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근 3,000년 만에 깨어난 세피로스는 아주 긴 세월 동안 잠들었던 여파로 한동안 의식이 멍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여기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남은 기록이 대부분 소실된 까닭에 세피로스를 깨운 용의 장로들도 그의 이름이 세피로스라는 것, 그리고 그가 1세대 용이라는 것밖에 몰랐다.
세피로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생존한 1세대 용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귀중한 전력이 되리라 판단했다. 그래서 세피로스는 한동안 용들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천천히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떠올린 것은 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흑갈색에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여인은 세피로스에게 다정하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고, 세피로스가 대답을 하면 종종 노트에 무언가를 받아 적기도 했다.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여인의 옆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던 붉은 머리를 한 남자였다. 그 역시 세피로스에게 잘해 주었다는 기억이 났다. 그들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세피로스는 겨우 막고 있던 댐이 무너지듯 슬픔이 덮쳐 와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 이름은 윤설이었지만 세피로스가 애칭처럼 부르던 그녀의 이름은 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 이외 존재의 이름을 안 사람이자 자신을 만들어 낸 사람. 설은 소녀 같은 면이 있었고, 때로는 당돌하기도 했다. 용을 연구하는 처지였지만 그 과정에서 세피로스가 상처받거나 불편해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었다.
설의 연인이었던 페이릭은 20대 후반에 노화가 멈춘 상태로 200년가량을 살아왔다. 항상 쾌활했고 보고만 있어도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다.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머리는 그의 상징이었고 자수정처럼 빛나는 자색 눈동자는 언제나 흔들림 없이 또렷했다.
사실 인간들이 페이릭을 만들어 낸 건 반쯤 우연에 가까웠다. 정신계 에너지를 연구하던 끝에 마법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자재로 몸의 변형을 이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었고 그것의 최종 도달점이 바로 인간과 유사한 외형을 지녔으면서 전설 속의 생명체로 변신할 수 있는 용이었다.
페이릭의 존재는 마수에 대항하는 인간들에게 희망이었고 구세주였다. 그래서 페이릭을 연구해 그와 비슷한 용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들의 과제가 되었다. 페이릭은 설이 초임 연구원일 무렵부터 함께했다.
세피로스는 설과 페이릭의 손에서 자랐다. 당시 최초의 용인 페이릭 이후에 만들어진 1세대 용들은 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성장 촉진제를 맞으며 고등 교육을 함께 진행했는데 세피로스는 그중에서도 상당히 우수한 편이었다.
세피로스가 태어날 당시 20대 초반이던 설은 30대가 되고, 직책이 바뀌어도 세피로스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페이릭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셋은 가족과 다름없었다. 그들이 세피로스에게 더욱 애착을 가졌던 것은 가장 먼저 태어난 1세대 용이란 이유도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이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게 더 애틋한 감정을 지녔던 것 같았다.
다차원을 넘어 라슈온에 도달한 것은 세피로스가 20살도 되기 전의 일이었다. 당시의 세피로스는 실전에 투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페이릭은 그동안 쌓인 경험을 토대로 위험한 임무마다 투입되었다. 용의 수명을 2,000살가량으로 만든 이유는 그 세월 동안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 계속 이기기 위해 수명이란 것을 이용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던 인간들은 라슈온의 원주민인 오빈들과 손을 잡았고 함께 싸웠다. 그 과정에서 라슈온의 원신인 보비네의 뿔이 꺾여 가사 상태에 빠졌다. 그런 상황이었다 보니 인간들은 마수에게 이겼어도 영소의 흐름이 어그러져 라슈온을 떠나야 했다.
인간들은 라슈온을 포기하고 마수를 피해 다시 다차원을 넘어 이주할지, 아니면 마수를 막고 라슈온을 복원할지 갈림길에 빠졌다. 당시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전자의 선택이 더 납득 가는 일이었다.
그러자 페이릭이 반대하고 나섰다. 다차원으로 넘어가 봤자 지금과 같은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었다. 지금까지 함께 싸워 온 오빈들을 남겨 두고 떠날 수도 없고, 서로 쫓고 쫓기는 이 전쟁의 막을 내려야 했다. 그것이 페이릭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이상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래서 자신의 특이점을 개방하기로 했다. 용은 인간에 있어서는 병기였고 병기는 이 싸움에 있어서 인간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페이릭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물론 설과 세피로스는 그의 결정에 반대했다. 설은 자신이 용을 연구하는 데 이바지했지만, 그 결과 그들을 병기로만 취급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인간과 다름없었다. 용들은 인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페이릭도 고집을 부렸다. 그는 결국 특이점을 노출하여 만든 아공간에 마수들을 몰아 가두는 데 성공했고, 그 대가로 자신의 영소 역시 그곳에 갇혔다. 충격에 빠진 세피로스와는 달리 설은 비통에 빠져 무력하게 있지만은 않았다.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슬픔에 빠져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라슈온의 영소가 아직은 재생 가능한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보비네를 대신할 것을 찾아야 했다. 페이릭의 특이점이 아직 힘을 유지할 때 영소의 흐름을 돌려놔 다시는 마수가 이 세계에 나타나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인간 중에도, 오빈 중에도 그런 일에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범인이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조율자는 엄밀히 말하자면 신과 달랐다. 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였지만 조율자는 이 세계의 영소의 흐름을 관장할 뿐, 전지전능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신 흉내를 낼 수는 있어도 허울만 좋지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설은 자진해서 나섰다. 자신이 이 세계의 조율자가 되겠노라 선언했다. 그에 맞춰 인간들은 당시 그들 기술을 전부 동원하여 거대한 영소 흐름의 조율기를 만들었다. 설은 그 안으로 들어가 이 세계의 조율자가 되었다.
그렇게 세피로스는 부모 같던 둘을 잃었다.
세피로스는 그 이후 마수가 남기고 간 흔적들을 지워 원래대로 복구하고 주변 정리를 하며 200년가량을 라슈온의 재건에 힘썼다. 상황이 마무리되고 라슈온이 평화를 되찾자 세피로스는 자신의 역할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동면 상태에 빠트렸다.
여기까지가 세피로스가 과거에 머무르기로 한 이유였다.
* * *
“나는 동면에서 깨고 싶지 않았어.”
잠들기 전의 기억이 돌아온 세피로스는 자신을 깨운 당사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그와 독대 중인 라케드는 송구하단 얼굴을 할 뿐 세피로스가 다시 동면에 들어가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을 가볍게 무시했다. 아무리 1세대 용이라 해도 세피로스는 용으로 치면 200살이 갓 넘은 애송이었고 라케드는 2,000살가량을 살아온 장로였다.
“내가 잠든 이후 얼마나 지났지? 3,000년?”
“정확하게 3,098년입니다. 지금은 테나력으로 치면 테나력 2,893년입니다.”
“테나력?”
“세피로스 님께서 동면에 들어간 이후 인간들이 세운 연호입니다.”
“오래도 지났군.”
세피로스는 지독하게도 외로운 얼굴로 물었다.
“대체 내 잠을 방해한 이유가 뭐야?”
“마수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라케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 말에 세피로스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작게 벌렸다.
“뭐?”
“용들의 기록에 남아 있는 대로 3,000년 전에 아공간으로 봉인한 마수들과 동일한 집단으로 추정됩니다.”
“불가능해! 마수들은 페이릭이 만들어 둔 아공간을 빠져나올 수 없어……!”
세피로스가 부정했지만, 라케드는 단조로운 어조로 보고했다.
“마수들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그 이상은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지 않고 앉아 있던 소파에 라케드를 등지고 모로 누웠다.
“그럼 당신들도 방법을 찾아. 난 이만.”
“어린아이같이 떼쓰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난 어린애가 맞거든.”
“어쨌든 이야기는 더 들어 보시지요.”
“…….”
세피로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라케드는 끈질기게 말했다.
“아공간에 최초의 용 페이릭의 영소가 포진해 있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문제는 마수와 함께 있었다는 거지요. 마수는 페이릭의 영소를 흡수했습니다. 그 결과 페이릭의 영소와 패턴이 비슷해지면서 그가 만들어 둔 특이점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지요.”
“…….”
“지금의 마수는 이미 당신께서 싸워 온 단순한 마수와 달라졌습니다. 페이릭의 영소를 가장 많이 흡수한 개체가 아공간을 빠져나오면서 라슈온의 영소 흐름에 퍼져 버렸지요. 그 결과 날개를 가진 자들이 태어났습니다.”
“…….”
세피로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케드는 방문을 조금 열더니 그 밖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던 작은 소년을 불러들였다.
“들어오거라.”
소년은 라케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라케드는 소년을 세피로스의 앞으로 대령시켰지만 세피로스는 여전히 누운 자세 그대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바람에 소년은 더욱 위축되어 라케드를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러든 말든 라케드는 여전히 평이한 어조로 소년에게 말했다.
“인사드리거라.”
소년은 세피로스의 뒤통수에 대고 꾸벅 절을 했다.
“아, 안녕하세요…… 니콜라우스…… 라고 합니다…….”
니콜라우스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최초의 용 페이릭의 영소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죠. 그리고 그의 영소에는 마수의 영소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세피로스가 반응을 보였다. 세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허리를 펴고 자신을 니콜라우스라 소개한 아이를 보았다. 그는 등이 훤히 드러내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옷의 재질이 고급인 것에 비해 어딘가 맞지 않아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