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제14장 백익(白翼)
새벽 호가 보유하고 있던 마지막 결계 기둥이 낙하해 쿵 소리를 내며 대지에 세워졌다. 마검 페니드란이 있는 곳까지 움직이면서 아껴 두었던 결계였다.
이제 이 결계 주변의 땅만 정화하면 페니드란이 있는 곳까지는 금방이었다. 아리스와 라일라가 정화기를 설치하는 사이 리비엘로는 또 추론기를 붙들고 있었다. 추론기를 조작하는 그녀의 얼굴이 밝지는 않았다.
“위험해요.”
리비엘로가 멍한 얼굴로 그렇게 결론을 내었다. 그 말에 세피로스와 파울로의 입매가 굳었다. 리비엘로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라우노가 우리를 따라잡았어요. 이대로라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꼴이에요.”
“그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지?”
세피로스의 질문에 리비엘로가 숨을 가다듬으며 힘겹게 말했다.
“계속. 제 예지가 닿는 곳은 모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어.”
파울로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고, 그와 만나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 이대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쯤은 너도 알고 있잖아.”
“하지만…….”
리비엘로가 걱정하는 것은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예지할 수는 있어도 누군가의 죽음 같은 것을 예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의지의 흐름과 무관할뿐더러 그 상황에서의 변수가 워낙 많기 때문이었다. 라우노의 훼방을 대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의 결과는 리비엘로에게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네 걱정은 알겠다만, 그러기 위해 우리가 온 것이잖아.”
리비엘로는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잘근거리면서 깨물었다. 이 앞에 무언가 더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유속을 멈추고 고인 생명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니, 이것을 생명이라 할 수 있을까. 생명이란 기본적으로 의지를 갖고 그 의지는 여러 가능성을 품고 시간과 함께 흐르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고여 있는 의지라니, 리비엘로는 이런 것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것은 쥬드에게서 느낀 흐름과 비슷했다. 그것의 의지가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어디로 튈지 리비엘로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일전에 본 하얀 괴물들과 쥬드 같은 존재가 더 있다면, 그것이 정말로 마석을 매개로 만들어 낸 일종의 데르카이드라면, 리비엘로의 예지로는 전혀 읽어 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들의 의지는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흐르기 때문이었다.
예측을 할 수 없으니 오히려 예측할 수 있는 일도 있었다. 라우노는 그것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고 그것은 아마 큰 재앙을 낳을 것이었다.
리비엘로는 땅을 정화하고 돌아온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이번 임무가 정말 성공할 수 있을지 리비엘로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세피로스와 파울로는 그 점에 관해서는 계획을 바꾸거나 임무를 중단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설령 임무가 실패한다 해도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리비엘로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일행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번 지역만 정화하면 연쇄 작용으로 클라인 지역의 오염 지역과 부식 지역은 전부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페니드란이 없어도 마수들 때문에 오염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이제 새벽 호를 떠나야 했다. 발록은 파울로와 세피로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이만 헤어져야 하는구려. 이틀 동안 도와줘서 고마웠소.”
세피로스는 조금 섭섭하단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발록이 세피로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솔직히 아직도 완전히 믿기지는 않습니다. 정말 클라인 지역이 정화될 수 있다니……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그대들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텔라인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우리는 황제의 눈을 속이기 위해 다시 대공저를 향해 갈까 합니다.”
“그사이 땅이 정화될 것이오. 암흑 지대는 이제 없어지는 것이외다.”
“기대하겠습니다.”
세피로스와 발록이 이야기하는 사이 비공정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수용했던 트럭을 내리고 일행들은 텔라인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사이 아리스는 다소 성미 급하게 비공정에서 뛰어내렸다. 마지막 신성력 결계에 있는 범위의 땅을 정화하자마자 아까부터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은 페니드란이 있는 방향을 향해 날았다.
“아리스! 같이 가자니까!”
미레아가 그의 밑에서 바이크로 쫓아가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상기된 얼굴을 한 아리스의 옆쪽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은색 비늘로 뒤덮인 세피로스가 용으로 변해 날갯짓하며 만들어 낸 바람이었다.
“너, 기분은 알겠다만 너무 흥분하지 마라.”
하지만 아리스는 세피로스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마검의 마력을 따라 정신이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리스와 미레아를 선두에 세우고 일행들이 그들을 따라 어느 정도 달리자 낮은 언덕이 나타났다. 식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부식 지역의 민둥민둥한 모습 덕분에 언덕의 정점에서 빛나는 인공물을 발견하기는 쉬웠다.
몇 년이나 지났지만 녹슬지도 않은 새하얀 검신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가드는 푸른색이고 부드러운 가죽으로 감은 손잡이 끝에는 붉은 술이 달린 폼멜이 있는, 마검 페니드란이었다.
아리스는 감개무량한 얼굴로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앉았다. 검을 쥘 오른손을 쥐락펴락하면서 침착하게 한 발 두 발 걸음을 내디뎠다.
“페니드란.”
자신의 검을 호명하는 아리스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페니드란은 그동안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 아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들은 아리스가 검을 뽑는 순간을 함께 지켜보았다. 그가 페니드란으로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술식을 따라 마력을 추가로 공급하면 클라인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정화기들이 상호작용하여 암흑 지대는 정상적인 땅으로 변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일행들 역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아리스가 페니드란의 검 손잡이를 잡은 그 순간이었다.
― 아리스?
정신이 연결되자 페니드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아리스는 반가운 마음에 자신을 부른 마검에게 대답을 하려 했지만 그보다는 페니드란의 말이 더 빨랐다.
― 아리스! 아리스 맞구나! 아리스! 드디어 다시 만났어!
페니드란이 연신 아리스의 이름을 연호하며 잔뜩 흥분해서 떠들어 댔다. 아리스가 피식 웃었다.
“언젠가는 너를 찾으러 올 거라고 그랬잖아.”
― 아리스, 나 지금까지 엄청나게 잘했다? 결계도 튼튼하게 유지했고 마수들한테 잡히지도 않았어. 그리고 계속 너를 기다렸어!
“알아.”
― 최근에 결계 안쪽이 무언가 간질간질하다 했더니 그것도 아리스야?
“간질간질? 땅이 정화된 걸 말하는 거야? 그거라면 나 맞아.”
― 역시! 아리스일 줄 알았어! 그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리스밖에 없으니까!
“아니, 나 혼자 한 건 아니고…….”
― 아리스, 다시 만나서 기뻐! 네가 오길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걱정됐거든!
아리스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빠르게 쏟아지는 수다스러운 말 덕분에 어딘가 피곤한 얼굴로 페니드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미안한데 입 좀 다물어 봐. 우리가 정말 중요한 일이 하나 남았거든.”
― 뭔데? 또 엄청 대단한 일이야?
“그렇지.”
― 우와! 신난다!
아리스는 대답 대신 페니드란에 마력을 흘러 넣었다. 자신의 힘을 거의 다 쏟아서, 마력 고갈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만 남겨 두고 말이다. 그것은 클라인에 결계를 만들 때와 비슷했다. 이 세계의 통제권 일부를 자신에게 옮겨 오는 그 감각이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페니드란을 중심으로 클라인 전역에 넓게 포진해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술식을 따라 광범위하게 마력이 흘러넘쳤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곳곳에 설치했던 정화기가 작동했다. 여러 곳에 설치해 두었던 정화기에 새겨진 술식들은 서로 연결이 되었고 결계를 구성하고 있던 술식에 편입되어 하나가 되면서 클라인을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흐름을 완성했다.
아리스는 클라인 전역으로 자신의 마력을 흩뿌렸다. 정화기가 만들어 낸 술식에 그의 마력이 닿기만 하면 신성력이 마력을 증폭시킬 테니 옅은 농도여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마력이 적은 범인들은 상상도 못 할 방법이었다. 오직 마력이 넘쳐나는 아리스이기에 가능했다.
아리스는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지만 이를 악물고 클라인 구석구석으로 그의 마력을 보냈다. 페니드란은 그의 마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지역에 신성력과 마력이 흘렀을 때 마력으로 인해 반딧불이 한꺼번에 날아오른 것처럼 온 사방에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와!”
미레아는 저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다른 일행들을 보니 그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대단하다, 아리스…….”
지금까지 일부만 정화 작업을 하던 클라인이 한꺼번에 정화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만을 고대하던 일행들은 각자 옆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었다. 그런데 손뼉을 짝짝 치던 리비엘로가 갑자기 상체를 숙였다. 그녀는 구역감이 밀려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리비엘로?”
라일라가 리비엘로를 부축하려는 것과 동시에 리비엘로가 외쳤다.
“무언가가 온다!”
“뭐?”
리비엘로의 경고에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머리 바로 위쪽의 하늘이 열렸다. 하늘이 찢어지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연결된 초장거리 워프 게이트가 열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췄고 이내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완전한 문이 열렸다.
“이쪽에는 좌표를 잡아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쿤둘렌이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게이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하얀 새들이었다. 아니, 새처럼 보이는 데르카이드들이었다. 그것들을 데르카이드라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지가 없는 한 그것들은 데르카이드가 아니라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얀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신의 사도라도 강림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