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거절한다.”
“저런. 이야기도 제대로 들어 보지 않고 거절인가요? 저는 당신의 부름에 이미 한 번 답한 적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니 보답받기는 그른 것 같군요.”
그러더니 입술만 움직여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동지들은 네 의지에 답해 줄 거야.’
아리스가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역시, 그게 너였군.”
“당신이 간절히 부르기에 저는 당신의 의지에 답했을 뿐입니다. 감사 인사는 되었습니다.”
“웃기지 마! 누가 그딴 거에 감사한다 그래?! 어째서 내가 네놈과 마수의 동지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라우노는 조금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세피로스가 알려 주지 않던가요?”
라우노의 말에 아리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세피로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침묵을 고수했다. 아리스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뭐, 그렇게 비협조적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다 방법이 있기 마련이니.”
라우노가 허공을 움켜쥐는 듯한 동작을 하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사복 검이 튀어나와 그의 손에 감겼다. 사복 검은 검날이 여러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각이 어떤 형태로 움직이는지에 따라 모양이 바뀌고 때에 따라서는 길이가 늘어나기도 한다.
단, 움직임 제어와 형태를 굳히는 힘은 대부분 마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복 검을 실제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마법사들은 검보다는 마법을 쓰니 말이다.
하지만 마력이 넘치는 데르카이드에게는 더없이 좋은 무기였다. 라우노가 사복 검을 채찍 형태로 휘두르자 날카로운 검날이 마치 뱀이 움직이는 것처럼 구불거리며 일행들을 공격했다. 아리스를 포함해 그 앞을 막아서고 있던 사람들은 산개했다.
“어딜!”
라우노를 쫓아가려는 세피로스의 앞쪽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폭발했다. 금빛 스파크가 일더니 세피로스의 앞에 금발 머리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금색 날개의 데르카이드가 나타났다. 그녀는 세피로스와 대치했지만 다소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당신의 상대는 나야.”
라우노가 그녀에게 손을 내저었다.
“마니샤, 적당히 봐줘. 이래 봬도 내 오래된 친구니까. 나는 그사이 흑익을 상대할 테니.”
일전에 마녀들의 성이라 불리는 곳에서 한번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지만 일행들은 그것을 떠올릴 정신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적이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 니콜라.”
“라우노 이 개자식!”
세피로스가 분에 차서 마니샤에게 화염 계통의 공격을 했지만, 마니샤는 넓게 방어막을 펼쳐서 그것을 상쇄했다. 비록 니콜라우스나 아리스 정도의 경지는 아니라 해도 용과 비등하게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데르카이드였다.
마니샤는 존재만으로도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시오가 혀를 차며 세피로스를 엄호했다. 마니샤를 상대하며 괴물들로부터 트럭을 보호하는 것은 아무리 세피로스라 해도 벅차기 마련이었다. 트럭으로 접근하는 괴물들은 시오의 총탄에 나가떨어지던가 대기하고 있던 쿤둘렌의 주먹에 퍽퍽 나가떨어졌다. 쿤둘렌은 마니샤의 외형을 보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때 마을 사람들이 말한 악마가 당신이었군요!”
“아아, 맞아. 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악마라 그러더라고. 재미있었지.”
그러면서 마니샤는 경쾌하게 웃었다. 시오가 마탄을 연사하며 마니샤를 견제하자 마니샤는 가당치도 않다는 태도로 공간을 휘게 만들어 자신을 향하던 총알을 전부 다른 방향으로 보냈다. 그사이 세피로스는 다른 것을 준비했다. 트럭에서 라일라가 얼굴을 내밀고는 외쳤다.
“반대쪽에서 해당 좌표 잡았어요!”
그 말을 신호로 세피로스와 쿤둘렌이 움직였다.
“쿤둘렌!”
세피로스가 쿤둘렌을 부르자 그는 무슨 명령을 내릴지 미리 알고 있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협공의 의미로 받아들인 마니샤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짓을 해도 소용 없…….”
쿤둘렌이 쿵 하고 트럭 앞의 땅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여러 색으로 빛나는 전격이 일더니 아래쪽에 커다란 공간이 열렸다. 시오가 트럭에서 뛰어내리자 공간은 순식간에 트럭과 쿤둘렌을 삼켰다.
“워프 게이트?”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마니샤의 앞을 세피로스가 막아서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를 무시하지 마라.”
트럭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트럭 자체에 미리 마법을 걸어 둔 상태였기 때문에 마법이 발동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미리 설정해 둔 값에 따라 트럭은 라슈발렌 본부로 송환될 것이다. 이런 비상 상황을 대비해 미리 준비해 둔 작전이었다. 추적 마법이 없어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좌표였지만,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비전투원들이 아니었다. 비전투원에게 쿤둘렌을 붙여서 무사히 대피시킨 세피로스는 마니샤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꺼져라, 애송이.”
“음, 어차피 내 목표는 그쪽이 아니었으니 상관없어. 당신도 지켜야 할 것이 없어졌으니 나를 상대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겠지?”
마니샤가 눈웃음을 쳤다.
“그럼 나랑 재미있게 놀자.”
그사이 라우노는 손끝으로 괴물들을 부려 아리스를 포위했다. 하얀 날개에 회백색의 피부를 가졌고 신체 여기저기가 기괴하게 변형된 인형(人形)들은 라우노의 지시에 따라 아리스와 그 일행들에게 달려들었다. 난투가 이어졌다.
“젠장, 저것들은 적이야.”
미레아가 자신의 뺨을 때리며 혼잣말을 했다. 그녀는 검집에서 검을 선뜻 뽑아 들지 않고 손잡이만 쥐었다 놓았다만 반복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주변을 노려보던 미레아는 한 번 더 자신에게 되뇌었다.
“적이라고! 싸우지 않으면 내가, 우리가 죽어!”
그사이 미레아에게 달려드는 괴물 중 하나를 시오가 저격하여 머리를 날려 보냈다. 괴물의 피가 미레아에게 튀었다.
“정신 놓고 있지 마!”
시오의 목소리에 멀거니 괴물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뇌척수액과 피를 보던 미레아가 화들짝 놀랐다. 더러운 것이 자신의 옷에 묻는 것은 일상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속이 쓰리고 토할 것 같았다.
“죽고 싶어?! 당장 무기 들어! 얼간이처럼 굴 거면 빠져! 방해야!”
“빌어먹을!”
시오의 재촉에 미레아는 결국 검을 빼 들어 자신의 앞을 막아선 괴물의 왼쪽 눈을 찔렀다. 검을 타고 전해진 기분 나쁜 감촉이 손끝에 맴돌았다. 미레아는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제 됐어?! 성에 차냐고! 라우노 듀랜트 이 개자식아!”
미레아가 악을 썼다. 하지만 라우노는 미레아를 돌아볼 시간 따윈 없는지 아니면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아리스를 공격하는 데만 열을 올렸다.
“아아, 싫다, 정말. 이렇게까지 많을 필요는 없잖아.”
시오가 투덜거리자 미레아가 이제는 망설임 없이 괴물을 베어 내며 말했다.
“우리가 7명이니까 한 사람당 15명씩만 잡으면 된다고!”
“그것도 저 데르카이드들이 없을 때 이야기지만!”
이를 악물며 대꾸한 파울로가 한 번에 괴물 두 마리의 목을 날려 버리며 라우노와 마니샤를 노려보았다. 세피로스는 당장이라도 라우노의 목을 물어뜯고 싶었지만, 마니샤 하나만 상대하기에도 바빴다. 그녀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뭐, 좋아. 우리 6명이 17명씩 잡지, 뭐.”
그렇게 빈정거리며 시오는 마탄을 연사했다. 아리스는 자신에게 연신 달려드는 괴물들을 베어 내고, 또 베어 내면서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토해 내며 라우노에게 외쳤다.
“페니드란으로 무슨 일을 하려는 거지?”
“당신이 알 필요는 없지요.”
라우노는 아까부터 같은 위치에서 허공에 둥둥 뜬 상태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사복 검을 휘둘렀다. 율비네가 아리스의 앞을 막아서며 창으로 그것을 막자 사복 검은 단단하게 변해 긴 창을 옭아맸다. 힘겨루기가 팽팽하게 이어지다가 얼마 안 가 율비네의 창이 세 조각으로 부러졌다.
“율비네!”
진이 무기를 잃은 율비네의 옆으로 달려와 괴물들에게서 그녀를 지켰다. 율비네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물러나며 홀스터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냈다. 하지만 탄창에 들어 있는 총알은 마탄이 아니었고 시오처럼 이리저리 어지럽게 움직이는 상황에서 괴물들의 왼쪽 눈을 정확하게 조준할 능력은 없었다. 라우노와 괴물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보다 좋은 선택지라고는 없었다. 율비네가 분한 얼굴로 혀를 찼다.
“아리스, 넌 물러나 있어!”
파울로가 대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아리스를 막았다. 자존심 상했지만 아리스는 파울로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라우노와 근접전을 벌였다간 자신은 붙잡히고 페니드란을 뺏길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이미 체력적으로 한계라는 것은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괴물들을 베어 내며 파울로의 앞길을 열어 주었다.
아리스가 마법으로 만들어 준 발판을 딛고 도약한 파울로가 자신의 코앞에서 대검을 휘두르자 라우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빙글 돌아 피했다. 대신 괴물들을 부려 파울로에게 공격을 하게 만들었다. 공중전에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파울로는 괴물을 걷어찬 반동으로 재빨리 땅으로 내려와 대응했다.
비록 찰나였지만 잠깐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긴 파울로는 일행들과 괴물들을 빠르게 훑어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적장의 목을 쳐야 하는데 그 적장이 하늘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깔보듯 내려다보고 있으니 복장 터질 일이었다.
공중전에 능한 아리스는 몸을 사리는 바람에 움직일 수 없었고 세피로스는 마니샤를 상대하기 바빴다. 시오와 진의 마탄은 괴물들에게는 통할지언정 라우노에게는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그들의 계략에 휘말려 전력이 분산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