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아리스가 대답을 고르고 있는데 뜬금없이 미레아가 껴들었다.
“저는 5년 전에 마수에게 부모님과 남동생을 잃고 리마 대장님의 아내는 당시에 마수 때문에 두 눈을 잃었죠.”
그 말에 아리스가 움찔거렸다. 미레아는 가슴을 펴고 발록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우리는 그를 믿어요.”
발록이 미레아를 빤히 들여다보자 그녀도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맞받아쳤다. 돌연 발록이 미레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미레아 제인스터입니다만…….”
책이라도 잡으려 하나 싶어 다소 조심스럽게 대답한 미레아의 말에 발록은 한쪽 눈을 찡그리더니 중얼거렸다.
“케이드 제인스터의 딸이로군.”
“네? 저희 아버지를 아세요?”
발록이 아는 체를 하자 미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연이 닿았던 적이 있었다. 그는 나름 유명인이었으니 말이지. 그 불타는 빨간 머리는 그 녀석이나 자네나 똑같군.”
“와, 그러셨군요. 신기한 인연이네요. 그러면 제 아버지의 이름도 걸 테니 믿어 주세요.”
“건방져. 케이드 씨도 그렇지만 내 아내 팔지 마.”
파울로가 미레아의 뒤통수를 퍽 때렸다. 미레아가 앞으로 꺾인 머리를 양손으로 부여잡은 사이 파울로는 발록에게 경고했다.
“뭐, 서로 일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마검을 없애고 싶다면 우리가 당신들을 그냥 둘 수는 없다는 건 알아 주셨으면 좋겠네요.”
발록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는데 사병 중 하나가 부리나케 그들에게 오더니 발록의 옆에 있던 첼시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첼시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대령님, 방금 정찰병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뭐라던가.”
“4번과 5번 결계를 설치한 땅이 완전히 정화되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다고…….”
그 말에 파울로가 거 보란 듯이 양손을 들어 올렸다. 파울로 뒤에 있는 다른 일행들도 비죽비죽 웃었다. 특히, 라일라가.
당황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는 발록에게 파울로가 말했다.
“이제 좀 우리 제안을 들어 줄 생각이 드셨으면 좋겠군요.”
“그렇다 해도 쉽게 믿을 수 없어. 불가능해.”
“가능하거든요?!”
버럭하는 라일라의 입을 미레아가 틀어막았다. 미레아가 라일라를 진정시키는 동안 파울로가 제안을 하나 했다.
“뭣하면 여기 설치한 신성력 결계에도 한 번 시험을 보여 드릴까요?”
“정말 가능하다고……?”
“단, 우리 측 기술을 함부로 공개할 수는 없으니 우리와 서로 협력 관계를 맺는다고 약속하시면 보여 드리지요.”
“이런 정보를 내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진심으로 당신들과 손을 잡고 싶으니 그렇습니다. 그러려면 신뢰 관계가 우선이지요. 그 대가로 우리가 드린 정보는 어떻습니까.”
발록은 정말로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텔라인이 창립된 지 100년 동안 마수에게 오염되고 부식이 진행된 땅을 원래의 상태로 정화한다는 것을 성공시킨 역사가 없었다. 파울로는 뒷짐을 지고는 발록을 중심으로 두고 빙글빙글 돌며 살살 달래듯 말했다.
“그쪽은 신성력 결계를 세우고, 그러면 우리가 땅을 정화하고. 역할 분담이 딱 맞는데…… 이런 기회가 두 번은 안 올 텐데 말이지요.”
“발록 대령님.”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발록에게 진이 입을 열었다.
“텔라인의 최종 목표는 마수의 완전한 소탕이고, 퇴치할 마수가 없어서 소속 용병들이 실직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진은 아직 모든 패를 보여 주지 않아 다소 여유롭다는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게 아리스와 정말 닮아 보였다.
“누구를 적으로 두고, 누구를 곁에 두어야 할지 말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남의 집안 정치 싸움에 휘말릴 때가 아닐 텐데 말입니다?
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마수의 토벌이며, 메르티어스 황제와는 마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대공저까지 길을 열어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
발록은 자신들의 임무를 한번 되뇌었다.
“그 이외의 일은 알 바 아니지.”
그것은 마수 토벌은 자신들과 뜻을 함께할 수 있으면 하되, 정말로 마검이 마수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봉인하고 있던 것이라면 마검을 누가 갖든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우리를 쫓아와도 방해만 않는다면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파울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대공저를 향해 직진 코스를 밟고 있는 새벽 호의 경로를 지적했다.
“우리가 서로 돕는다면 대공저가 아닌 그보다 더 남서쪽으로 경로를 틀어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마검 페니드란은 현재 대공저에 없으니까요.”
이어서 아리스가 대답했다.
“마검은 한자리에 있지 않아요. 상황에 맞춰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고 있지요. 마수가 자신을 잡지 못하도록 말이에요. 지금 우리가 잡은 위치는 며칠만 지나도 변할 수 있어요. 그러니 서둘러야 해요.”
“과연…… 이동하는 마검이라…… 그래서 결계를 이렇게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군.”
그는 아리스를 향해 말했다.
“상당히 영리한 방법을 썼군요.”
“흑익이니까요.”
아리스가 거들먹거리자 사람들은 그 뻔뻔함에 질린 얼굴을 했다.
“뭐, 이렇게 된 거 기념으로 한번 보여 드려도 되지 않을까, 아리스?”
파울로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묻지 않아도 알아들은 아리스는 이중 해치의 문을 통통 두드렸다.
“여기서 내릴게요.”
라일라가 아리스에게 정화기를 주렁주렁 달아 보내는 것을 발록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벽 호는 항해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공중에서 순항 중이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첼시가 내부 해치를 열었다. 그녀는 아리스가 나가자 양 문을 밀폐했다. 아리스는 외부 해치를 열고 이마에 손가락을 붙여 경례 비슷한 것을 하며 뛰어내렸다.
정화기를 쓰는 방법에는 이제 익숙해져서 아리스는 라일라가 없이도 어느 위치에 어떻게 설치하고 어떻게 조율하면 되는지 어깨너머로 배워서 알고 있었다.
발록과 첼시는 검은 날개를 펴고 여기저기 날아다니면서 정화기를 설치하고 있는 아리스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위로 올렸다.
“검은 날개로군.”
“검은 날개네요.”
하지만 일행들은 거기에 변명하거나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더 재미있는 광경을 보여 줄 수 있으니 말이다. 수 분이 지난 후 아리스가 마력을 흘려 넣었는지 신성력이 닿는 땅 전체에 푸른빛이 돌더니 오염되었던 검은 땅이 원래의 색을 되찾아 갔다.
땅의 정화에 대해 미리 설명을 들었어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장관이라 발록과 첼시는 입을 떡 벌렸고 라일라는 의기양양해져서는 어떠냐는 얼굴을 했다.
“어떻습니까?”
저 아래에서 아리스가 비공정을 향해 상승하는 것이 보였다. 외부 해치를 개방하자 그가 올라타 고글을 벗고 손을 흔들었다. 마력을 아낌없이 쓴 탓에 위장하고 있던 마법이 풀려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가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애초에 류진과 파울로부터 아리스의 정체를 들키든 말든 하는 태도였으니 말이다.
발록은 아까 전보다 조금 더 정중해진 기색으로 그들을 함 내에 마련된 내실로 안내했다.
“사실 저희가 일행이 있습니다.”
파울로가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들과 합류해도 되겠습니까?”
발록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남은 일행들을 실은 트럭이 그들을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직접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트럭과 다른 일행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그 안의 사람들까지 수용해 주었다. 뒤따라오는 중이던 다른 일행들은 마중 나온 진에게 이게 웬 횡재냐 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트럭에 남아 있던 일행들이 첼시의 안내를 따라 발록과 파울로 일행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발록은 그들을 보고 쿤둘렌과 눈빛으로 서로 친근한 시선을 나누었다. 그러다 한 인물을 보고 멈칫했다.
“……세피로스 회장?”
아리스를 보아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던 발록이 처음으로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세피로스는 자신의 귀와 용주를 가리기 위해 푸른 천을 두르고 있었지만 얼굴까지 가린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세피로스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생긋 웃으면서 숨길 생각도 없었는지 선선히 시인했다.
“아, 뭐…… 일단은 본인이 맞소. 처음 뵙겠소.”
발록은 이번에는 정말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발록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라슈발렌의 회장까지 직접 움직일 만한 일이었습니까?”
그의 말에 세피로스는 의뭉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밑의 수하들을 믿으니 내가 직접 움직일 필요는 없었지만 클라인의 암흑 지대를 봉인하고 있는 마검의 일은 로아메나 대륙 전반에 걸친 일인데 라슈발렌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소이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오.”
“멍청이처럼 당신의 놀음에 속아 줄 생각은 없습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신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겠군요.”
“그렇게 말하니 말하는 거지만 황제가 텔라인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이오. 저는 그것 때문에 직접 움직이는 것이외다.”
“그게 무엇인가요?”
“음…… 정확하게는 황제의 조력자가 숨기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 황제는 이용당하고 있소. 아마도. 배후에 있는 사람의 말대로 따르고 있는 것일 뿐이지 이 일이 끼칠 파장은 본인도 잘 모를 것이오.”
“배후 세력이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그리고 그건 백익 니콜라우스이외다. 그가 가담한 이상 저는 다른 수하들만 믿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소. 니콜라우스의 힘은 범인들이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고…… 나와는 단순한 관계로 치부하기에는 깊은 연이 있는 사이이니 말이오.”
그 말에 발록이 다시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행들은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정보를 풀어도 되는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세피로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인데 다 생각이 있겠거니 싶어서 잠자코 있었다.
“백익 니콜라우스 말인가요? 하지만 그는…….”
“살아 있소.”
세피로스가 발록의 말을 끊고 강조했다.
“얼마 전에도 모습을 보였소.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