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젠장, 카디가 보고 싶어.
화살이 그들의 몸을 꿰뚫기 직전인 그 짧은 시간 동안 파울로의 머릿속에서 부정과 이해, 그리고 수용의 단계가 빠르게 지나갔다. 율비네가 비틀거리는 아리스의 어깨를 부축하려 하자 그는 손길을 뿌리치고 스스로 섰다.
“아리스!”
아리스가 공간 전이를 해서 화살들의 위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팔을 뒤로 당기자 화살이 우뚝 멈췄다. 물리 역학 법칙을 재구성하자 화살들이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으로 마력을 거의 다 쓴 아리스는 검은 날개가 부스스 흩어지며 하늘에서 추락했다. 파울로와 율비네가 달려가 그를 받았다. 하지만 그사이 그들은 사복 검으로 만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자, 제 승리입니다.”
라우노가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괴물들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었다. 그것들은 날뛰는 것을 그만두고 라우노의 뒤에 정렬했다.
“아항, 벌써 끝난 거야? 그 용은 도망이나 가고. 너무 싱겁지 않아?”
마니샤가 춤을 추듯 빙글 돌며 땅에 내려앉았다.
“그대로 두면 루데키아스는 죽겠군요.”
실제로 아리스는 정신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손목을 잡아 맥박을 확인하는 율비네의 목울대가 울렸다. 서맥이 심했다.
“그나저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도망가다니, 세피로스도 40년 사이 많이 변했네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쉽게 동료를 버릴 사람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 네 말대로 회장이 동료를 버릴 사람은 아니지. 지금도 이 상황을 역전시킬 방법을 찾으러 갔을 거다!”
파울로의 허세에 라우노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저는 조금 관대함을 발휘해 볼까 합니다. 그러니 얌전히 있어 주었으면 좋겠군요.”
“이 세계를 마수의 땅으로 만들 생각인 네게 협조할 거로 생각하나?”
“아, 세피로스에게 들은 모양이로군요. 뭐,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상관없습니다. 다만 죽이지 않으면 이용 가치가 있을까 하는 마음에 목숨을 붙여 두는 것이니까 그렇게 아세요.”
마니샤가 율비네를 억지로 붙잡아 일으켰다.
“이거 놔라, 이 자식……!”
그러든 말든 무기를 잃고 기운이 빠진 율비네의 팔을 뒤로 꺾으며 마니샤가 조롱조로 말했다.
“가만히 있어 보라고. 네가 없으면 루데키아스가 깨어났을 때 상당히 상심이 크지 않겠어?”
그 말에 율비네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자신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마니샤를 노려보았다. 파울로 역시 투항한다는 의미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좋아요. 당신은 현명하군요.”
라우노의 말이 굴욕적이었지만 여기서 쓸데없는 반항을 하다 죽는 것은 개죽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의 안위는 무사하다는 점이었다. 라우노가 마력 구속구를 채운 아리스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가자 율비네가 항의했다. 하지만 마니샤가 명치를 때리는 바람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 갈까요?”
라우노가 워프 게이트를 열었다. 반대편으로는 궁정 내부로 보이는 실내 공간이 보였다. 마니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율비네를 끌고 게이트에 들어가려는데 라우노가 불러 세웠다.
“마니샤.”
“응?”
마니샤가 방끗 웃으며 라우노를 돌아보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자만하지 마라. 세피로스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
그 말에 마니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애? 전력을 다하지 않아서 지금 이런 상황이 된 건데 무슨 생각이래?”
하지만 라우노는 의뭉스러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네게 임무를 하나 더 주지. 세피로스가 열었던 워프 게이트의 좌표를 추적해. 미레아를 데려와.”
“아이, 니콜라는 그런 건 꼭 나 시키더라.”
라우노는 투정을 부리는 마니샤에게 피식 웃어 주었다. 그는 황궁 내에 게이트가 직통으로 열리자 당황한 근위대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며 파울로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아리스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황실로 입성한 그는 개선장군처럼 가슴을 펴고 거만하게 말했다.
“자, 황제를 불러와라.”
* * *
어느 깊은 곳에서 한 여인이 몸을 떨며 일어났다. 그녀는 길고 구불거리는 흑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잠이 든 사이 자신이 꿈으로 본 것을 떠올리며 석장을 짚고 맨발로 땅을 걸었다. 머리와 몸에 연결되어 있던 선형의 인공물들이 딸려 가다 길이가 짧아 땅에 툭툭 떨어져 내렸다. 여인의 머리카락은 길게 길다 못해 땅에 끌렸지만 정갈하게 빗질 되어 있었다.
눈가에 그늘을 만들 정도로 긴 속눈썹은 그녀의 눈을 깊어 보이게 하였으며, 금색에 가까운 옅은 갈색 눈동자는 다소 몽환적인 눈빛을 만들어 내었다. 비쩍 마른 몸에는 여러 겹의 얇은 천으로 된 원피스를 걸쳤다.
전반적으로 지적인 분위기의 여인은 어떻게 보면 소녀 같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세월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연륜을 풍기기도 했다. 걸을 때마다 석장이 땅에 닿는 소리와 링으로 된 장신구들이 짤랑거리는 소리, 그리고 맨발이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번갈아 가며 울렸다. 이 공간은 춥지도 덥지도 않았지만, 육신의 감각에서 느껴지는 고통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녀는 사방이 투명한 벽으로 된 방으로 들어갔다. 방바닥을 통해 보이는 아래에는 거대한 빛의 흐름이 있었다. 고밀도의 영소가 모여 만든 강이었다. 라슈온의 자연계 영소는 전부 이 강을 통해 세계로 퍼진다.
영소는 혼을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다. 생명이 품고 있는 영소 역시 육신의 수명이 다하면 이곳으로 모여 다른 영소들과 함께 흘러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영소들은 서로 뒤섞이며 한 생명을 이루었던 영혼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라슈온에는 예전부터 환생이란 개념이 없었다. 개인의 영소가 그대로 모여 새로운 육신을 갖는 경우 역시 지금까지 그 예가 없었다. 하지만 그 법칙은 100년 전에 한 번 예외가 발생했다. 페이릭의 특이점이 낳은 결과였다.
여인은 방의 중앙에 설치된 계기판을 작동시켰다. 기계음이 들리고 빛이 투영되어 기하학적인 문양을 입체 영상으로 띄웠다. 구형으로 된 영상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돌려 보던 여인은 작게 혀를 찼다.
“오랜만에 일어난 사이 내 조각이 제 기능을 하기는 했는데…….”
그녀는 발아래로 흐르고 있는 영소의 강을 굽어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되레 역이용하려고 드는구나, 세피로스…… 실망이야. 그게 네 선택이니?”
그녀가 이곳에 스스로를 감금한 이후 대화 상대가 통 없었기 때문에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그녀는 연신 콘솔을 조작하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푹 기대었다.
“게다가 어디까지 방해를 할 생각인 거지?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거니, 니콜라우스?”
여인은 양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것 같은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렸다.
“인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신탁도, 예언도, 내게 남은 패는 이 이상 남지 않았어. 내가 믿는 건 이제 너밖에 없었는데…….”
여인은 고독했다. 이 공간에 들어온 이후 고독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오늘만큼 지독하게 고독한 적은 없었다.
“페이릭…… 보고 싶어.”
이 삶이, 이 생활이, 이 운명이 잔인하다 느낀 적은 없었다. 하지만 페이릭이 남기고 간 특이점을 자신의 눈앞에서 잃는 것이 훨씬 더 두려웠다.
지난 100년간은 그런 두려움과의 싸움이었다. 육신의 고통은 더는 그녀에게 유의미하지 않았지만 두려움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었다. 자신이 전지전능하지 않은 것이 이렇게 통탄한 적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다. 무대도 마련했다. 나머지는 이제 배우들의 일이었다.
그것이 서리 여신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 * *
미레아는 따가운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깨어났다. 하지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윽…….”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다시 털썩 누워 마지막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세피로스가 워프 게이트를 통해 자신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킨 것은 기억났다. 분명 자신을 먼저 게이트에 밀어 넣고 큰 상처를 입은 진을 맡기고 시오도 함께 보냈던 것 같았다. 마법의 여파인지 이동했을 때 기절을 한 것 같았고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러니 중간에 기억이 없고 이렇게 침대 위에 누워 있지…….
그러다 다른 일행들의 행방이 궁금해져서 다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우선은 현재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미레아가 있는 방은 제법 따듯한 느낌이 나는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미레아는 손을 더듬거리며 푹신한 침대를 만져 보았다. 이불도, 침대도 제법 고급 재질이었다. 적어도 적에게 생포되어 감옥에 갇힌 최악의 상황은 피한 것 같았다.
“여긴…… 어디지?”
자신이 무사하단 것은 다른 사람들도 무사하단 뜻일까? 세피로스가 같이 있었는데 다른 일은 없었겠지?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고 나선 미레아는 부드러운 카펫 위에 발을 내디뎠다. 의식이 없는 사이 누군가가 갈아입힌 건지 미레아는 품이 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맨발로 서성거리다 침대 앞에 실내용 슬리퍼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신었다.
침대 옆에는 아리스가 페니드란 대용으로 쓰던 검이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검 하나를 잃은 자신에게 아리스가 빌려주었고, 엉겁결에 들고 오긴 했지만, 정말 써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옷장을 열어 보자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이 깨끗하게 세탁이 된 상태로 가지런하게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짝을 잃고 한 자루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검과 소지품들이 있었다. 미레아가 짐들은 그대로 두고 나무문을 열고 나가자 바로 발코니처럼 생긴 복도가 나왔다.
“우와.”
미레아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뻥 뚫린 시야에는 몇 마리의 용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덩치가 작은 것을 보아하니 아직 어린 개체들이었다.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보니 원뿔형의 건물 벽을 타고 여러 식물이 자라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건물의 형태로 추측하건대 여기는 말로만 듣던 용의 땅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