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40화 (140/257)

140화.

“인간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만든 연유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지.”

라케드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인간들은 마수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었어. 마수는 그들의 모성을 파괴했고, 인류는 어쩔 수 없이 반강제로 우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지.”

“우주요?”

“그래, 우주.”

“태양과 달이 떠 있는 그 우주요?”

“너는 쉽사리 믿을 수 없겠지만 인간들의 옛 선조들의 기술력으로는 우주로 나가는 것 따위는 일도 아니었어. 지금은 전부 잃어버린 기술이지만. 인간이 용을 만들어 낸 것도 그즈음이었다. 비록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지만, 용이라는 전력이 생긴 인간은 절멸을 피할 수 있었어.”

라케드는 용들의 배아가 수납된 배양 인큐베이터들을 둘러보았다. 그 시선에는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마수에게 쫓기던 인류는 마수가 없는 신세계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이 라슈온이었고. 라슈온은 인류의 모성과 비슷한 환경이었지.”

라케드는 잠시 말을 멈추고 미레아와 시오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따라오고 있는지 살폈다. 시오와 미레아는 라케드의 설명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인과관계는 제대로 파악하는 중이었다. 라케드는 이번에는 다소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 연유로 인류는 라슈온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지. 문제는 마수라는 존재가 인간들을 쫓아 라슈온을 침범했다는 것이다.”

그 말에 미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인간 때문에 라슈온에 마수가 나타난 거네요?”

“너희는 인정하긴 싫겠지만 그렇다.”

그 말에 둘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인간들만 아니었으면 라슈온의 오빈들은 마수와의 전쟁 따위는 모르고 풍요로운 대지를 그들끼리만 공유하며 번성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 가설을 세우자 미레아와 시오는 죄책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심정을 헤아렸는지 라케드가 말했다.

“변명해 보자면 어차피 인간들의 모성이 있던 세계의 영소는 언젠가 고갈되기 마련이었고 그만큼 절박했거든. 그것 역시 마수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니 인간들을 쫓아 라슈온으로 침범한 것이지.”

“그래서 3,000년 전에 마수들과 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보비네는 패했고…….”

미레아의 말에 라케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비네의 뿔이 꺾여 보비네가 패한 것은 정말로 큰일이었다. 그가 없으면 라슈온의 영소를 다스릴 존재가 없었고 흐름이 멈춘 영소는 라슈온의 여러 생명 활동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지. 거기다 마수가 있으니 영소가 고갈되어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겨우 건너온 라슈온을 다시 버리고 떠날 수 없었지. 다차원을 넘어올 때 이미 전력 대부분을 잃었거든. 오빈과 협력하여 마수와 전쟁을 벌인 지 1년 만에 보비네가 패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되었어. 그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고, 어찌 보면 불행의 시작이었지.”

그러더니 라케드는 다시 어디론가로 걷기 시작했다. 시오와 미레아도 다시 그의 뒤를 따랐다.

“전쟁을 멈추기 위해 한 인간과 한 용이 방법을 찾게 되었다.”

라케드의 발소리가 빈 복도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가장 태초의 용이 누구인지 아나?”

앞서 걷던 라케드의 돌발 질문에 미레아와 시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이름은 페이릭. 모든 용의 시초이지.”

그리고는 또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 페이릭은 어떻게 생겼을까?”

시오와 미레아는 그걸 어떻게 알겠냐는 얼굴을 했다. 라케드는 미레아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타오를 것 같은 붉은 머리였다고 해.”

“와, 저랑 같네요.”

미레아가 반가운 마음에 감탄하자 라케드는 비웃음인지 연민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페이릭에게는 인간인 연인이 있었어.”

“연인…… 이요?”

“그녀의 이름은 윤설. 주변인들은 그녀 이름의 끝 글자를 따서 설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발음이 변형돼 서리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였다.”

그 말에 둘은 숨을 들이켰다.

“서리 여신이 인간이었다고요?”

시오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렇다. 태초부터 신으로 태어난 보비네와 이 땅의 다른 신들과는 달리 설은 인간 출신이었지.”

“그래서 보비네와 달리 서리 여신은 만들어진 신이며 세계의 조율자라 불렸던 것이군요.”

깨달음을 얻은 미레아의 말에 라케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서리 여신은 이 세계의 영소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야. 기존에 있던 영소가 오염되지 않도록, 흐름을 멈추지 않도록 조율하는 자일뿐이지. 아무튼, 앞서 말했듯 설과 페이릭은 연인 사이었다. 인간들이 페이릭을 만들어 내고 용에 관한 후속 연구를 지속하고 있을 때 당시 연구원이었던 설이 그의 담당이 된 모양이더군. 그러다 사랑에 빠졌다는 시시한 이야기다.”

라케드는 그리 말했지만, 미레아는 제법 낭만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세피로스가 태어났다.”

“예?!”

“페이릭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이 만들어 낸 용이 세피로스야. 그러니까…… 그 둘은 세피로스의 부모인 셈이지. 사실 모든 용은 페이릭의 정보를 토대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세피로스를 포함한 1세대 용들이었어.”

미레아와 시오는 라케드의 설명을 따라가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경청했다.

“용들은 마수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 낸 생명체이니 그들은 마수와 싸웠고, 페이릭과 세피로스는 항상 그 선봉에 섰었어. 다차원을 넘어와 라슈온에서도 말이야. 그 둘이 참전한 전투는 연신 승전고를 울리며 상황은 좋아지는 것 같았지. 하지만 결국 보비네가 마수에게 당해 가사 상태에 빠지게 돼.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페이릭이 나섰어.”

라케드는 좀 더 쉽게 설명해 주기 위해 나름대로 고민했다.

“네게 있는 서리 여신의 특이점도 그렇고, 특이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나?”

시오가 고개를 저었고 미레아가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설이 ‘그’가 남겨 준 특이점으로 마수를 몰아내었다고 들었어요. 저는 특이점이 여신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요?”

“네가 이해한 게 틀린 말은 아니다. 모든 생명은 영소를 가지며 그 자체로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고 있지. 그런 우주의 시작, 최초의 점에서 나오는 정의되지 않은 막대한 힘을 특이점이라고 한다. 그것은 생명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이야.”

하지만 미레아와 시오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라케드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말 그대로 정의되지 않은 힘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 발휘할지는 미지수인 힘이다. 페이릭은 자신이 가진 특이점을 이용해 마수들을 아공간으로 가두어 봉인했어. 그런 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다. 그런 특성 때문에 특이점이라 불리는 것이니.”

시오가 다시 이야기를 따라가기 벅차다는 얼굴을 했다.

“그래서 페이릭이 죽었군요. 영혼의 구심점인 특이점을 써 버렸기 때문에…….”

미레아가 동정 섞인 어조로 중얼거리자 라케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의 특이점이 없다 해도 영소는 남아 있었다는 거야. 특이점으로 아공간을 만들어 낼 때 그의 영소 역시 아공간으로 함께 떨어져 버렸거든.”

“그래서 마수들과 함께 아공간에 남게 되었고요.”

“그렇다.”

그래서 설이 슬퍼했다. 연인이 죽은 것으로 모자라 페이릭의 영소는 아공간으로 흩어져 버려 죽어서도 이 세계에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고, 괴로워했고, 자신과 그를 연민했음에도 불구하고 설은 다시 일어섰다.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페이릭의 특이점이 만들어 낸 기적을 헛되이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수를 물리쳐도 보비네의 관장이 없으면 영소의 흐름이 어그러지고 그러니 설이 나선 것이고요. 저도 여기까지는 알아요.”

“그래.”

미레아와 라케드의 대화에 시오가 제대로 듣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드는 얼굴을 했다. 그러든 말든 라케드는 할 말을 이었다.

“보비네가 라슈온의 영소를 돌볼 힘을 잃었기 때문에 영소의 흐름을 관장할 자가 필요했지. 그것을 위해 서리 여신…… 윤설, 그녀가 나선 것이고. 그 어느 누구도 쉽사리 강요하지 못했지만 설 그녀가 자원했다. 영소를 만들어 낼 순 없지만 이미 존재하는 영소를 관장하는 것은 가능했거든. 그러니 남아 있는 영소를 마수에게 빼앗기기 전에 세계의 조율자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의 이야기다.”

끊임없이 복도가 줄줄 이어진다 싶더니 라케드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복도에 기계적으로 나열된 배아들에 비하면 상당히 안락했고 한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보였다. 정중앙에는 빈 관이 놓여 있었다. 라케드는 그것을 손으로 쓸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부모를 잃은 셈이었어. 페이릭은 말 그대로 죽었고, 설은 이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해 육신을 버렸거든. 죽은 것보다 못한 상태가 되었지. 그것이 그에게는 상당히 큰 충격과 상처를 주었나 보더군.”

라케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다른 배아들과 함께 동면 상태로 들어갔어.”

라케드의 말에 시오가 물었다.

“동면 상태에 들어갔다면…… 왜 다시 깨어난 거죠? 세피로스가 원했나요?”

라케드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마수가 다시 나타나면서 우리는 마수에 대항해야 했고, 마수를 접해 본 이의 정보가 절실했다. 마수와 직접 싸워 본 1세대 용들은 전부 죽고 없었고 유일하게 남은 건 세피로스였다. 우리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세피로스도 그걸 허락했고요?”

“아니. 처음에는 그도 화를 내었지.”

“그럼 무엇 때문에 마음이 바뀐 거예요?”

“백익 니콜라우스라는 존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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