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둘 다 괜찮아 보이는군.”
미레아는 그를 보자마자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세피로스는요? 다른 일행들은요? 아리스는 무사한 건가요?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라케드는 오랜만에 관대함을 발휘하여 미레아의 질문을 차분히 들어 준 다음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대피한 라일라와 리비엘로, 쿤둘렌은 록산의 본부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 말에 미레아와 시오의 얼굴에 화색이 잠시 돌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라케드의 말에 다시 얼굴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이쪽이 가장 중요한 소식인데, 아리스는 니콜라우스에게 끌려가 황제가 있는 황궁에 있는 것 같다.”
미레아가 아연한 정신을 다잡기 위해 머리를 털었다.
“내 정보통을 통해 들은 바로는 아리스가 붙잡힐 때 파울로와 율비네가 함께 잡힌 것으로 추정되더군. 그래서 그들과 연락이 끊겼어. 세피로스는 워프 게이트의 마력을 추적할 위험이 있어서 너희를 이곳으로 보낸 후 그곳에 남았었는데…….”
미레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세피로스가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죠?”
라케드가 인상을 팍 쓰며 대답했다.
“그게 두 번째로 심각한 문제다. 세피로스가 연락 두절이야. 급한 대로 파울로와 율비네만 두고 대피를 한 건지 아니면 무언가가 잘못된 건지…….”
“이런…….”
시오가 얼굴을 쓸었고 미레아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연락이 끊겼다니……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지금 세피로스가 괜찮은지 아닌지조차 모르는 거잖아요. 그리고 아리스는 어떡해요? 빨리 구하러 가야죠!”
“그렇지 않아도 대책을 강구하고 있어. 너무 조급해하지 마.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생각은 없지만 지금 당장은 무사할 거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요?”
“니콜라우스, 아니. 지금부터 그를 라우노라 부르겠다. 라우노와 황제 측은 서로 동맹 관계 비슷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일부 힘을 빌려주었지만, 그 둘의 의견은 다소 마찰이 있어. 황제는 지금 당장 루데키아스를 없애고 싶어 하지만 라우노는 마검 페니드란을 온전히 자신의 손에 넣기를 바라고 있지. 하지만 알다시피 페니드란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검이다. 페니드란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아리스가 필요할 거다.”
하지만 미레아는 라케드의 말에도 쉽게 안정을 찾지 못했다. 라케드는 또 무어라 말을 열려는 미레아를 의자에 반강제로 앉혔다.
“너희는 당분간 이곳에서 휴식을 취해. 지금 밖을 나돌아 다니는 것은 안 좋아. 니콜라우스…… 아니, 라우노에게 찍혔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계속 무어라 항변하려는 미레아의 입에 빵을 구겨 넣어 줬다. 라케드는 잼과 버터를 그녀의 앞에 밀어 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먹어라.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해도 힘을 비축해 둬.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미레아와 시오는 입맛이 없었지만, 음식들을 꾸역꾸역 입에 쑤셔 넣었다. 은현이 쟁반에 닭고기 스튜와 샐러드, 구운 채소, 삶은 달걀, 소시지 같은 것들이 있는 그릇들을 가져와 그들 앞에 놓아 주었기 때문에 성의를 봐서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지금 가장 속이 타는 사람은 은현일 것이다. 억지로 앞에 있던 음식물을 다 비운 그들은 라케드와 은현에게 물었다.
“저는 전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5년 전, 라우노와 황제는 왜 아리스를 죽이려고 했던 건가요? 아리스는…… 아리스는 철저하게 황제의 측근이었고, 라우노가 옆에서 무어라 속살거린 건진 모르겠지만 황제가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아리스를 죽이려 했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그리고 라우노는 아리스를 왜 두려워하는 건가요? 아리스는 그냥…… 그냥 별다른 일을 꾸미지 않았잖아요. 클라인에서 다른 일은 하지도 않고 놀고먹었다고 들었는데…….”
라케드는 그들을 노려보며 유심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시오와 미레아는 라케드를 잘못 따라갔다가 무슨 짓이라도 당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안 가겠다 그러는 쪽이 더 큰일일 것 같아서 자리에서 미적거리면서 일어났다. 방금 먹은 음식들 때문에 속이 더부룩했다.
무슨 용무인지 말도 하지 않고 라케드는 어디론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시오와 미레아는 영문도 모르고 일단 그를 따라갔다. 아직도 용의 성지가 신기한 둘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라케드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데 지나가던 용들이 라케드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장로님.”
라케드가 짧게 고개를 까닥거리며 지나갔다. 하지만 시오와 미레아는 장로라는 호칭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 장로님?”
시오가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라케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뭐 잘못됐나?”
“아니, 그러니까…… 라케드 님이 용들의 장로……?”
미레아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라케드를 바라보았다. 라케드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별거 아니고 나이가 차면 다 장로 취급을 해 줘.”
아니다. 별거였다. 용 중에 장로라 불리는 용은 열도 되지 않는 데다 그마저도 용들의 수명인 2,000살을 넘고도 생존해 있어야 붙을 수 있는 칭호였다. 그런데 라케드가 장로라니……! 현신한 모습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세피로스의 밑에 있던 사람이 2,000살 이상 먹은 장로라니!
시오와 미레아는 급격하게 라케드에게 거리감을 느꼈다. 일전에 티몬이란 도시에서 용주를 얻은 라케드가 다른 임무를 다 제치고 용주를 용들의 성지로 돌려보내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했던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장로라면 그러한 일들마저 사사로이 넘길 수 없는 법이니 그럴 만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장로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고작 300살 먹은 세피로스의 밑에서 부관을 자처하냐는 것이었다. 세피로스는 라케드에 비하면 핏덩어리에 불과했고, 라케드는 어디에서 누군가의 시중을 들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연유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군…….”
라케드가 둘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두 사람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궁금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라케드가 세피로스의 부관 노릇을 하는 건지 궁금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라케드가 무서워서 눈치만 보고 있는데 그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걸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 볼까 한다.”
그렇게 말하는 라케드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감이 떠올랐다.
“세피로스는 이 이야기를 너희에게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아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
라케드는 저 멀리서 현신하여 웃고 떠드는 아이들, 용의 모습으로 너른 잔디밭에서 구르고 있는 어린 용들을 따듯하게 바라보았다. 둘은 라케드와 따듯함이란 단어의 조합이 새로워서 소름 돋았다.
“이곳은 아직 어린 저 새로운 세대 용들의 성지가 될 거야.”
“라케드 님은 그럼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20세대 전의 용이겠네요?”
“그래.”
용들은 세대 구분을 100년 단위로 한다. 지금 태어난 용들부터 계산한다면 대략 2,000년 전에 태어난 라케드는 정확하게 20세대 전의 용이었다.
“그럼 세피로스도 3세대 전에 태어난 게 되겠군요.”
미레아의 말에 라케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세피로스 회장은 고작 3세대 전의 용이 아니야.”
“하지만 300살이면…….”
“1세대 용이지.”
시오와 미레아는 걷는 것을 까먹을 정도로 놀랐다. 1세대 용은 테나력이 시작되기도 전에 최초로 태어난 용들을 일컫는 세대였다. 둘은 처음에는 라케드가 말장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렇게 여유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라케드가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먼저 가 버리자 둘은 뒤늦게 라케드의 뒤에 따라붙어 그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세피로스가 300살이 아니라는 소리예요?”
“그가 실제로 살아온 시간으로만 치면 300살 내외인 건 맞아.”
미레아와 시오가 이해를 못 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라케드는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그가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안은 어두웠는데 라케드는 불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둘은 앞서 걷는 라케드를 놓치지 않게 서두르면서도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안쪽은 공기가 서늘했기 때문에 가벼운 차림을 한 미레아는 몸을 움츠리고 손으로 팔을 문질렀다.
“용들이 어떤 식으로 번식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돌연 라케드가 멈춰 서면서 미레아는 앞서 걷던 시오의 등에 살짝 부딪혔다. 그들이 있는 곳은 어떤 중앙 홀과 비슷한 곳이었다. 그것을 중심으로 십자 모양의 복도가 이어졌다.
라케드가 콘솔 위에 손바닥을 올려 두자 중앙에 불이 켜졌다. 그리고는 몇몇 버튼을 누르자 어디선가 가압이 되면서 증기가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왼쪽에 있는 복도에서 기계음이 들리더니 톱니가 돌아가면서 투명한 관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이들이 다음 세대 용이다.”
관 안에는 주먹만 한 배아가 액체에 잠겨 있었다.
“요, 용이라고요? 이게?”
미레아와 시오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발 물러났다. 창백한 분홍색의 피부에 액체 속에 둥둥 떠 있는 그것은 생체 징후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아 눈으로 봤을 땐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용은 번식을 통해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용의 신체에는 번식 기능이 없어. 기본적으로 무성이지. 용들은 이런 식으로 원래부터 만들어져 있었어.”
“만들어져 있었다니…… 그러면 용은 누가 만들었어요?”
“인간들이.”
“예?”
시오가 또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라케드는 그에게 멍청하다느니 하는 말을 내뱉는 대신 콘솔의 버튼을 눌러 관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수납했다.
“용은 일종의 인공 생명체다. 아주 먼 과거의 인간들이 우리를 만들었고, 배아들을 동면 상태로 만들어 오랫동안 잠들어 있게 설계했지.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배아를 깨워 키워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