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39화 (139/257)

139화.

라케드는 제자리로 돌아간 관 구조물들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었다.

“인간들이 과거의 기술을 잃어버린 이후에는 우리 장로들이 그 일을 도맡아 했지. 새로운 세대 용들의 개체 수를 조절하고 어떤 배아를 깨울지는 전부 우리에게 달렸다.”

“그럼 이 건물은…….”

“여기 있는 이것들이 전부 용의 배아지.”

시오와 미레아가 입을 떡 벌렸다.

“그럼 얼마나 많이 있는 거예요?”

“글쎄…… 지금처럼 개체 수를 유지하면 앞으로 한 100세대 이상까지는 가지 않을까?”

“그렇게 많다고요?”

“마수 대전 때문에 이 앞선 세대의 용들은 다른 세대보다 더 많은 수를 태어나게 했지만, 그 이전 세대 정도를 생각하면 그 정도일 거다.”

미레아는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이런 걸 어떻게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거죠?”

“과거의 인간들은 지금의 신들이 도달한 영역에 맞먹는 기술을 갖고 있었거든.”

“그러면…… 인간은 용을 왜 만든 건가요?”

라케드는 바로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마수에 대항하기 위해.”

“하지만 마수는 고작 100년 전에 생겼잖아요.”

“아니.”

라케드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명을 켜 둔 덕분에 아까보다는 그를 따라가기 훨씬 수월했다. 끝없이 벽이 이어졌고, 천장은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끝없이 이어졌다. 그 안에 있는 것이 전부 용의 배아인 것이었다.

“마수는 원래 테나력이 시작하기 전에 이 세계를 침범했어.”

“그게 무슨…….”

“너희들은 마수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그냥…… 괴물이잖아요.”

“그것이 어디서 왔고 왜 우리를 공격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냐는 의미다.”

라케드가 낸 문제의 답을 알 리 없는 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수는 인간들처럼 이 땅의 것이 아니었어. 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왔고 기원이 무엇인지는 그 옛날 인류도 알 수 없다고 해. 그것들은 어느 순간 우주에 나타나 별들의 영소를 먹어 치우며 떠돌아다니다 인류의 모성까지 공격하게 된 것이거든. 마수들은 영소를 흡수하는 것만이 살아가는 목표인 것처럼 보였어.”

“그건 꼭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것 같은 이유처럼 들리네요.”

“정확해. 마수들에게 있어서 인간들은 그저 그들의 먹잇감이었을 뿐이야. 시오 네가 말한 것처럼 이유는 없었다. 그것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저 영소란 것이 필요했던 거다.”

“그렇다면 인간과 마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은 필연이었군요.”

시오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라케드는 미레아에게 다가갔다.

“세피로스에게 듣자 하니 미레아 너는 알툰의 신전에서 재미있는 걸 보고 왔다지?”

미레아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라케드가 검지에 마력을 모으더니 미레아의 미간에 갖다 대었다.

“그가 어디까지 알려 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떠올려 봐.”

라케드가 손을 거두자 미레아가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주저앉았다.

“아아!”

라케드의 말을 시발점으로 알툰이 봉인해 둔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미레아의 머릿속으로 알툰이 보여 준 정보들이 억지로 끄집어 올려졌다. 그 덕분에 두통이 밀려오고 안구가 홧홧하게 뜨거워졌다. 알툰은 당시의 미레아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필요할 것이라고 세계의 감추어진 뒷면을 보여 주었다.

언제 기억이 돌아올지는 알려 주지 않았어도 알툰과 라케드는 아마 이런 상황일 때가 제격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미레아가 머릿속으로 두서없이 밀려오는 기억에 잠시 쓰러질 뻔하자 시오와 라케드가 잡아 주어 간신히 섰다.

라슈온을 침범한 마수.

무력하게 꺾인 보비네의 뿔.

눈물을 흘리며 특이점으로 마수들을 아공간으로 몰아낸 서리 여신.

그리고 자신은 그녀의 특이점 일부를 받아서…….

미레아는 그때처럼 울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진실에 너무 근접한 나머지 서리 여신과 보비네의 비통함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던 것에 반해 지금은 이성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미레아는 퀭한 눈으로 라케드를 바라보았다.

“알툰은 제게 왜 이런 것들을 보여 준 것이었죠? 물론, 제가 보여 달라 요청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여 주지 않았으면서 왜 제게는 이러한 것들을 알려 준 걸까요?”

“보비네의 기억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지?”

“슬픔…… 깊게 공감할 수 있는 슬픔. 그리고 애절함, 절박함…… 아아, 말이 좀 두서없이 나가고 있는데……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는 바람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걸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정신이 없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건 마치…… 그러니까…….”

미레아가 적당한 말을 찾아 입안에서 혀를 굴리고 있는 것을 본 라케드가 도움을 주었다.

“마치 네 일처럼 느껴졌지? 그저 기억을 엿봤을 뿐인데도.”

“네, 맞아요. 그들을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을 돕기 위해서는 제가 무언가를 해야 해요.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예요.”

다소 몽롱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미레아를 보고 라케드가 혀를 짧게 쯧 찼다.

“생각보다 깊게 감화되었군. 알툰이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다.”

“노렸다고요?”

“그래.”

미레아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단 얼굴로 라케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들게 만든 알툰의 저의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미레아는 라케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게 이런 것을 알려 주는 이유가 혹시…… 제가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 그런가요?”

“맞아.”

라케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오와 혼란스러워하는 미레아에게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서리 여신의 조각은 그녀의 가호를 받지. 그리고 그들은 이 세계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져 있어. 미레아 제인스터, 너처럼 말이다. 네가 서리 여신의 조각인 이상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쯤은 알툰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 그래서 너를 묶어 두기 위해 그런 기억을 보여 준 것이야. 자신들의 편으로 회유하기 위해. 그러니까, 네가 자신들과 이 세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말이다. 그러려면 그들에게 공감하는 것이 우선이야.”

“회유를…… 한다고요? 저를요?”

“뭐, 원신인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이방인이니까. 안전장치 없이 쉽게 믿을 수는 없겠지.”

“흠…….”

미레아는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꼬며 라케드가 한 말을 다시 한번 복기해 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요.”

미레아는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제게 서리 여신의 특이점이 일부 있기 때문에 저를 서리 여신의 조각이라 부르는 것은 이해가 갔어요. 하지만 왜 제게 그런 것이 있는지, 그것이 뜻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겠어요.”

라케드는 미레아를 빤히 바라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네가 듣지 않아도 상관없어.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있으니.”

그 말에 미레아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세피로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대답을 피했어요. 하지만 뭔지도 모르고 있는 쪽은 답답한 걸요.”

“너라면 분명 상처받을 거다.”

라케드답지 않게 미레아를 걱정하는 말을 해 주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이번만큼은 꼭 사실을 알고 싶었다.

“대체 뭔데요?”

라케드는 우뚝 멈추어 섰다.

“너 아리스 좋아하지?”

“네? 예? 네?”

그 말에 미레아는 당황하며 이상한 목소리로 허둥지둥 답했다. 그리고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을 한 라케드와 네가 그럴 줄 몰랐다 하는 얼굴을 한 시오를 번갈아 보며 손을 내저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어, 어떤 의미의 좋아한다는 소리인가요?”

“네가 지금 당황하는 의미의 좋아한다는 뜻이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시오가 미레아의 어깨를 다독여 주며 엄지를 척 올렸다.

“괜찮아, 미레아. 아리스에게 말 안 할 테니까 너무 쑥스러워하지 마.”

하지만 그는 웃음을 참고 있는 티가 역력했다. 미레아는 반사적으로 그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을 뻔하다 간신히 이성이 돌아와 자제할 수 있었다. 대신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퍽 때렸다. 시오는 보란 듯이 아야야거리며 엄살을 부렸다.

“예에…… 쪼, 쪼금?”

미레아는 새빨개진 얼굴로 엄지와 검지 사이의 폭을 찔끔 떨어트려 라케드의 눈높이에 맞춰 들었다.

“아하, 쪼금?”

미레아는 이번에야말로 히죽거리는 시오의 정강이를 걷어찰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임무하는 동안은 누구처럼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거거든!”

하지만 라케드는 그 모습을 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레아는 지레 멋쩍어서 몸을 비비 꼬다 반응이 적은 라케드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그런 건 왜 물으시는데요. 네? 저를 혼내면 혼냈지 놀리고 그러는 분은 아닌데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하잖아요.”

라케드는 미레아의 손을 치우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됐다. 역시 궁금해하지 마라.”

라케드가 한숨을 내뱉으며 한 말에 그 말에 미레아는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다만, 네가 서리 여신의 조각이 된 연유는 그렇게 대단한 이유가 아니야. 단순한 우연이었다.”

“우연이요?”

“그래, 우연. 그것만 아니었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평범한 인간이었겠지. 아니, 너는 지금도 평범한 인간이다. 서리 여신의 조각이니 하는 것이 너를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 너는 그런 것을 잊고 네 삶을 살면 돼.”

하지만 미레아는 여전히 개운치 못한 얼굴이었다. 그 반응에 라케드는 조금 고민을 하다 에둘러 설명해 주었다.

“보통은 여신의 조각은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지 못해. 하지만 무의식적이든 운명이든 간에 그러한 일을 하게끔 되어 있어. 그러니 여신의 조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스스로 가질 필요가 없지.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네 임무는 끝이다.”

“제게 무슨 목적이 주어진 건지는 제가 몰라도 된다고요?”

“그래.”

라케드는 미레아를 무시하고 하고 있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인간들은 원래 라슈온의 존재가 아니었어. 마수를 피해 다차원의 벽을 넘어 다른 별에서 라슈온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이었지. 테나력이 시작하기 전의 일이야. 당시의 라슈온에는 오빈 이상의 지혜를 가진 지적 생명체는 없었어. 인간이 이주해 오고,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용이 나타나면서 라슈온은 조금 변했다. 세 종족이 이 땅에서 서로의 영역을 구축해 자리를 잡았지. 그때는 서리 여신이란 존재가 생기기 전이었어.”

미레아는 알툰의 시점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엿본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일은 보비네와 관련된 내용만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다. 전부를 알고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라케드의 말을 듣는 동안 누락되어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다차원의 벽이 뭔가요?”

시오는 이야기를 좀처럼 쉽게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라케드는 평소처럼 멍청하다 일갈하지 않았다. 그만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지금까지의 상식이 붕괴하고 이 세계의 새로운 이면을 보는 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곳과는 다른 세계, 다른 행성과 라슈온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벽이다.”

시오가 입을 헤 벌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것저것 질문을 해 댔다.

“오빈은 원래 이곳에서 살던 원주민이고 우리 인간들은 이방인이었다는 거네요?”

“그래. 인간이 라슈온에 온 것이 바로 3,000년 전이었다.”

“테나력이 시작할 때쯤이네요.”

“그야 테나력은 인간이 세운 연호니까. 그 정도는 알지 않나?”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이유는 몰랐으니까요. 그럼 인간들이 이곳에 이주한 이유는 무엇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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