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음, 괜찮을 것 같아요. 그쪽의 움직임은 지금 열심히 헛다리 짚고 있으니까요. 다만 변수가 하나 있어요. 정확하게 특징짓진 못했지만, 이 움직임은 아마 텔라인이 아닐까 싶은데…….”
“텔라인이라고?”
파울로의 말에 리비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對)마수 용병 집단인 텔라인 부대는 원래는 어느 한 국가에 매이지 않은 독자적인 집단이나 지금은 루아드 제국과 동맹을 맺고 클라인의 마수 소탕 작전에 참여한 상황이었다. 또, 류진이 몸담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
황제는 텔라인을 통해 마수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마검을 회수하겠다는 목적이었으니 텔라인이 근방에 있다면 황제에게 아리스의 위치가 노출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상당히 가까이 있는 것 같은데 흐름으로 봐서는 그쪽이 우리에게 적대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호의적이지도 않아요.”
“그럼 피해 가야 할까?”
“이미 늦었어요. 지금 피한다 해도 그들과는 결국 한 번쯤은 만나게 되어 있어요. 이야기라도 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는 유동성이 있는 상태예요. 이야기가 잘 풀린다면 텔라인을 통해 황제와 마찰이 생길 만한 상황은 없을 수도 있지요.”
리비엘로는 고개를 기울이며 지금까지 얻은 정보와 유추한 것들을 다시 곱씹으며 말했다.
“여기까지가 현재 진행된 흐름이고 나머지는 직접 만나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때 공중에서 주변을 탐색하던 아리스가 돌아왔다. 최근에는 출발하기 전에 주변에 오염 지역의 상태를 공중에서 조사하기 위해 아리스가 정찰을 나갔다. 공중이 그나마 지면보다는 안전하고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아리스는 돌연 야비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보고했다.
“제가 아주 재미있는 걸 발견했는데요.”
대체 무엇이길래 평소 매사 심드렁했던 아리스가 저렇게 신나 하나 싶어 일행들의 호기심이 높아졌다.
“이 근방에 텔라인이 지나간 것 같은 자리가 있어요.”
그 말에 사람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따라와 봐요.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더 나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니 궁금증만 더 커졌다. 아리스는 자신이 둘러보고 온 오염 지역 안쪽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곳이 평범한 오염 지역 안쪽이었다면 마수가 득실득실 들끓어야 정상이었다. 그런 곳을 아리스가 앞장서서 들어갔다.
“잠깐, 이대로 오염 지역 안쪽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태세를 정비해야…….”
파울로가 기겁하며 만류하자 아리스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 태평한 말에 다들 미심쩍어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단언했다.
“이 곳에서만큼은 마수 따위에 겁먹을 필요가 없을걸요?”
그러면서 다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로 다른 일행들이 다소 경직된 태도로 따랐다. 남들이 그러든 말든 아리스만큼은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아리스의 안내에 따라 길을 가는 동안 그들은 마수와 마주치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리비엘로가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을 했다가 다시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미간을 찡그렸다. 옆에 있던 세피로스 역시 리비엘로가 알아차린 것을 느낀 듯 긴장을 풀었다.
그렇게 아리스를 따라간 일행들은 제법 큰 기둥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림잡아 약 50m쯤 되는 그 거대한 기둥은 아래에 지지대를 하늘 높게 설치해 세워져 있었고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는데 일행들은 그것을 보고 짧게나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리비엘로가 말이다.
“어머나, 이거 참 고맙네요.”
기둥은 서리 여신의 성서 문구가 새겨져 있었고 빛의 정체는 신성력이었다. 서리 여신의 신전을 대신하여 약식으로 신성력 결계를 세운 것이었다. 이 약식 결계를 세운 자들이 텔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기둥에 고양잇과 맹수가 포효하고 있는 형상을 딴 그들의 인장이 아주 크게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텔라인에 몸담고 있을 땐 이런 신성력 결계의 시제품을 설계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완성했나 보네.”
진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텔라인은 아마 신성력 결계로 마수의 접근을 막고 안전을 확보한 다음 이 길을 지난 것 같았다. 마력으로 술식을 깔고 신성력으로 땅을 정화하는 것까지 작업하며 지나간 라슈발렌과는 달리 마수를 막을 임시방편을 세운 셈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설치해 준 결계 덕분에 정화기를 설치하고 아리스의 마력만 조금 있으면 리비엘로의 신성력이 없어도 땅의 정화는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다. 마수도 없겠다, 신성력은 준비되어 있겠다, 이런 기회를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결계의 중심이 되는 기둥에서 나오는 신성력은 마수는 막아도 오염된 땅을 정화할 수 없었다. 땅이 오염되고 부식되는 이유는 영소의 고갈 때문인데, 신성력은 영소가 아니다. 신성력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실질을 가진 물질은 아니었다. 신성력이 있는 곳은 신의 권능이 닿는 자리라는 일종의 신호였고 신의 권능으로 영소를 보호했다. 더 쉽게 설명하자면 삿된 것에게 보내는 경고문이다.
그러니 마수에게 신성력은 서리 여신의 권능이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수의 접근을 막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영소를 보존할 수는 있어도 신성력 자체는 영소가 없어 오염된 땅을 정화하지는 못한다. 정화기의 원리는 마력으로 영소를 공급하고 그 영소를 이용해 서리 여신의 신성력으로 땅을 되돌리는 것이니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로 고맙게도 텔라인이 그들이 가는 길마다 신성력을 깔아 준 것이다! 더불어 마수도 치워 줬다! 마수랑 싸워서 공간을 확보하고 다른 마수들이 몰려오기 전에 부랴부랴 정화기 설치하던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살짝 아쉬운 건 동선이 겹치다 보니 언젠가는 텔라인과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전력으로 치면 이쪽도 만만치 않고 저들이 먼저 마검이 있는 곳까지 도달한다 해도 검을 뽑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야말로 다 된 밥에 숟가락 얹기!
“그나저나 이 기둥에서 나오는 신성력은 제법 순도가 높은데요? 상당히 고위 사제가 만들었나 봐요. 이만한 기술력으로 양산품을 제작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신성력을 계측하던 라일라가 조금 놀라며 말했다. 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당연하단 듯 말했다.
“텔라인은 돈이 많아. 이런 장비를 만드는 데 돈을 아낄 필요가 없지.”
“우리보다요?”
미레아의 순수한 궁금증에 세피로스는 아픈 곳을 찔린 얼굴로 말했다.
“마수는 여러 국가의 골칫덩어리니까 여기저기서 자금줄을 끌어올 수 있거든. 지원도 제법 많이 받고.”
“우리는요?”
“내가 여기저기 사업 벌여 놓은 거로 충당 중이다.”
그제야 미레아는 자신의 월급 출처를 깨닫고 아하, 하며 감탄사를 작게 내뱉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감사하게 쓰도록 하지요.”
“속도가 빨라지겠군.”
파울로와 세피로스는 서로의 의견에 동의하며 향후 계획을 다시 세웠다. 시오는 옆에서 듣고 있다가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정말로 텔라인과 마주치면 어떡할 거예요?”
“일단 얘기를 해 보지요. 어차피 마수 소탕이라는 목표는 똑같으니까요.”
진이 입을 열었다.
“텔라인의 상층부는 얘기가 안 통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말 그대로 마수 사냥에 미친 집단이라 마수만 없앨 수 있으면 여러 조직과 손을 잡거든요. 황제랑 동맹을 맺으면서 내건 조건보다 우리 쪽이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이 저쪽 목표에 더 들어맞을 겁니다. 그럼 넘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죠.”
“하지만 누나는 나 때문에 거기서 나왔잖아.”
아리스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진이 손을 내저었다.
“꼭 너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텔라인을 그만두고 나온 건 네가 일으킨 사고보다는 너와 친인척인 내가 너무 외부에 노출되는 게 문제라 나온 거지. 라슈발렌처럼 신분을 감추는 집단이 아니다 보니…… 그들이 무작정 데르카이드를 싫어하는 건 아니야. 그 집단은 오로지 마수 소탕에 미친 사람들이면 누구나 용병으로 받았거든. 그래서 개중에는 데르카이드도 있었어. 난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저쪽이 싫어하는 건 나 하나란 소리네?”
진이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저쪽은 황제와 거래했으니 덮어 놓고 일이 잘 풀릴 거라 여길 순 없지. 대화는 해 보겠다만 여차하면…….”
파울로의 걱정에 율비네가 덤덤하게 말했다.
“회생 불가능 정도는 아니어도 당분간 움직이지 못하게 쑥대밭으로 만들어 보죠.”
그 무서운 소리에 일행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율비네는 텔라인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 중 하나였다. 텔라인은 오로지 마수 토벌을 위한 집단이다 보니 다른 국가들과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 말인즉, 다른 국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거리낄 게 없다는 태도로 외국을 포함해 마이련 자국 정부마저 감히 못 건드리는 류가의 세진 지역까지 거리낌 없이 찾아와 흑익을 내놓으라며 노발대발하다 간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류광준이 자신 역시 외손주의 행방을 모른다며 시치미를 뚝 뗐고 텔라인에서는 증거를 잡지 못해서 물러났지만, 기회가 된다면 또 꼬투리를 잡을 게 뻔했다. 아리스가 외가의 보호를 마다하고 떠난 이유의 절반 정도는 텔라인을 의식해서이기도 했다.
아리스와 라일라는 시험 삼아 정화기를 신성력을 내뿜고 있는 기둥 주변에 설치해 가동해 보았다. 결계가 닿는 범위 안의 땅이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그들은 비죽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진정 시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