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그사이 미레아가 괴물들을 전부 따돌리고 달려와 부츠의 마도 기구를 작동시켜 속도를 높이고 도약하여 라우노에게 돌진했다.
“라우노!”
“이런, 미레아 씨.”
라우노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제가 한 번 살려 준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게 어떨까요? 저는 두 번은 봐주지 않습니다.”
“미레아, 떨어져!”
“신경 꺼!”
아리스가 만류했지만 그렇게 대꾸한 미레아는 라우노의 정면으로 검을 찌르며 들어갔다. 미레아는 이 모든 일이 원흉인 그에게 새파란 분노의 불꽃이 일었다. 세피로스가 니콜라우스를 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정면 대결은 피하라 그랬지만 호락호락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저쪽이 부리는 사복 검은 미레아의 반사 신경으로 충분히 반응할 수 있었고 마법이 성가시기는 해도 만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는 다르게 라우노는 미레아의 검을 손끝으로 가볍게 잡았다. 미레아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라우노가 조금 힘을 주자 검신이 부르르 떨리더니 쨍그랑하는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와 동시에 미레아의 복부에 주먹이 묵직하게 들어갔다.
저 멀리 나동그라지는 미레아를 보며 라우노가 혀를 쯧 찼다. 그의 팔 주변에는 푸른 스파크가 일고 있었다. 아리스가 마법으로 라우노의 팔 운동을 방해한 것이다. 완전히 막지는 못 했어도 미레아의 방호복이 제대로 기능했다면 내상을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레아!”
땅에 쓰러진 미레아가 쿨럭거리면서 기침을 하고는 땅에 구를 때 터진 입안에 고인 피를 퉷 뱉으며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산산조각이 난 한쪽 검을 버리고 다른 검을 손에 쥐고 자세를 바로 했다.
“검이 한 자루밖에 남지 않아도 계속 일어나는 건가요?”
“한 자루나 있는 것이지!”
미레아는 검을 고쳐 잡고 도약했다. 라우노가 미레아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당신이 제게 상대가 된다 생각합니까?”
“아니!”
미레아는 현실을 인정했다. 대신 라우노에게 다른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라우노의 사각에서 시오의 총탄이 날아왔다. 라우노가 주변을 경계하며 미리 펼쳐 둔 투명한 방호벽에 막혔지만 신경을 끄는 것은 성공했다. 그사이 아리스가 미레아를 불렀다.
“이거 받아!”
아리스가 던진 것을 무심코 잡은 미레아는 그것이 아리스가 임시로 사용하던 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미레아와 아리스의 검기는 기운이 비슷해서 아리스의 검기에 감응된 검이라 해도 미레아가 사용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아리스는 그대로 검을 미레아에게 내주고 자신은 페니드란을 양손으로 잡았다.
파울로와 진이 협공을 펼쳤다. 율비네가 시오에게 마탄을 일부 공유 받아 둘은 원거리 사격으로 다른 괴물들을 견제했다. 마침내 니콜라우스는 사복 검을 휘두르며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아리스는 반 마력 필드를 펼쳤다. 자신의 마력으로 니콜라우스의 마력이 자연계 영소에 개입하는 것을 막았다. 그 일련의 흐름에 일행들은 잠시나마 승기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라우노는 혀를 쯧쯧 찼다.
“이런 잔재주 따위는 제게 소용없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마력을 소모시키기엔 효과적이지.”
아리스의 말에 라우노가 우습지도 않다는 듯 보란 듯이 하얀 날개를 펼쳤다. 라우노는 진의 도끼와 파울로의 대검의 공격을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흘려보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라우노가 역공했다. 그러자 사복 검이 예상치 못한 각도로 휘더니 진을 꿰뚫고 지나갔다.
“누나!”
아리스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라우노는 일부러 다른 일행들보다 진을 먼저 노렸다. 그녀는 아리스의 사촌 누이이니 그녀의 전력을 상실한다면 아리스가 가장 동요가 크게 동요할 만한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땅으로 추락했고 시오가 달려와 그녀를 받았다.
“괜찮아! 숨은 붙어 있어!”
시오가 그렇게 말했지만, 진의 상처는 관통상이라 출혈량이 많았다. 진이 쿨럭거리며 피를 토해 냈다. 라우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괴물들이 공격을 멈추고 괴성을 내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괴물들의 움직임이 멈춘 사이 파울로가 검 자루를 고쳐 쥐며 아리스의 옆쪽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아리스와 세피로스는 동시에 어떤 것을 눈치챘다.
“모두 이 지역에서 이탈해!”
세피로스의 외침에 라우노가 코웃음을 쳤다.
“이미 늦었습니다.”
괴물들 몸에서 붉은 스파크가 작게 일더니 이내 타닥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늘을 뒤덮었다. 일행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데르카이드이기에 마법을 쓸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 데르카이드는 데르카이드였다.
십 수 마리의 괴물들이 동시에 마력을 방출하자 그 마력 양에 세피로스와 아리스조차 질린 얼굴을 했다. 아리스의 반 마력 필드는 어이없을 정도로 힘없이 흩어졌다. 더 무서운 점은 라우노가 자신 대신 괴물들과 마니샤를 움직이게 해서 아직 제힘의 반도 내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피로스가 마니샤의 눈앞에 눈속임용으로 연막을 뿜어내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헤쳤다. 하지만 거대한 용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작아 은신하기 쉬운 인형으로 현신해 공간 전이로 다른 일행들의 근처로 접근한 세피로스가 외쳤다.
“너희들!”
세피로스는 괴물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 대며 다급한 목소리로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서는 후퇴한다!”
“늦었습니다.”
라우노가 손짓하자 괴물들이 방출한 마력은 수많은 화살이 되어 땅으로 내리꽂혔다. 세피로스와 아리스가 넓게 방어막을 치자 라우노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웃었다.
“노력은 가상하나 그 정도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뚫린 적 없는 마력으로 만든 아리스의 방어막이 깨지기 시작했다. 아리스의 눈에 경악이 들어찼다. 단순히 아리스만의 방어막뿐만이 아니라 세피로스가 힘을 보탠 것조차 약한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서 깨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전멸이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아리스는 페니드란을 대지에 꽂아 일종의 아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공간을 비틀어서 마력으로 된 화살들을 아공간으로 유도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리스는 이미 땅을 정화하기 위해 마력의 대부분을 소실했다.
거기다 무리하게 반 마력 필드를 열었으며 방어막과 아공간 생성이라는 거대 마법을 연달아 실행한 통에 아리스는 마력이 고갈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심지어 모든 화살을 없앤 것도 아니었다. 반절은 세피로스가 있는 주변을 향하고 있었다.
아리스는 자꾸 흐려지는 시야에 눈을 깜박거리며 정신을 잃지 않도록 애를 썼다. 지금은 후퇴를 해야 했다. 진의 부상이 심상치 않았고 세피로스 역시 마니샤를 상대하는 동안 마력을 너무 사용했다. 지금의 전력으로는 라우노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아리스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각 세피로스 역시 아리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멸은 피해야 했다. 특히 이 중에서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하는 상대는…….
방어막을 뚫은 화살이 그들에게 꽂히려는 그 순간, 세피로스는 아껴 두었던 워프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미레아의 목덜미를 낚아채 게이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미레아는 눈을 크게 뜨고 세피로스를 바라보았다.
“세피로스!”
세피로스가 그 옆에 있던 진과 시오 역시 게이트로 던져 넣었다. 미레아는 얼떨결에 상처를 입어 반쯤 기절하기 직전인 진을 받았다. 급한 대로 셋을 게이트 안으로 대피시켰지만 다른 일행들까지 옮길 시간은 없었다.
세피로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화살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운 없이 허탈하게 하하 웃으며 게이트를 등지고 섰다. 자신이 함께 갈 수는 없었다. 추적 마법을 걸지 못하게 게이트의 좌표를 지우려면 자신이 남아야 했다.
미레아가 세피로스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 순간 게이트가 닫히는 바람에 그녀의 손은 공기를 움켜쥐었을 뿐이었다.
“안 돼, 세피로스! 아리스!”
미레아의 목소리까지 게이트 안으로 떨어지며 점점 작아졌다. 다소 투박하게 연결된 마법이 어지럼증을 유발해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정신을 잃었다.
* * *
“세피로스, 우리도 피해야 합니다!”
셋의 모습이 게이트를 넘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파울로가 다급하게 세피로스에게 말했다. 공간 전이로 남은 흔적을 약하게 지운 그는 우두커니 서서 남은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흐려지는 의식 탓에 비틀거리는 아리스와 무기를 잃은 율비네, 그리고 그들을 통솔하기 위해 이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파울로.
확실히 이 인원으로는 라우노에게 대적하는 것은 무리였다. 짙은 패배감이 세피로스의 몸을 훑으며 지나갔다. 비처럼 내리는 화살을 바라보며 세피로스가 슬픈 눈으로 파울로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그런 말을 남긴 세피로스가 파울로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파울로와 다른 일행들을 내버려 두고 홀로 공간 전이를 해서 그 자리를 뜬 것이었다. 파울로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세피로스가 그들을 버렸다. 버렸다는 생각 이외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세피로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고 싶었지만 어쨌든 현실은 지금 이 자리에 세피로스가 없다는 것이었다. 무슨 계획이 있어서 그렇겠지. 무슨 수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일 거야. 그래야 했다. 아니, 아니다. 미안하다니, 정말로 자신들을 버린 것일까.
파울로가 세피로스의 속을 들여다본 것이 아닌 이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을 포함해서 남아 있는 셋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