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루데키아스와 세피로스가 눈앞에 나타나서 오염된 땅을 정화하지를 않나, 백익 니콜라우스가 살아 있으며 그가 루아드 제국의 흑막이라 그러지 않나. 발록은 점점 머리가 아파졌다.
“왜 이런 이야기를 저희에게 말하는 겁니까?”
이것은 극비라고 해도 될 만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야 다른 정보는 몰라도 이건 알고 있는 사람이 더 많을수록 좋으니 그렇소.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경고하고 싶소. 이대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뒤통수 맞기 딱 좋소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니콜라우스가 제 입맛대로 설치고 다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일반 사람들의 혼란이 더 클 게 뻔하니 믿을 수 있는 자들 몇에게만 공유 중이오.”
“아까부터 니콜라우스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중인데 그가 마검을 가지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발록의 말에 세피로스가 일행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니콜라우스의 목적이 로아메나 대륙을 마수 소굴로 만드는 것이오. 클라인처럼 말이오.”
일행들에게는 일전에 세피로스가 알려 준 말이었으나, 그런 말은 처음 듣는 텔라인 소속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세피로스는 지금이 텔라인에게 이 정보를 풀 가장 적기라 생각했다. 이렇게 동선이 겹쳤으니 잘된 일이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진실에 접근할 필요도 없이 소수의 사람만 움직여서 이번 일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텔라인을 움직이게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최소한이나마 필요한 정보를 풀어야 했다. 세피로스는 아리스를 가리켰다.
“게다가 저 녀석에게 얽힌 오해도 풀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세피로스의 검증까지 거치자 루데키아스의 ‘루’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빼도 박도 못하게 아리스의 정체가 확정되어 버렸다. 아리스가 넉살 좋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제 소개를 드리자면 저는 아리스 클라인셔드.”
로아메나 대륙의 사어를 통달하지 못한 발록은 클라인셔드란 성의 정확한 뜻을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해라며 가명을 말하는 아리스의 능청스러움에 혀를 내둘렀다.
“제가 루데키아스 대공자와 많이 닮아서 오해를 많이 샀거든요.”
미레아와 시오가 웃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둘의 턱에 호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보고는 발록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렇다 칩시다. 루데키아스를 닮은 분.”
어쨌든 정치 싸움에서 명분이란 것은 상당히 중요했다.
“그렇다면 저희에게 바라는 것이 뭡니까?”
발록의 말에 세피로스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우리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만 하면 되오. 더불어 저희가 마검을 회수하기 전에 마검에 접근하지 말아 주십사 청해 보오.”
세피로스는 발록의 기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니콜라우스가 파 놓은 함정에 휘말려서 마수가 판을 치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은 텔라인이 원치 않을 게 뻔하니 말이오.”
“좋소. 일단 당신들의 말이 사실이라 믿도록 하지요. 라슈발렌의 이름을 거신다면…… 말입니다.”
“여부가 있겠소이까.”
세피로스는 얼른 대답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참에 저희와 동맹을 맺는 건 어떻소?”
발록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세피로스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세피로스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동맹이라 해도 거창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오. 그저 페니드란이 있는 곳까지 태워다 주신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은 없겠소.”
발록은 그의 뻔뻔함에 기함했다. 세피로스의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아리스만이 당연하단 얼굴로 세피로스의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 동맹에서 저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요?”
“마수 소탕. 당신들이 그 이상 바라는 것이 있소?”
세피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텔라인은 어떠한 정치적인 태도도 보이지 않고 그저 마수를 소탕할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조직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라슈발렌과 협력하는 쪽이 황제에게 협력하는 쪽보다 더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황제가 헛짓거리 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소. 그가 마검을 회수하면 무엇보다 마수들로 인해 로아메나 대륙의 피해가 클 것이오. 게다가 두 번째로 황제가 필요 이상의 힘을 갖는 것은 우리가 견제해야 하오. 니콜라우스에게 마검은 중요한 의미고 그가 황제와 결탁한 지금 그의 꿍꿍이속을 막아야 하니 말이오.”
세피로스는 적당히 이야기를 흘렸다.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아리스는 순간 니콜라우스의 목적을 알 것 같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 세계의 종말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서리 여신에 대한 증오가 원인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 원인이든 상관없었다. 부식 지역에서 정체를 숨긴 니콜라우스와 만났을 때 그가 가진 세계를 향한 적의를 아리스 역시 희미하게 느꼈었다.
그리고 뒤늦게 생각해 보니 니콜라우스의 목소리.
‘이봐, 소년. 동지들은 네 의지에 답해 줄 거야.’
아리스가 의지에 먹히기 직전 그 질문을 던진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쩐지 니콜라우스의 목소리와 겹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동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리스의 의지에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마수들이었다.
‘그러니 너는 네 마음속 목소리에 귀 기울여.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뭐야?’
당시의 아리스가 원했던 것은 자신을 증오하는 이 세계의 종말. 마수들은 아리스를 대신하여 그의 바람을 착실하게 이행해 주었다. 왜 하필이면 마수였을까? 지금 생각하면 이상했다. 의지를 현실화하는 방법이야 많았다. 하지만 당시의 아리스는 마수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왜 하필이면 마수를 불러오는 쪽으로 현실화하였는지 뒤늦게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만약 황제의 뒤에 있으면서 자신을 그렇게 내몰아 마력의 폭주를 일으킨 것으로 마수를 꾀어낸 것이 니콜라우스라면 행동이 상당히 일관성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목적은 세피로스가 말한 대로 마수를 불러내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아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왭니까? 그런 짓을 해서 니콜라우스가 얻는 이익이 대체 뭐가 있죠? 니콜라우스는 100년 전 마수 대전에서 큰 활약을 펼친 영웅 아닙니까.”
발록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일찍이 그들이 가졌던 의문과 같은 질문.
“지금 당신의 말은 꼭…… 니콜라우스가 마수의 편이라도 된 것같이 들리는군요.”
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마수에 대항하여 선봉에서 싸우던 사람이 왜 갑자기 마수의 편으로 돌아섰을까.
“이유가 뭐죠?”
“이유라…….”
세피로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자면 니콜라우스는 타락했고, 우리를 배신하였소.”
“그렇다고 갑자기 마수의 편으로 돌아선다는 것은…….”
‘역시 당장 이해시키는 건 힘드려나.’
발록의 거듭된 의문에 세피로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 니콜라우스의 일이 아니라 해도 어쨌든 황제가 마검을 차지해서는 좋아질 게 없다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하오.”
세피로스의 말에 발록은 조금 생각하다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직접 그리 말하니 일단은 믿도록 하겠습니다, 세피로스 회장.”
그렇게 동맹을 맺고 행동을 함께하기로 한 새벽 호는 라일라가 말한 방향으로 진로를 수정했다. 연달아 신성력 결계를 설치하며 나아가는 비공정에서 그것을 내려다보며 그들은 앞으로의 대책을 함께 의논했다.
“당신들이 말한 마검이 있는 장소는 신성력 결계를 설치할 수 있는 곳보다 더 멀리 있군요.”
“많이 부족할까요?”
파울로의 질문에 발록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같은 작업 방식이면 이 구간부터는 직접 마수를 소탕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말에 파울로가 일행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 전력이면…….”
“충분합니다.”
발록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하루. 그 말에 사람들의 가슴이 뛰었다. 특히 점점 강하게 전해져 오는 페니드란의 공명에 아리스는 조금 흥분한 상태였다.
“외부에 설치해 둔 정화기와 부식 지역 내부에 설치한 정화기들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암흑 지대 안쪽의 마수들이 외부로 튀어 나가기 전에 마수들을 소멸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놀랍군요.”
발록의 칭찬에 라일라가 우쭐거렸다.
하루 정도 새벽 호에서 느긋하게 보내면 페니드란이 있는 곳까지는 금방이었다.
* * *
전진하다 휴식하기 위해 비공정을 하늘에 띄운 상태로 정지해 있을 때 세피로스, 파울로, 쿤둘렌이 발록을 찾았다. 발록은 면담을 청하는 셋을 회의실로도 쓰이는 다용도실로 안내했다. 세피로스는 자리에 앉기 전에 발록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알려 드리는 정보는…… 혼자만 알고 있으시오.”
그 말에 발록은 한쪽 눈을 씰룩거리며 못 마땅해했다.
“하지만 저는 본부에 수집한 정보를 보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보를 듣고 본부에 보고할지 아니면 그냥 묻고 갈지는 본인이 정하시길 바라오.”
그 말에 발록은 코를 씰룩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렇습니까?”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지요.”
넷은 둥글게 앉았다.
“혹시 하얀 날개가 달린 괴물에 대해 들은 바가 있으십니까?”
파울로의 말에 발록이 고개를 기울이며 미간을 찡그렸다.
“당신이 무얼 말하는 건지 설명만으로는 알 수 없군요. 마수를 말하는 겁니까?”
그 말에 기다렸단 듯 쿤둘렌이 품속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악마가 만들었다는 괴물, 하지만 그 해부학적인 구조는 인간인 것으로 의심이 가고 기운은 데르카이드와 비슷한 정체불명의 괴물들의 사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