굳었다.

“보비네도 가사 상태로 잠들어 있고 서리 여신만 없으면 이 세상은 마수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라우노가 왜 황제를 시켜 아리스를 죽이려 했을까? 그것은 간단해. 아리스는 서리 여신을 죽일 힘을 가지고 있거든. 황제는 그것을 두려워했고 라우노는 그것을 이용했다. 아리스에게 절망을 맛보게 하고 싶어 했어. 그래야 세상에 대한 증오를 품을 것 아닌가.”

“음…… 이야기를 들어도 잘 모르겠어요.”

미레아와 시오가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우노는 심리전에 능했어. 그리고 아리스는 라우노의 뜻대로 이 세상을 부정하고 싶어 했지. 그런 식으로 아리스를 갉아먹은 라우노는 자신의 힘에 아리스의 마력을 쏟아부어 만든 마검의 힘을 보태 서리 여신을 죽일 생각이야. 하지만 마검 페니드란은 주인에게 충성심이 강한 검. 라우노가 그것을 다룰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아리스가 필요한 것이지. 자신은 뒤로 빠져 있고 아리스를 이용해 서리 여신을 죽이는 것이 그의 계획이야.”

미레아는 알툰이 왜 보비네의 시점으로 이 사건을 보여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세계는 원래 보비네가 만들고 가꿔 온 곳이다. 지금은 비록 이(異)세계에서 온 이방인들인 인간과 용들이 함께 살고 있지만, 다시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인간들과는 달리 이 세계를 가장 사랑하는 것은 보비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인간의 시점보다는 보비네의 감정이 얼마나 절절한지, 그리고 얼마나 절박한지 미레아에게 이해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때의 미레아는 보비네에게 이입하여 감정이 격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었다.

“그럼 아리스에게 내린 신탁은 정말 실현되는 건가요? 이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자라는 것 말이에요. 아리스가 서리 여신을 죽이게 되면 서리 여신의 말대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실제로 라우노가 믿고 노리는 것이 그거지. 지금 상황에서 서리 여신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사람은 아리스가 유일하니 말이다.”

라케드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시오는 눈썹을 늘어트리며 물었다.

“그럼, 그때는 어떡해요?”

그 말에 라케드는 반문했다.

“너희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요컨대 라우노만 막으면 아리스는 이 세계를 멸망시킬 필요가 된다는 소리잖아요. 말은 맨날 종말론자 같은 소리나 하지만 사실은 아리스도 이 세계의 끝을 바라지 않아요. 일단 라우노를 막으면 어떻게든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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