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를 따라 종말까지-137화 (137/257)

137화.

용들의 건물은 하늘 높게 치솟은 원뿔형이고 다른 건축물에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히 압도적으로 웅장하며 경외심이 든다고 세피로스를 통해 들었다. 거기다 자신의 모습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하늘을 날고 있는 용들과 현신한 모습으로 까르륵 웃고 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세피로스가 자신을 최대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을 거라 짐작하긴 했지만 이런 곳으로 보낼 줄은 몰랐다.

미레아의 옆쪽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발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기껏해야 10살 내외로 보이는 외관의 어린아이 둘이 서로 장난치며 복도를 뛰어다니다 미레아를 보고 멈칫거렸다. 미레아는 이마의 용주와 뾰족하고 긴 귀를 보고 그 아이들 역시 용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안녕?”

미레아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아이들은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왔던 길을 따라 도망갔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미레아가 다소 어이없는 얼굴로 아이들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 미레아는 잠시 고민했다. 이 건물의 구조를 모르니 돌아다녀 봤자 길을 잃을 게 뻔했다. 그리고 아무 곳이나 돌아다녀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 마냥 있을 수는 없는 일. 함부로 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하고 싶었다면 감시자가 있었거나 문을 잠갔을 테니 조금 돌아다니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 미레아는 머리를 긁으면서 다시 복도를 걸었다.

원뿔형의 건물이라 조금 걸으니 건물을 빙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그사이 위나 아래로 갈 수 있는 계단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역시 돌아다니는 것은 그만두고 그냥 방에 얌전히 있으면 누군가 오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저 건너편에서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름다운 여인을 선두로 아까 도망간 아이들이 그녀의 치마폭에 매달려 왔다.

용들은 미레아를 보고 쑥스럽다는 듯 그들이 데려온 여인의 뒤로 몸을 숨겼다. 미레아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앗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어도 사진으로는 많이 본 사람이었다. 미레아가 자신을 알아보는 기색이자 여인이 쑥스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참이라 깨어난 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나요?”

검은 머리카락에 따듯한 갈색 눈동자를 가진 마이련 출신의 여인은 완벽하게 루아드어를 구사하였다.

“네,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대공비님?”

미레아가 어색하게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허리를 꾸벅이자 여인이 작게 웃었다.

“지금은 대공비가 아니니 그 호칭은 좀 어색하네요.”

아리스의 생모이자 마라피네스 대공의 아내인 류은현이 손을 내저었다. 류진처럼 긴 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렸고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그리고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엄청난 미인이었다. 나비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긴 속눈썹,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처연한 분위기의 얼굴에서 여러 수심을 엿볼 수 있었다.

아리스와 똑같이 생긴 눈매였지만 아리스는 다소 시건방진 눈을 하고 있는 반면 은현은 반듯하고 단정한 표정이었다.

“아하하, 그러고 보니 아리스도 대공자라 부르는 것을 질색하긴 했어요.”

“그냥 류은현 씨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그 말에 미레아가 얼굴이 빨개지도록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게 막 부를 수는 없지요! 차라리 류은현 님이라고 부를게요.”

“예, 그러세요. 그래서 몸은 괜찮으신가요?”

“네, 네! 완전히 괜찮아진 것 같아요. 애초에 큰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어서…….”

미레아는 왜 여기서 류은현이 등장한 건지 의문이었다. 세피로스의 말에 따르면 안전한 곳으로 은신시켰다더니 이곳이 그 안전한 곳인가 보다. 그러니 자신도 이쪽으로 피신을 시킨 것이겠거니 하며 혼자 생각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리스나 다른 사람들은 괜찮을까 걱정이 밀려왔는데 은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일행 분은 식사 중인데 속이 괜찮으시면 같이 드시겠어요?”

그제야 미레아는 허기가 밀려왔다.

“네, 그렇게 할게요.”

어린 용이 그들을 안내하듯 앞장섰다. 미레아는 뒤늦게 은현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디예요?”

“아이나 대륙에 있는 용들의 성지 중 한 곳이에요. 세피로스 님의 안배로 제가 지내고 있는 곳이지요. 이 성지는 외부에 알려진 곳이 아니라 제가 몸을 피해 있기 좋은 곳이었거든요. 아리스 그 아이에게도 제 행방을 알리지 못한 이유가 그 때문이랍니다.”

은현의 말에 미레아는 놀라움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궁금한 것을 전부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죠? 저랑 같이 온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나요? 마지막으로 본 게 세피로스가 저를 게이트로 밀어 넣는 광경이었는데…… 진은요? 진이 많이 다쳤었어요.”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같이 오신 분들은 괜찮아요. 진의 상처가 커서 좀 애먹기는 했는데 지금은 의식이 돌아와서 휴식을 취하고 있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저는 그때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진은 류은현 님의 조카분이 되시네요. 걱정 많으셨겠어요.”

미레아는 일행이 무사하다는 말에 안도했지만, 은현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웠다. 미레아는 석연치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저, 혹시 상황이 어떻게 된 건가요? 제가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거죠?”

“미레아 양께서는 하루 동안 의식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상황이 복잡해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은 식사 먼저 하고 계시면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다른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전하는 데 신경을 쓰세요.”

은현이 어느 문 앞에 서서 옆의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그 안은 열댓 명이 들어가면 꽉 찰 것 같은 작은 방이었는데 그 안으로 은현을 따라 들어간 미레아는 그것이 일종의 승강기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계단이 없는 이유가 있었다. 미레아가 아는 승강기는 지금까지 사면이 뻥 뚫렸고 울타리가 둘린 형태밖에 없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형태의 승강기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은현이 버튼을 누르자 승강기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층수를 나타내는 바늘이 찰칵거리며 움직였고 승강기가 내려갈 때 느끼는 약한 부유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승강기 문이 열리고 다시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어린 용들이 그들을 지나쳐 갔다. 지금까지 본 용들은 전부 10대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이었다. 미레아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은현에게 물었다.

“용들의 성지라면서 왜 어린 용들만 있어요?”

“여기는 일종의 보육원이에요. 그래서 성체 용들보다 어린 개체들이 더 많아요.”

은현은 미레아를 식당으로 안내했는데 넓은 식당 안에는 긴 테이블이 여러 군데 있었고 늦은 아침 식사를 하는 용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 역시 10대로 보이는 외형이었다. 그중에 이질적인 푸른 머리를 한 사람을 발견한 미레아가 반갑게 소리쳤다.

“시오 선배!”

미레아의 목소리에 수프에 찍은 빵을 씹고 있던 시오가 고개를 돌리더니 활짝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미레아가 잰걸음으로 다가가 그 옆에 털썩 앉았다.

“괜찮아? 좀 늦게 깨는 것 같아서 걱정했다.”

“난 괜찮아. 선배야말로 괜찮아?”

“난 이동하고 얼마 안 있어서 금방 깼어. 이상이 있는 부분은 없는 것 같아. 진은 어제 상처 때문에 큰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병실에 누워 있어.”

미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럼 진 말고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가고 혼자야?”

그 말에 시오가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너 아무것도 몰라? 얘기 못 들었어……?”

“무슨 얘기?”

미레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자 시오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곳에 온 건 너, 나, 류진 이렇게 우리 셋밖에 없어.”

“뭐?!”

미레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짓말! 그럼 다른 사람들은? 파울로나 세피로스, 그리고 다른 일행들의 행방은 전혀 모르는 거야? 아리스는? 라우노는?”

“몰라…… 지금 라케드 님이 이것저것 알아보고 계셔. 먼저 대피한 비전투원들을 제외하면 세피로스 님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를 가장 먼저 이동시켜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어. 다른 곳으로 대피한 건지 아니면…….”

시오는 말을 아꼈다.

“라케드 님? 라케드 님이 여기 계셔?”

시오가 고개를 끄덕일 새도 없이 미레아는 다시 질문을 퍼부었다.

“아리스는?! 거기서 가장 위험한 건 아리스였잖아!”

당황해서 이 말 저 말 주워 담던 미레아는 아리스의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은현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시오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리스는 괜찮을 거예요.”

“하지만 황제에게 끌려갔거나 하면…….”

거기까지 말한 미레아는 최악의 가정을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누구 하나 목숨을 잃었다거나 하는 말은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은현이 손을 내저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설령 황제에게 끌려갔다 해도 아리스가 잘못되었다면 얌전히 있을 황제가 아니지요. 분명 여기저기 떠들어 댔을 거예요. 아직은 잠잠하답니다. 그리고 그 애는 5년 전에도 괜찮았고…….”

하지만 은현의 얼굴에는 잠시 수심이 떠올랐다가 없어졌다.

“앞으로도 괜찮을 겁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미레아의 말에 시오가 미레아의 앞으로 빵과 잼을 밀어 주면서 한숨 쉬었다. 하지만 미레아는 식욕이 사라졌다.

“당분간은 여기서 숨어 있어야지.”

“이런 곳에서 신세 져도 괜찮은 걸까?”

“괜찮으니까 이쪽으로 보낸 게 아닐까나.”

그때, 은현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는 손을 드는 것으로 인사를 생략했다. 미레아와 시오는 그의 얼굴을 보고 화색이 돌았다. 평소라면 도망가기 바빴을 테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 그가 반가운 적이 없었다.

“라케드 님!”

미레아가 화색 하며 손으로 경례 구호를 붙이자 라케드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는 다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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