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까요.”
첼시는 율비네의 삐딱한 말투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아드 제국과 협력은 하지만 그렇다고 황제에게 이용당하는 처지는 아니니 말입니다. 어쨌든 이 지역을 이렇게 만든 건 마검 페니드란이고 그것을 가장 잘 통제할 수 있는 건 흑익이니 말이죠. 마검 문제만 해결된다면 죄를 묻는 건 그다음입니다. 그 정도 융통성은 있습니다.”
“상부에 우리를 어떻게 보고할 건가요?”
“글쎄요.”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시커멓고 한쪽 눈에 세로로 긴 상처가 난 커다란 남자가 지휘봉을 어깨에 삐딱하게 메고 나타났다. 그는 파울로와 그 일행들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제 소개를 하지요. 저는 발록, 계급은 대령입니다. 이 비공정의 함장이자 로아메나 전대의 책임자입니다.”
발록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오빈족이었다. 아리스가 쿤둘렌을 처음 봤을 때 무투가로 착각할 정도로 우락부락한 덩치였지만 발록에 비하면 쿤둘렌은 상당히 아담하고 날씬한 근육을 가진 축이었다.
발록은 키가 족히 3m는 가뿐히 넘어 보였고 머리 양옆에 솟은 뿔까지 더하니 위압감이 상당했다. 전신에 난 털은 검었고 이마 쪽에만 하얀 털이 한줄기 나 있었다. 거기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지닌 왼쪽 눈가에는 기다란 자상이 흉터로 남아 있었다.
괴물을 잡기 위한 괴물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정도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툭 밀치면 덩치가 작은 라일라나 율비네는 저 멀리 슝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런 발록이 사람들을 굽어보니 저도 모르게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발록이 상당히 느슨한 태도로 그들을 대했기 때문에 파울로 역시 격식이라고는 거의 갖추지 않은 어투로 말했다.
“오, 제법 직책 높으신 분이 나오셨네. 저쪽에서 소개했지만, 라슈발렌 특수 기동대 소속, 원정대의 대장 파울로 리마입니다. 우리에 대한 건 저를 통해 말씀하시면 됩니다.”
둘은 가볍게 악수를 했다. 발록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웃고 있는 진을 내려다보며 흥 하고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이군, 류 중사. 아니지…… 이제는 텔라인이 아니었지.”
“잘 지내셨나 보네요, 발록 대령님.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록은 손을 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들의 책임자인 파울로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 근방 주민들의 구출 작전을 펼칠 예정이시라고요.”
아무래도 안에서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파울로의 대답에 발록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했다.
“우리와 동맹 관계인 루아드 정부 측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말이지요.”
“이건 라슈발렌의 독자적인 움직임입니다. 이대로 클라인을 내버려 두면 이쪽도 곤란하다고요.”
“그렇습니까.”
발록은 비공정의 가장 핵심이자 명령 중추인 함교에는 그들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당연한 처사였다. 대신 관측소에서 비공정의 움직임을 구경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당신들의 목적은 역시 마검 페니드란인가요?”
파울로의 질문에 발록은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페니드란을 회수한 후 루아드 군대와 함께 암흑 지대의 마수를 토벌할 계획입니다.”
그 대답에 파울로가 흐응 하고 콧소리를 내었다.
비공정은 상당히 조용히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덧 결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오염 지역 한가운데로 들어온 그들은 상공에서 지상에 있는 마수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일행들은 텔라인이 어떻게 이 많은 마수를 소탕하고 신성력 결계를 세우는지 궁금해져서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마수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발록이 선내 전화로 함교에 명령을 내렸다.
“3번에서 5번까지 포문을 열고 12시 방향으로 포격 개시.”
연달아 쾅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이 멀리서 들은 쿵쿵거리는 소리는 포격 소리였던 것이었다. 흙먼지가 일며 포격에 맞은 마수들의 사체가 재가 되어 날아가면서 공기가 탁해졌다. 공중에서 포격을 때려 박으니 마수의 핵을 하나하나 찾아 파괴할 필요가 없었다. 대마수 부대 무기답게 핵까지 한꺼번에 파괴하는 위력은 상상 초월이었다.
그렇게 포격을 하여 마수를 몰아내고 공간을 확보하자 비공정의 아랫부분이 열리면서 커다란 기둥 하나가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진 기둥이 쓰러지기 전에 옆쪽에서 지지대가 튀어나와 피라미드 꼴로 펼쳐져 기둥을 지지했다.
그리고는 앞서 본 그것들처럼 신성력 결계를 광범위하게 만들었다. 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을 피해 남은 마수들이 앞다투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발록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아무리 저희라 해도 암흑 지대의 마수를 하나하나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게 되면 끝이 없습니다.”
“텔라인의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우선은 대공저가 있는 곳까지 결계를 세울까 합니다. 마검이 있다면 그곳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최대한 많은 땅에 결계를 세워 제국에서 파견한 토벌단의 진입을 돕는 것이 저희 목표입니다.”
파울로와 아리스는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텔라인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구닥다리였다. 그들은 일단 자세한 정보를 풀지 않고 질문을 했다.
“하지만 땅이 오염되어 있으면 소용이 없을 텐데요.”
“비록 죽은 땅이라고는 하나 신성력 결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최소한 그 근방에는 마수가 얼씬거리지 못할 테니까요.”
파울로는 잠시 생각하다 발록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그 죽은 땅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발록은 의심 가득한 얼굴로 파울로를 보았다. 하지만 파울로는 여유로운 태도로 설명을 계속했다.
“보시면 알겠지만 우리는 류진을 제외하면 대인 부대라 마수를 상대하는 효율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땅을 정화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갖고 있지요. 어떻습니까? 저희와 협력할 생각은 없습니까?”
파울로의 꿍꿍이를 가늠하는 중인지 발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파울로는 어깨를 으쓱였다.
“못 믿으시겠으면 당신들이 결계를 세운 곳들을 점검해 보시지요. 저희는 당신들의 결계를 따라 땅을 정화하면서 쫓아오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지금 이 땅을 정화해 보시지요. 안전은 확보했으니 당신들 말대로 정화하는 일은 수월할 겁니다.”
“그렇게는 못 하죠. 우리 측 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파울로가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발록은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부관을 불렀다.
“4번과 5번 결계를 점검하고 오게.”
그렇게 명령하자 텔라인은 소형 비공정을 띄웠다. 그 모습이 일행들은 조금 부러웠다.
우리도 비공정만 있으면 작업 효율이 몇 배는 올라갈 텐데!
정찰 보낸 것을 기다리는 동안 텔라인의 대형 비공정은 다시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파울로는 발록에게 말했다.
“황제 말고 우리와 손을 잡는 것이 어떤가요? 우리는 땅을 정화할 수 있고, 마검을 찾는 것도 도와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발록은 아리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를 하고 고글을 써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역시 류진과 함께 있을 데르카이드는 한 명밖에 없다는 첼시의 생각에 동의하는 바였다.
“주민들의 탈출이 목표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야 마검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이 우선순위가 되겠지요. 당신들은 마검을 감당 못 하잖습니까.”
“그러는 라슈발렌에서는 마검을 감당할 수 있다?”
발록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관심이 있는 기색이 있자 파울로는 말을 이었다.
“우리 쪽 패를 전부 보여 드릴 수는 없지만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 땅에서 마검을 회수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고 있습니까?”
“마검은 마수를 불러들입니다. 마치 데르카이드처럼요.”
“그 전제부터 틀렸습니다.”
파울로의 부정에 발록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마수가 마검을 탐내며 그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마검은 스스로 결계를 만들어 내어 마수들이 그 결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진실입니다. 마검이 없다면 암흑 지대 안에 있는 마수들은 다시 대륙 전역으로 퍼질 것입니다.”
“그 말에 대한 근거는?”
그도 그럴 게 발록은 파울로 입에서 나온 정보를 처음 접하였다. 텔라인은 항간에서 말하는 마검이 암흑 지대를 만들어 마수를 끌어들였다는 가설 쪽에 동의하는 바였다. 마수에 대해서는 전문가인 텔라인이 이처럼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수를 하게 된 것은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우선 암흑 지대로 변한 클라인에 모여 있는 마수들이 너무나도 많아 각 개체의 이동을 제대로 조사할 수 없었다.
거기에 지금까지 루아드 제국은 클라인을 조사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는커녕 상당히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었다. 클라인이 그렇게 된 것에는 메르티어스가 구린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 본인이 루데키아스 대공자를 도발하는 통에 마수들을 불러오는 결과를 이끌었으니 그것이 세간에 알려지면 황제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텔라인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상당히 한정적이었다.
자신들의 잘못된 정보를 파울로가 부정하고 나서자 발록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따지고 들 수밖에 없었다.
“못 미더우시면 한번 해 보십시오. 그땐 이미 늦었겠지만.”
마치 약이라도 올리는 것 같은 말이었지만 발록은 진지한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리스는 최대한 입을 열지 않으려 했지만, 발록은 파울로가 아니라 그에게 물었다.
“당신을 어떻게 믿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