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제13장 텔라인 대(對)마수 부대
날짜는 어느덧 6월 17일.
그날은 일행 대부분이 한껏 예민해져 있거나 조금 우울해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그것에 대한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구 하나 입에 담지 않았지만 이른 아침부터 서로의 가라앉은 모습을 보며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추모의 날이었다. 아리스가 5년 전 마수 대습격을 일으킨 날인, 6월 17일.
아리스에게는 아버지가, 미레아에게는 자신을 제외한 식구들이, 리비엘로, 파울로, 그리고 세피로스에게는 동료들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줄곧 오염 지역의 바깥 외곽을 따라 야금야금 땅을 정화하며 나아가던 원정대 일행들은 겸사겸사 가장 가까운 작은 도시에 들러 자리를 잡았다. 정신이 딴 곳에 팔린 오늘 같은 날은 차라리 휴식하는 쪽이 더 나았다.
미레아와 아리스는 제단에 놓을 하얀 꽃을 사러 나왔지만, 꽃집에 있는 하얀 꽃이란 꽃은 전부 동이 나서 어쩔 수 없이 하얀 꽃 말고도 여러 색이 섞인 꽃을 샀다. 루아드 제국과 세로킨 공국에서는 흰 꽃을 헌화로 쓰지만, 마이련이나 히루카에서는 고인에게 다양한 색의 꽃을 공양했기에 고인에 대한 마음만 같다면 사실 꽃 같은 것은 어떤 종류든지 상관없었다.
꽃을 사고 돌아가는 길에 본 도시의 분위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 근방의 마을과 도시 역시 비슷한 분위기일 것이었다. 5년 전, 마수 대습격으로 인한 희생자가 한둘로 그치지 않고 아예 지도에서 사라진 마을까지 있을 정도이니 클라인의 대부분 지역에서 추모의 의식이 돌았다.
신전에서는 망자를 기리는 기도 소리와 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눈물을 훔치며 다른 집들을 순서대로 돌며 각자의 마음을 위로했다. 집마다 희생자가 하나 이상씩은 있으니 공동묘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공동묘지를 지나치는 길에 사람들을 지켜보던 아리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괜찮아?”
미레아가 물어 왔다. 아리스는 간신히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레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괜찮을 리 없었다. 보고 있는 것이 고통일 것이 뻔했는데도 아리스는 유족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눈에 인이 박힐 때까지 말이다.
그 표정이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아서 미레아는 걱정스러웠다. 지금까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 적으나 계속 죄책감에 쫓기고 있었으면서 마치 자신에게 벌이라도 주는 것 같았다.
“보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 봐야 해.”
아리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살고 싶었기에 그 누구보다 이 세상을 미워했으면서, 반대로 살고 싶었기에 그 누구보다 상처받은 보잘것없는 인간. 아리스는 남들의 생각보다 작은 인간이었다. 그런 그의 정신력이 버티기에는 지나치게 큰일을 겪었고 그렇게 몰아붙인 건 이 세상이었다.
아리스는 세상이 미웠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신을 부정했고 이 땅에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공범이었다. 하지만 미레아에게 속내를 들킨 이후 아리스조차 존재를 몰랐던 내면에 있던 죄책감이란 의식을 한번 깨닫고 나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슬퍼졌다. 울고 싶었지만 울면 안 됐다. 자신의 앞에는 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슬픔을 겪은 이들이 있었다.
아리스는 5년 만에 새로운 생각을 했다. 대체 우리는 무엇부터 잘못되었을까. 아무도 바라지 않았던 이런 세상은 무엇부터 잘못되었을까.
백익 니콜라우스. 그자가 그리는 그림 속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리스는 이러저러한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공동묘지를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미레아는 어느 날 아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을 가볍게 잡고 이끌었다. 아리스의 것보다 훨씬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얽혀들어 왔다. 미레아는 감히 자신이 모든 사람의 대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서 작은 온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었다.
아리스가 흠칫거리며 미레아를 돌아보았다. 미레아의 손을 차마 뿌리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마주 잡지는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미레아는 한 손에는 꽃집에서 산 알록달록한 꽃다발을, 다른 손에는 아리스의 손을 꽉 잡고 빠른 걸음으로 공동묘지를 지나갔다.
아리스는 순순히 미레아의 뒤를 따라왔다. 시야에 파울로가 들어오자 미레아는 바로 아리스의 손을 놓았다. 그때, 아리스가 다시 미레아의 손을 붙잡았다. 미레아가 돌아보자 아리스는 길을 잃어버린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레아가 맞잡고 있던 손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지금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이 있어.”
별것 아닌 그 말에 처져 있던 아리스의 어깨에 조금이나마 힘이 들어갔다. 미레아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아리스에게 건넸다.
“같이 기도해야지.”
아리스가 바라보자 미레아는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아리스는 꽃다발에서 꽃 한 송이를 빼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 * *(톡희_작_지_나가던_행_인)
리비엘로는 약식이지만 제단을 만들어 꽃으로 꾸몄고 세피로스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초를 켰다. 미레아와 세피로스, 파울로는 매해 레인과 휴레오의 묘에 꽃다발을 놓았지만, 올해는 임무 때문에 묘지에 직접 갈 수 없었으니 그 대신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미레아는 초 앞에 가족들의 사진을 놓았고 아리스는 자신의 별장에서 챙겨 온 아버지의 사진을 꺼냈다. 이런 날이 올 것 같아서 벽난로 위의 사진을 챙겨 온 것이었다. 미레아의 가족사진은 서로 돌아가면서 식구들을 찍었기 때문에 넷이 한 번에 모여 찍은 사진이 없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지만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리비엘로의 기도 소리가 오염 지역 근처라 삭막해진 대지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이런 의식은 사기를 떨어트리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의욕을 불태웠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그들의 분노는 한군데를 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리스는 밝게 웃고 있는 부모님과 휴레오의 가족사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미레아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고 생각해?”
갑작스러운 질문에 미레아가 고개를 들었다.
“모르겠어.”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전에는 살아 계실 거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요즘은 모르겠어.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반드시 내게 돌아오셨으리라 생각해. 그런데 소식도 없고. 세피로스도 돌아가신 게 맞으니 포기하라고 하고…….”
그리고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기다리는 것도 지쳐서 그만두고 싶기도 하고…….”
“나도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 못 했어.”
아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메르티어스 황제는 아리스가 식솔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그랬듯, 마법사들이 미리 준비해 둔 장거리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용케도 수도까지 피했다. 듣기로 황제는 끌고 온 기사단의 대부분을 잃었지만, 본인은 가벼운 부상으로 그쳤다고 했다. 그런 그가 마라피네스의 시신까지 챙겼을 리 없었다.
아리스는 당시 경황이 없었고, 사태가 안정되고 나서야 가슴을 치며 괴로워했다. 경황이 없었다는 것은 변명이었다. 자신 때문에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불효도 그런 불효가 어디 있을까. 그것이 항상 후회스러웠다.
“만약 공작저가 있는 안까지 들어가면…… 네 아버지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미레아의 말에 아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페니드란은 대공저와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현 목표는 마검의 회수이기 때문에 당장은 무리라 해도 대공저가 있는 곳까지 땅이 정화된다면 마라피네스의 시신을 수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마수가 시신에 손을 대지 않았을 때의 일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케이드의 시신도 그 근처에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리스는 미레아에게 무슨 변명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추모의 시간을 충분히 가진 후 다음날 파울로가 일행들을 모았다. 일행들은 언제 우울했냐는 듯 다들 원래의 컨디션으로 돌아와 파울로와 세피로스의 말을 경청했다. 리비엘로는 힘을 써서 진이 빠지는 바람에 파리한 입술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드디어 마검 페니드란의 위치를 확정했어요.”
아리스의 느낌으로 시작된 그 작업은 요 며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리비엘로의 예지 능력을 토대로 삼각법을 이용해 정확한 위치를 잡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리비엘로는 다소 무리를 해서 기운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페니드란의 위치를 파악하긴 했지만 접근하는 사이 페니드란이 위치를 바꿔 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조금 서둘러야 했다. 파울로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페니드란에 접근한다는 것은…….”
마수의 소굴 한가운데로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위치를 안다고 무작정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화기를 설치하여 범위를 좁히는 수밖에 없었고 마검을 뽑는 순간 통제를 잃은 마수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더 조심해야 했다.
“목표는 마수 일망타진!”
라일라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리해서라도 빠르게 작업하죠!”
“하지만 범위가 너무 넓어. 처음에 클라인을 정화하면서 최종적으로 땅의 안전을 확보한 후 마검에 접근하기도 했잖아요. 그 작전을 밀고 나가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시오의 의견에 파울로가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주변부를 정화하는 것보다 길을 만들어서 나가면 그렇게 위험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세피로스는 미간을 좁히며 고민했다.
“황제의 추적이 따라붙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하는 데다 마검이 이동하기 전에 잡아야 하는데…….”
리비엘로는 일전에 알차게 써먹었던 추론기를 작동하여 손가락을 움직이기 바빴다.