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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따라 종말까지-142화 (142/257)

142화.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새하얀 백발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잔뜩 주눅 든 그 모습은 여타 다른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았다.

“페이릭의 영소를 가지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마수의 영소 역시 가지고 있다면서.”

“그런데 그는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말이 돼?”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고민해 봤자 결과물이 여기 있잖습니까.”

그 말에 세피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니콜라우스를 노려보다가 결론지었다.

“그래 봤자 이 아이는 페이릭이 아니야. 나를 이딴 것으로 구슬려 보고 싶었다면 안타깝게도 그건 실패야.”

“하지만 일부이기는 해도 페이릭의 환생이기도 하지요.”

“아니야. 페이릭은 그때 죽었어. 환생은 의미가 없어.”

세피로스가 고개를 젓자 니콜라우스가 더 움츠러들었다. 라케드는 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잘못했다는 소리는 아니니 두려워 말아라.”

그 말에 니콜라우스가 세피로스의 눈치를 보며 라케드의 뒤로 숨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라슈온이 다시 마수들의 소굴로 변하는 것을 방관하실 생각이십니까. 서리 여신께서는 당신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서리 여신의 힘으로 겨우 유지 중인 이 땅을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지금은 서리 여신이라 부르는가…….”

세피로스가 피식 웃었다.

“윤설.”

세피로스가 라케드에게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적어도 그녀의 본명 정도는 기억해 둬.”

“송구합니다. 테나력 이전의 기록 중 대부분이 보안상 접근이 어려워 그분의 본명을 지금까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기억해 두겠습니다.”

세피로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세수하였다.

“그러니까 테나력 이전의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있는 건 나밖에 없다 이 말이로군.”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보비네는? 아직도 가사 상태인가?”

“그렇습니다. 언제 회복할지 기약이 없는 상태입니다.”

“도대체 당신들은 3,000년 동안 뭘 한 거야?”

세피로스는 저도 모르게 화를 내었다.

“그동안 설을 그런 식으로 방치한 거야?”

“죄송합니다. 노력 중이나 현재로선 보비네를 깨울 기술력이 부족한 데다 당시 부상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3,000년 전의 마도 공학 수준은 이미 잃어버린 기술이 되어 라슈온은 한 번 퇴보를 겪었습니다. 그 격차를 줄이는데 무려 3,0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아니, 과거에 비하면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많은 기술을 되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케드는 깔끔하게 상황을 일축하며 용들을 대표로 사과하였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대로라면 다시 한번 문명의 퇴보가 있을 수밖에 없을뿐더러, 인류의 존망마저 위협적이라는 점입니다. 긍정적인 점이라면 마수가 나타난 지 아직 2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아 진화 정도가 낮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최근에 마수의 진화 속도가 과거와는 달리 점점 빨라지려는 기미가 보여 상황이 심각해지려는 터라 당신을 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피로스는 라케드의 말을 들으며 그의 뒤에 숨어 있는 니콜라우스를 응시했다.

“너.”

니콜라우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오른 얼굴을 라케드의 등 뒤에서 반절만 내보였다.

“니콜라우스, 네 성은?”

“성은…… 없어요. 저는 어릴 때 부모님에게 버려져서…….”

“니콜라우스란 이름은 제가 지어 준 이름입니다. 과거에 승리를 뜻하는 이름이라 들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제법 거창한 이름을 붙였군. 나이는?”

“9살이요.”

“그래. 혹시 좋아하는 음식이 뭐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니콜라우스는 대답을 신중하게 골랐지만, 라케드가 그를 툭 쳐서 부담 갖지 말라며 독려했다.

“어, 얼마 전에 먹었던 블루베리 잼이 올라간 크림치즈 케이크요.”

“좋아하는 색은?”

“녹색이요.”

“취미는?”

“취미…… 라고 할 게 딱히 없지만 좋아하는 일을 꼽자면 책 읽는 것을 좋아해요.”

“개랑 고양이 중 어느 쪽이 좋아?”

“고양이요. 큰 개는 무섭지만, 고양이는 그렇게 무섭지 않아요.”

세피로스는 그 이후로도 니콜라우스에게 시답지 않은 질문을 몇 가지 더 했고 결론을 내렸다.

“페이릭이 아니야.”

세피로스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페이릭일 리 없지.”

그를 부정하는 듯한 말에 니콜라우스는 흠칫 떨었지만 세피로스는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로 말을 한 것이었다.

“니콜라우스, 잘 부탁해.”

“감사합니다.”

세피로스는 다시 라케드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니콜라우스가 페이릭과 마수의 영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뜻이 무슨 의미지?”

그 말에 라케드는 니콜라우스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보여 드려.”

“괜찮나요?”

“그래. 걱정하지 마라.”

니콜라우스는 세피로스와 라케드에게 한걸음 뒤로 무르더니 마력을 방출했다. 그의 주변으로 영소끼리 마찰을 일으켜 붉은 스파크가 튀었고 등 뒤로 하얀 날개가 돋아났다. 세피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지?”

세피로스는 저도 모르게 다소 무례한 언사가 튀어나왔다. 뒤늦게 그가 왜 등이 드러난 옷을 입고 있는지 이해가 갔다.

“그는 인간임에도 마력의 증폭기나 촉매 없이 마법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습니다.”

“저 날개는 뭔데?”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라케드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니콜라우스의 정수리를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이런 존재가 니콜라우스 하나인 것은 아닙니다. 니콜라우스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날개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게 뭘 의미하는 건가?”

“니콜라우스와 비슷하게 마수의 영소를 지닌 이들이 태어나고 있다는 소리지요.”

“페이릭의 영소는?”

“저희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페이릭의 영소는 대부분 니콜라우스가 가지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 날개를 가진 다른 이들은 마수의 영소가 일반적인 영소에 섞여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마수의 영소는 서리 여신의 관할 아래 있지 않으니 마력을 증폭기 없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 중입니다.”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는군.”

세피로스는 혀를 찼다.

“당신들이 허겁지겁 나를 깨울 만했어.”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피로스는 마른세수하고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니콜라우스 저 아이는…… 우리의 적인가?”

그 말에 라케드 대신 니콜라우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라케드와 세피로스가 저를 어떻게 할까 봐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라케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니콜라우스는 그렇게 말하는 라케드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제가 잘할게요!”

“당장 너를 어떻게 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저 우리를 조금 도와주길 바란다.”

니콜라우스를 안심시킨 세피로스는 마침내 두 다리로 일어서서 기지개를 쭉 켰다.

“알아볼 게 한둘이 아니군. 우선은 3,0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알아야겠어.”

라케드가 세피로스에게 허리를 숙였다.

“불편함 없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세피로스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나저나 당신 정도 되는 장로가 내 뒷바라지나 하고 있어도 괜찮은 거야?”

“당신은 1세대 용이시고 당신에게 여러 정보를 드릴 수 있는 것은 그나마 가장 오래 살아온 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거로 괘념치 않습니다.”

“뭐, 그렇다면 그 이상은 내 알 바 아니긴 하지.”

세피로스는 그렇게 두 번째 삶을 살아 보기로 했다. 니콜라우스의 존재는 그만큼 그에게 의미 있었다. 비록, 페이릭은 아니었지만 그를 추억하기에는 적당한 대상이었다. 그것이 세피로스가 페이릭에게 보내는 추모와 존중의 방식이었다.

* * *

마수 대전이 마무리될 무렵 니콜라우스의 나이는 어느덧 20대 후반이었다. 서리 교단에서 니콜라우스와 같은 존재를 데르카이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는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최초의 데르카이드 백익(白翼) 니콜라우스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었다. 그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고 전투마다 승승장구하며 자신의 실력을 과시했다.

마수 대전이 끝나고 짧은 평화를 누리는 몇 년 동안 니콜라우스는 세피로스와 함께 지냈다. 마수들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마수 부대 텔라인과 종종 일을 같이 하며 마수를 토벌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생활하는 동안 제법 오랜 세월이 흘렀다. 평범한 인간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며 우정을 쌓고 사랑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몇 년을 지내는 동안 니콜라우스는 자기 자신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눈치채기 시작했다. 다른 데르카이드와도 자신은 무언가 달랐다. 세월이 흘러 40대가 다 되어 가는 나이었음에도 니콜라우스는 20대 이후로 노화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니콜라우스는 자기 자신과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 했다. 마력을 대량 방출하며 싸울 때마다 허기가 느껴졌다. 그는 그것이 마수가 영소를 지닌 생명에게 느끼는 허기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남에게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영소는 페이릭과 마수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마수의 영소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이들이 알면 그 파급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니콜라우스는 바로 은거에 들어갔다. 세간이 자신을 무엇이라 정의할지 무서웠다.

그는 이미 백익이라는 이명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데 늙지도 않는다 하면 그때는 정말로 괴물이라 그럴까? 여론이란 것은 너무나도 쉽게 바뀌어 버리기 때문에 니콜라우스는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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